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 (6)
박윤규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는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승건 실장과 홍태민 부회장 모두 범인과 DNA가 일치한다고 해서 두 명이 공동 정범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랬다면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용의자의 DNA가 2개로 나눠져서 범인이 두 명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테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박윤규 센터장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DNA가 훼손된 것 같습니다.”
“예?”
“일란성 쌍둥이가 아닌 이상, DNA가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염기 서열이라는 게…….”
그는 과학적인 설명을 덧붙이려다가 복잡해질 것 같았는지, 말을 고쳤다.
“어쨌든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저희 연구원의 DNA를 가지고 직접 검사해 본 결과, 또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유전자 문제가 없는 남자라면 모두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올 거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제 DNA를 가지고 검사해도 용의자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서부지검 이 개X끼들.
처음에 우리가 DNA 검사를 하자고 할 때부터 당당하게 응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국과수 검사를 통해 허승건 실장이 용의자로 판명된다면, 합법적으로 홍태민 부회장의 DNA를 검사할 수 없게 되니까.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용의자가 등장할 리도 없고.
우리가 쉽게 순응하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들의 속임수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박윤규 센터장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NDFC는 검사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런 일이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만, DNA가 훼손되는 일은 국과수 기준으로 1, 2년에 한 번씩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04년에 발생했던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
이때, 용의자의 직업으로 추정되었던 화성 지역의 택시 기사들과 수원 택시 기사들 및 전과자를 포함하여 총 4,600여 명의 DNA를 채취해 검사했지만, 용의자와 일치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고 나서 연구원의 양심 고백으로 국과수에서의 검사 도중, 용의자의 DNA 샘플에 연구원의 땀이 섞여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DNA 검사의 대조 대상이 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니라, 연구원이었다는 사실.
결국 DNA를 채취했던 그 많은 인물들 중 진범이 있었다고 한들, 국과수의 실수로 인해 밝힐 수가 없었던 것.
“결론을 내자면, 지금 확보하고 있는 DNA는 훼손되어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거네요?”
“예, 맞습니다.”
박윤규 센터장은 조심스레 말했다.
“아예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DNA 훼손이 일어날 확률은 굉장히 적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서부지검이 손을 썼다는 건 확실하죠.”
“맞습니다.”
천천히 머리를 정리하던 와중에 문득 의문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서부지검에서 손을 쓸 거였으면, DNA를 훼손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용의자 DNA를 허승건 실장의 것으로 교체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아, 그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DNA가 병원에서 넘어온 것이기도 하고 몇몇 절차가 있어서 쉽게 바꿔치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기술을 사용해서 지금처럼 DNA를 훼손시키는 게 훨씬 더 간편하거든요. 특정 시약 하나면 가능한지라…….”
보안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겠지.
“일단 알겠습니다. 이 사실은 언론에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다른 지검에도 마찬가지고요.”
“예. 그런데…….”
박윤규 센터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국과수에 비해 NDFC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이렇게 국과수에서 1, 2년에 한 번씩 실수하긴 합니다만, 전부 쉬쉬해서 웬만해서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쪽과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어서…….”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국과수의 실수가 겉으로 드러나게 해서 NDFC의 위상이 조금이나마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길 원한다는 것이겠지.
이번 사건에서 NDFC의 도움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서부지검의 계략에 넘어갔을 터.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
“예. 그렇게 하죠.”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만, 지금 바로는 조금 힘들고 사건이 정리될 때 같이 터뜨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래야 저희도 더 부각될 수 있을 테니까요.”
박윤규 센터장은 기대감에 부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부지검의 코를 눌러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
처음부터 사건을 되짚었다.
사건이 최초로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KM그룹 측에서는 클럽의 MD를 자수시켜 범인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피해자는 민간업체에 검사를 맡겨 용의자가 진범이 아님을 밝혔다.
그렇기에 우리 중앙지검에서는 민간업체에 해당 DNA 정보를 요청했지만, 민간업체에서 돌아온 답변은 ‘DNA 검사 결과가 나온 즉시, 의뢰자의 신상 보호를 위해 모든 정보가 비가역적으로 파기되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는 것.
결국 국과수에 있는 DNA 샘플이 전부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 또한 서부지검에서 미리 확인을 하고 움직였겠지.
그렇기에 녀석들은 한마디로 승부를 건 것이다.
용의자의 DNA 샘플을 건드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국과수 연구원들 중 관련된 자들이 잘려 나가는 건 물론이고, 연관된 검사들까지 잘려 나갈 건 분명한 사실.
또한, 언론에서 이를 보도하면 피해자의 억울함이 가중되는 건 물론이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국민들은 뿔이 나서 청와대에 국민청원으로 대통령을 쪼아 댈 터.
