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 (5)
이틀이 지나도록 고민했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왜지?
대체 왜 DNA 조사 결과가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부지검에서 바꿔치기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만약 홍태민 부회장의 DNA를 허승건 실장의 DNA로 위장시켜서 보냈다면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한 일.
그러나 그들이 상대하는 건 일개 평검사가 아니라, 최서준과 중앙지검 전체다.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당연히 국과수에서 NDFC로 DNA를 이송시켜 다시금 조사를 시킬 거라는 건 뻔한 상황.
서부지검이 국과수로 허승건 실장의 DNA를 보냈었으니, 이번에는 당연히 우리가 직접 허승건의 DNA를 채취해 NDFC로 보낼 것이란 걸 모를 리 없다.
실제로 그렇게 지시하기도 했고.
또한, NDFC는 실제 검사들이 아니라, 연구원들이 재직 중인 곳인 데다가 대검찰청에 소속되어 있는 기관.
서부지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는 뜻이다.
거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더 가까운 중앙지검이 훨씬 더 큰 힘을 가할 수 있다는 건 NDFC도 알고 있는 사실.
다시 말해 NDFC에서 2차적으로 조사를 할 때는 결과 조작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사건은 뒤집힐 테고, 서부지검에서 한 것이라고는 시간을 끈 것밖에 되지 않는 결과가 도출될 터.
하지만 이번 사건은 시간을 끈다고 해서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드러난다거나 범인이 도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홍태민은 재벌가 사람.
그가 해외로 도주한다는 건,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KM그룹을 포기한다는 소리였으니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개 평검사도 아니고 서부지검 전체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젠데 단순히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끄자고 허술하게 움직였을 리는 없으니까.
서부지검이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을까.
그것부터 알아내야 한다.
똑똑.
그때, 머릿속의 고민을 뚫고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어, 들어와.”
나는 생각들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검사장님.”
이두형 부장은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NDFC 관련해서 보고드리려고 왔습니다.”
“말해.”
“현재 허승건 실장의 상피세포 DNA와 머리카락 DNA를 모두 채취했으며 검사장님께서 지시하시면 바로 NDFC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래. 대신 전달할 때 수사관 시키지 말고 자네가 직접 가서 전달해.”
“제가 말입니까?”
“혹시 중간에서 유실되거나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가야 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알겠습니다.”
“DNA 전달한 뒤에는 NDFC 센터장 만나서 이번 건은 24시간 감시 돌리라고 해. 연구원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붙여 달라고 하고.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내일 중으로 윤설하 사무관이 DNA 샘플을 하나 더 구해올 거야. 내가 직접 받아 올 테니까 NDFC에 미리 말해 둬서 새벽에도 연구원 하나 수배해 두고 바로 용의자 DNA랑 일치하는지 검사시켜.”
이두형 부장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 샘플이라는 게 혹시 홍태민 부회장의 DNA입니까?”
“맞아.”
“알겠습니다. 그 샘플은 비공식적으로 확인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서부지검에서 알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해.”
“염려하시는 부분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하영 부부장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
“부르셨습니까?”
장하영 검사는 떡진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채 검사장실에 들어왔다.
“장 부부장 어제도 밤샘했나?”
“예.”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을 옅게 내뱉었다.
장하영 한 명뿐만이 아니라, 특수부 전체가 그녀와 같은 상황.
평검사들과 수사관들까지 전부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자처하고 있었다.
서부지검에서 지목했던 용의자인 허승건 실장이 실제 범인의 DNA 대조 검사 결과가 일치한다고 나온 순간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져 버렸으니까.
이대로 사건이 종결된다면, 중앙지검의 꽃이라는 특수부가 일개 지방검찰청에게 패배한 것이 되고 만다.
특수부의 위엄이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향후 몇 년간은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하게 될 터.
뿐만 아니라, 현재는 최규현 라인이 서울 4개 지검을 집어삼킨 시대다.
이번에 서부지검에 밀린다면, 중앙지검이 크게 힘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
그렇기에 특수부 검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사건을 서부지검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 했고, 나 또한 간절했다.
그래서 차마 쉬어 가면서 일하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사건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일단 하 검사와 진 검사는 국과수에서 이번 DNA 샘플을 조사한 연구원들이 서부지검과 유착 정황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 검사들은 썬더볼트 당시 직원과 목격자들을 찾고 있는 상태입니다.”
“썬더볼트 직원들은 하나같이 현장을 못 봤다고 증언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예. 돈을 받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못 본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전부 그 VIP룸에 있던 경호원으로부터 접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곳에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유의미한 증거를 찾기는 힘든 건가?”
“아닙니다. 남민제 검사가 집념 끝에 거제도에서 사람 하나를 찾았습니다.”
“누군데?”
“저번에 말씀드렸던 유령 MD입니다.”
기억난다.
클럽의 손님들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직원 목록에서 지워져 있었고 모든 직원들도 그를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남자.
“언제 발견한 거지?”
