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282화 (282/341)

스파이가 활약하기 시작한다는 건 (2)

텍스트 파일에 그녀가 남긴 암호는 세 줄의 제일 앞 글자를 딴 ‘내 본명’.

청와대에 제출한 그녀의 프로필에 적힌 이름은 제니퍼 강. 한국 이름으로는 강한나.

완전히 세탁된 신분으로, 김나나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청와대의 누군가가 이 USB를 입수하더라도 파일에 제대로 된 비밀번호를 맞힐 수가 없다는 것이지.

강한나와 제니퍼 강 그리고 미국식 이름을 영어로 입력한 Jennifer Kang.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 번의 기회는 날아간다.

김나나가 파일 처리만 잘해 놨다면, 이 동영상은 증거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법이지.

아마도 지금까지 이러한 시스템과 코드네임을 이용해 범죄자들끼리 연락을 주고받거나 작전을 짜는 데 사용했겠지.

역시 어두운 곳에서 놀던 인물이라 그런지, 이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건 비상하다니까.

나는 파일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김나나.’

그러자, 암호 입력 창이 사라지며 동영상이 자동으로 팝업되었다.

역시!

동영상에서 혹시나 큰 소리가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리를 줄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낯선 광경.

집무실인가?

거긴 아니다.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권재철 대통령에 초청되어 딱 한 번 청와대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때, 본 집무실은 이런 광경이 아니었다.

인테리어가 바뀌었다고 해도, 구조상 지금 영상에서 보는 실내 모습은 아닐 터.

다만, 확실한 건, 청와대를 한 바퀴 돌면서 분명 본 적이 있는 장소라는 것.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소리.

-동영상 녹화 시작했어.

-어머, 어떡해.

익숙한 두 남녀의 목소리.

이내 화면 속엔 김나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옷을 벗은 채 적나라한 모습으로.

화면을 덮은 살색과 땀방울.

-대통령님, 완전 악취미야.

김나나는 입을 가렸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날을 기억해야 되는 거라고.

뒤이어 성태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인물이 성태현이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그렇게 몇 분간 거친 숨소리가 이어진 뒤.

-저도 찍을래요.

김나나의 손이 카메라 가까이 뻗어 왔다.

-그래?

동영상의 앵글이 바뀌며 성태현의 상반신과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그때, 문득 김나나가 말했다.

-근데 이거 제 휴대폰인데요?

-어. 옆에 있길래. 나중에 나도 동영상 보내 줘.

-그럴게요.

그렇게 둘은 카메라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모습을 몇 분이나 찍다가 종료되었다.

원본.

그 흔한 짜깁기나 붙여 넣기가 되지 않은 촬영 원본이다.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그것도 아이를 셋이나 둔 가장이 젊은 필라테스 강사와.

이 정도면 국가를 흔들 만한 큰 사건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놀라운 게 있다면, 김나나가 먼저 동영상을 찍자고 한 게 아니라, 성태현이 촬영을 시작했다는 점.

따지고 보면, 동의를 구한 뒤 영상을 촬영한 게 아니라, 촬영을 시작하고서 동의를 구한 것이다.

불륜도 문제가 되지만, 이런 식의 행동 또한 충분히 문제를 삼을 수 있다.

무엇보다 김나나가 나의 편이라면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대통령이라서 뜻을 거스를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요.’라는 진술을 통해 성태현에게 강압적인 면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내가 조사하는 것 외에도 여성인권단체와 각종 집단에서 들고일어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애초에 김나나를 청와대로 잠입시킨 건, 적당히 소란을 일으키는 정도를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빈집털이 작전 이후에 펼쳐질 상황에서 여러 가지 작전을 지시해 뒀는데, 실제 빈집털이 작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 정도로 큰 수확을 가져올 줄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능한 인물이다.

이게 언론에 퍼지게 되면…….

생각만으로도 벌써 나의 입꼬리가 거칠게 휘어졌다.

물론, 나중에 까발릴 때는 김나나의 얼굴은 확실하게 모자이크 처리할 테니 문제가 되는 건 성태현뿐이겠지.

스파이가 활약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눈치를 채지 못한 선에서 아주 맹활약을.

그 말인 즉슨.

성태현 라인의 지반 자체가 흔들리는 게 머지않았다는 사실.

제23대 대통령 성태현.

그가 몰락할 날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

“말씀하신 안건에 대해 확인했습니다.”

윤설하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빠르게 조사를 마쳤다.

“지금 진행 중인 고등 입시 개정안은 수정에 수정을 걸쳐 만들어진 세 번째 버전으로 확인되었고, 말씀하신 대로 국무총리 측에서 굉장히 힘을 쏟고 있는 걸로 확인됩니다.”

“진행 과정에서 굉장히 딜레이되고 있다고 하던데요.”

“예, 맞습니다. 다른 안건들이 빠르면 두 달, 늦어도 세 달 내에 처리가 되지만, 벌써 6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국회에 제출된 안건이 6개월 내에 통과되지 않는다면, 90% 이상은 사장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도 무려 국무총리나 되는 인물이 푸시했는데 안건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일.

그렇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뭡니까?”

“임시국회를 통해 의회 측에서 발의하고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교육부 측에서 보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 교육부 장관이 누구였죠?”

“황선형입니다.”

대한당 인물이다.

그것도 최규현 정권 당시, 대통령 자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인물.

그렇다면 얼추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내가 확인해 본 결과, 정책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이를 가진 입장에서 부담을 줄이는 방향이라고 봐야지.