결국 서부지검장도 최규현의 철퇴를 피하지 못하게 되겠지.
그럼에도 자신들의 운명을 건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
홍태민 부회장이 진범이었기 때문일 터.
그래서 서부지검은 이번 DNA 검사가 승부처라고 생각하고 사활을 건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DNA 훼손 사실을 모르고 지나갔다면, 틀림없이 서부지검에서는 우리가 더 손쓰지 못하도록 곧바로 언론에 두 번이나 검사 결과가 허승건을 진범으로 지목했다고 발표했을 것이다.
거기서 특수부가 조금이라도 반박하려 한다면, 중앙지검이 실적을 위해 고집을 부린다며 까 내리고 결국 허승건을 처벌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을 테지.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윤설하가 가져온 홍태민 부회장의 DNA를 통해 그들의 계략을 알아채고 판을 뒤집었다.
다만,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승리한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니까.
용의자를 확정할 수 있는 DNA는 사라졌고, 여전히 허승건은 자신을 범죄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
지금부터가 정말 진검 승부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
까놓고 말해서 이런 상황이라면, 진범을 찾는 것보다 숨기는 게 훨씬 더 쉽고 유리하다.
다른 인물도 아니고, 허승건 실장은 사건 현장에 있던 인물이기에 용의자로 지목되기 쉬운 대상이니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인다거나 서부지검에 밀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늘 역전하고 진실을 밝히는 게 특수부니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
똑똑.
“어, 들어와.”
문이 열리며 장하영 부부장 검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볼은 꽤나 상기되어 있었고, 손엔 통화 중인 휴대폰까지 들려 있었다.
“검사장님!”
고개를 들자,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남민제 검사와 통화 중인데, 급히 검사장님께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검사장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조금 전에 배터리 나간 걸 깜빡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얼마 전에 남민제 검사가 지방으로 갔다고 보고드렸잖습니까?”
기억난다.
성폭행 사건 당시 근무 중이던 클럽 MD 중 행방이 묘연한 인물 하나를 찾으러 거제도에 내려갔다고 했었지.
“남 검사가 드디어 그 사람을 찾아냈는데, 그분이 검사장님이 아니면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손짓하자, 장하영 부부장검사는 공손하게 휴대폰을 건넸다.
“어, 남 검사.”
-예, 검사장님.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말해.”
-지금 김부원 씨…… 그러니까 그때 말씀드렸던 분이랑 이야기를 나눴는데, 오랜 설득 끝에 직접 눈으로 보셨던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불안하다며 검사장님 앞이 아니라면 이야기하시지 않겠다고 하셔서 급히 통화를 드렸습니다.
“김부원 씨 옆에 계신가?”
-잠깐 담배 한 대 피우시러 가셨…… 아, 오셨네요.
“전화 바꿔 주게.”
-알겠습니다.
휴대폰 너머로 그가 설명하는 소리가 들린 직후,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김부원 씨. 최서준입니다.”
-아…….
그는 낮게 감탄을 흘린 뒤 말을 이었다.
-정말이군요.
“예. 저랑 직접 말씀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맞습니다. 제가 아무 이유 없이 거제도로 내려온 게 아니라서요. 목소리가 최서준 검사님 같긴 한데, 그래도 확신이 없어서…….
지금 그의 태도를 보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눈치.
안 그래도 DNA 증거가 훼손된 이 상황에서는 어떤 작은 힌트라도 간절했다.
“제가 거제도로 갈까요?”
-아니요. 그건 좀 그렇고…….
그의 목소리에선 걱정하는 기운이 전해져 왔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내려왔다고 말한 것까지 생각하면, 분명 누군가가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는 모양.
-제가 서울로 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어차피 이 모든 걸 바로잡으려면 이곳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통화로 말씀드리기도 애매하고요. 제가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희 쪽에서 교통편과 숙소를 따로 구해 두겠습니다. 그게 안전할 테니까요. 남민제 검사와 함께 움직이시면 될 겁니다.”
그래야 서부지검 혹은 KM그룹에서 함부로 건들지 못할 테니까.
그와 더불어 김부원이 중간에 마음을 바꾸려고 해도 옆에서 남민제 검사가 붙들어 줄 테고.
-알겠습니다.
“예. 서울에서 뵈시죠.”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장하영 부부장에게 지시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로 올라올 수 있도록 비행기 표 준비해 둬. 숙소도 마찬가지고.”
“알겠습니다.”
전화를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김부원이 거제도로 간 건,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KM그룹이나 서부지검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이 남자가 사건의 키를 쥐고 있다는 뜻이다.
그를 만나야 한다.
그가 이번 사건의 실마리가 되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