“오늘 새벽에 발견했습니다. 남민제 검사가 중간 관리급 MD에게 끈덕지게 따라붙어서 휴대폰 연락처 목록을 복사했는데 그중에 이 MD의 연락처가 있다고 하더군요.”
“역시 남민제 검사야.”
남민제 검사는 미르스 항공 사건에서도 끈질긴 조사를 통해 사건에 결정적인 키를 발견하게 만든 인물.
장하영 검사의 뒤를 이을 특수부의 차기 부부장검사답게 확실히 다른 평검사보다 날카롭다.
“예. 그래서 오늘 오전에 바로 거제도로 출발했고, 접촉하면 바로 보고한다고 했으니 성과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하영 부부장은 고개를 꾸벅인 뒤, 검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다시 홀로 남게 된 검사장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클럽의 다른 MD들은 전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인물은 잠수를 탔다.
그것도 직원 목록에서까지 교묘하게 지워진 상태로.
뭔가 냄새가 난다.
사건의 키가 될 것 같은 냄새가.
***
나의 개인 오피스텔.
휴가를 빙자해 홍태민 부회장의 DNA를 가지러 간 윤설하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곳.
그녀를 바로 검찰청으로 불렀다가는 만약 홍태민 부회장 측에서 사람을 붙였다가 우리 측 사람이라는 걸 알아채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윤설하가 약속했던 시간은 오늘 저녁 10시.
그러나 그녀는 새벽 2시가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또한 꺼져 있는 상태.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커지기 시작할 즈음.
누군가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어 보자, 역시나.
“어, 검사장님?”
혀가 반쯤 꼬부라진 윤설하가 풀린 눈으로 비밀번호 패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
보자마자 걱정부터 들었다.
“혹시 설하 씨 그 자식한테 마약…….”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녀는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었다.
“괜찮아요, 저 술 마셔서 그런 거니까.”
윤설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 자식이 양주를 어찌나 마시던지…… 제가 먼저 취할 뻔했다니까요.”
평소와 조금은 다른 말투.
비틀거리는 그녀를 소파로 옮기기 위해 부축하려고 다가가자, 진한 술 냄새가 훅 풍겨 왔다.
다행히 약에 취한 게 아니라, 본인이 말한 대로 술에 취한 모양.
윤설하를 소파로 옮기고 있는데 그녀는 헤실헤실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지퍼백 두 개를 꺼내 팔랑였다.
“선물입니다, 검사장님.”
그녀가 들고 있는 지퍼백 하나에는 머리카락이, 다른 지퍼백에는 파란색의 칫솔 하나가 담겨 있었다.
“성공하셨네요.”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여전히 볼은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윤설하에게서 지퍼백 두 개를 받은 뒤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지퍼백을 확인하자, 증거로 쓰기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아주 완벽한 상태.
진탕 취했어도 이 정도라니, 역시 윤설하다.
“집에 데려다드릴까요, 아니면 아예 여기서 주무실래요?”
그녀에게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윤설하는 이미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윤설하가 이토록 흐트러져 보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나는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준 뒤,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들어 이두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검사장님.
새벽 2시임에도 또렷한 목소리.
주변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역시나 중앙지검에서 퇴근하지 않은 모양.
“샘플 확보했어. 지금 NDFC로 갈 테니까 연락해 둬.”
-알겠습니다.
***
그로부터 약 열흘 뒤,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예, 최서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검사장님. 박윤규입니다.
박윤규라는 말에 귀가 확트였다.
그는 다름 아닌 NDFC의 센터장이었으니까.
“아, 네. 센터장님.”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특수부에서 의뢰했던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아무래도 검사장님께서 신경 쓰시는 일이라 제일 먼저 알려 드려야 될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어떻게 나왔나요?”
-그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NDFC로 들어가겠습니다. 5분이면 가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곧장 차를 몰아 NDFC로 향했다.
고작 도로 하나만 건너면 되는 거리였지만, 손에 땀이 쥐어지도록 긴장이 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박윤규 센터장이 직접 만나서 말하겠다고 이야기한 점.
단순히 허승건 실장과 범인의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라면, 전화로 말하지 못 할 이유가 없는데…….
불안한 심정을 안고 NDFC의 박윤규 센터장실로 들어갔다.
“아, 검사장님.”
박윤규는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바로 오셨군요.”
“예.”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예, 알겠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우선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박윤규 센터장은 결과표 한 장을 꺼내 들어 건네며 말했다.
“DNA 샘플 조사 결과, 허승건 실장과 용의자는 동일 인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
“정말입니까?”
“예.”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이런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특수부가 조사한 결과에선 진범은 틀림없이 홍태민 부회장이었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아니다.
그랬다면 미래 문자도 잘못되었다는 결론이 되어 버린다.
예상치 못했던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
“다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박윤규 센터장은 서류에서 또 하나의 결과표를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검사장님께서 다른 샘플을 하나 더 주셨잖습니까?”
윤설하가 가져온 홍태민 부회장의 DNA.
“예, 맞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특이하게도…….”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사람도 용의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잠깐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런 경우엔 저희가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박윤규는 안경을 올려 쓰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