황선형은 나름대로 교육계에서는 인정을 받는 인물이고, 성태현과 개인적인 연이 있는 데다가 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민국당이 아닌데도 교육부장관에 임명되긴 했지만, 대한당 소속으로서 국무총리를 비롯한 민국당 인물들에게 앙심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무엇보다 성태현이 직접 추진하는 게 아니라, 국무총리가 추진하는 것인 만큼 더욱더.

“교육부 측에서 반대하는 명목은요?”

“입시 제도의 변화는 수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부담을 가중화시킬 수 있고, 현 입시 제도와 크게 차별화되는 만큼 많은 이들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이유입니다.”

그럴 듯한 변명이다.

실제로 이 안건이 받아들여지면, 현재 고등학생들은 부담스러워질 수 있으니까.

다만, 입시 제도가 바뀌면 혼란이 초래되는 건 지금까지 늘 있어 왔던 일이다.

국무총리의 추진을 거절할 만한 확실한 사유는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황선형 장관이겠네요.”

“맞습니다. 교육부 차관은 민국당 인물이라서 동의를 하려는 편이지만, 장관 눈치에 밀려서 중립을 선언하고 있는 참이거든요.”

결국 빈집털이의 마지막 타깃인 국무총리와 손을 잡기 위해서는 교육부 장관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점.

“교육부 장관 인맥을 파악해 주세요. 기왕이면 제가 아는 지인들로요.”

윤설하는 방긋 웃으며 품에서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이미 조사해 왔습니다.”

척하면 착이라니까.

그녀의 미소를 보니, 왠지 모르게 기대감이 피어났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검사장님이 알고 있는 분들은 따로 밑줄을 쳐서 표시해 뒀습니다.”

중요 인물은 약 10여 명.

그중에서 가장 밑에 있는 인물은 윤설하가 강조라도 하듯 두 줄을 그어 뒀다.

그러나 그 이름을 본 순간, 나도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났다.

하진일.

법무연수원장, 하진일이다.

청와대에서 사표를 받아 쫓아내려던 걸 내가 막아 줬다고 생각하는 인물.

그 이후로도 한 달에 두어 번은 연락을 해 올 정도니, 완벽한 내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게다가 청와대에 대한 반감까지 심할 테니, 일은 더욱 재미있어지겠지.

“하진일 원장이 교육부 장관과 어느 정도나 가깝습니까?”

“둘이 중고등학교 동창입니다. 하진일 원장이 재수를 해서 한 학번이 늦긴 하지만, 같은 한국대학교 동문이고요. 그 이후로 한 번도 멀어지지 않고 계속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의 신용호와 나의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터.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 같네요.”

“제가 준비할 사항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필요할 때 말씀드리죠.”

“알겠습니다.”

***

-오, 최 검사장님 아니십니까?

전화를 받은 하진일 원장은 그렇게나 내가 반가운지 밝은 톤으로 대답했다.

-먼저 전화를 다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늘 안부 전화만 받아서 죄송할 따름이죠.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검사장님은요?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무난하게 안부 인사를 이어 갔다.

“거기는 날씨가 좀 어떻습니까? 여기는 엄청 춥네요.”

-남쪽이라서 그런지 진천은 그나마 서울보단 낫습니다. 아, 그리고 날씨가 추우니 아드님 감기 안 걸리게 잘 채비해서 외출시키셔야 합니다. 어릴 때 걸리면 부모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거든요.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조만간 서울 한번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때 술 한잔하시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내려가서 같이 식사라도 한 끼하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하진일 원장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까?

“예. 언제 올라오십니까?”

-아마 다다음 주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날짜 확정되면 알려 주십시오. 꼭 한잔하시죠.”

-좋지요. 아, 그리고 이번에 부산지검에서 들려온 소문인데…….

평범한 검찰의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서서히 대화 주제가 떨어질 무렵, 자연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리고 혹시 교육부의 황선형 장관님이라고 아십니까?”

-설마, 선형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습니까?

적잖이 당황하는 걸 보니, 문제 있는 건수라도 발견한 줄 안 모양.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여쭤볼 게 있어서요.”

-깜짝이야. 그 녀석이 워낙 구설수에 많이 올라오는지라 놀랐습니다.

이름도 거리낌 없이 부르고, ‘녀석’이라고 편하게 칭하는 걸 보면 친분이 두터운 것만은 확실할 터.

“황 장관님과 꽤 친하시다고 들었는데, 혹시 원장님께서 황 장관님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 여쭤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당연히 소개시켜 드릴 수 있죠.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검사장님이 부탁하시는 건데, 뭔들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능청스레 가짜 이유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아들 녀석도 슬슬 교육을 준비해야 할 시기고, 머지않아 초등학교도 입학을 해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아져서요. 기왕이면 전문가분과 상담을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 심정 이해하죠.

그는 공감한다는 듯이 감탄사를 길게 내뱉고는.

-안 그래도 선형이가 이번 주말에 잠깐 내려와서 같이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혹시 오실 수 있으십니까?

생각보다 일이 더 빠르게 진행된다.

약속이 있지만, 깨고 가야지.

“예, 일정 비어 있습니다. 가겠습니다.”

-네. 그러면 금요일에 일 끝나고 바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혹시 야근은…….

“있어도 없습니다.”

-하하하하, 예. 그러면 한 7시에서 8시 사이로 알고 있겠습니다. 주소는 따로 찍어 드리죠.

그는 능글맞게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1박 2일입니다. 옷 챙겨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술과 고기를 곁들이면 친분을 쌓는 건 순식간이지.

“주말에 뵙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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