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 (4)
내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서부지검의 공한영 검사장은 화들짝 놀라며 날 바라보았다.
“내가 가르쳤다고.”
“…….”
그는 꿀 먹은 병아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사무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허공에는 내 목소리만 맴돌고 있는 상태
“이 부장, 공문 전달했어?”
“예. 유석원 부장한테 전달했는데…….”
이두형 부장의 시선은 공한영 검사장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반쯤 구겨진 문서 하나가 들려 있었다.
뒷면에 비치는 내용을 보아하니, 공문이 맞는 모양.
나는 다시금 공한영 검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불만 있어?”
그는 이를 꽉 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열받겠지.
그리고 쪽팔리겠지.
여기는 서부지검의 사무실.
적의 심장부에서, 그것도 자신의 부하들 수십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개무시를 당하고 있는 거니까.
가만히 있다가 당한 것도 아니고, 이두형 부장에게 망신을 주려다가 역으로 내게 카운터펀치를 맞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
“공문까지 전달했으니 일은 끝난 것 같은데.”
나는 그를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지, 이 부장.”
“예.”
이두형 부장이 나를 따라 나오려던 그 순간.
“이 새끼가 미쳤나…….”
뒤에서 씨부렁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돌아보자, 공한영 검사장이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대로 나를 보냈다가는 자신의 얼굴에 똥칠하는 것을 넘어 다시 부하 검사들 앞에 설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
그렇다고 내가 조용히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이 부장.”
피식 웃으며 이두형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제대로 들으신 것 같습니다.”
나는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공한영 검사장을 바라봤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죠.”
그는 이를 지르물고 말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넌 기수로 따지면 쳐다보지도 못 해.”
“후우.”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넌 몇 기인데?”
“뭐?”
“내가 사법연수원 43기야. 이 부장, 공 검사장이 몇 기지?”
“연수원 35기입니다.”
“나보다 여덟 기수 높네.”
이두형 부장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기수가 그만큼이나 높은데 나보다 직급이 아래면 반성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말을 내뱉으며 그에게 걸어갔다.
공한영 검사장은 놀랐는지, 순간 움찔했고 그 모습은 다른 검사들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겁먹지 마. 안 때려.”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만 들리도록 물었다.
“더 하면 부하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 것 같은데……. 이러고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겠어?”
공한영 검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개입하면 대통령님께서 가만히 있으실 것 같아?”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어, 그럴 것 같은데.”
그는 이를 빠득 갈았다.
“이거 대통령님께서 신경 쓰시는 일이야. 넌 중앙지검이라고 해도 고작 검사장이고. 분에 넘치는 일까지는 하지 말지.”
“글쎄. 분에 넘치지는 않는 것 같은데…….”
나는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를 담기에 검사장이란 그릇은 너무 작아서 말이지.”
공한영 검사장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한테 겁먹었으면 무섭다고 말해. 한 번은 봐줄 테니까.”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겠지만, 암묵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공한영의 어깨를 가볍게 털어 주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이만할 테니 다음에는 너무 자존심 세우지 마세요. 그때는 제 앞에서 무릎 꿇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이 부장, 얼른 돌아가지. 정권의 개로 전락한 곳에 오래 있다가는 몸에 사료 냄새 밸지도 모르니까.”
***
내가 중앙지검에 도착하자, 송현성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간 거야?
“왜, 누가 뭐라고 해?”
-지금 서부지검에 소문 쫙 퍼졌어. 너랑 공한영 검사장 한 판 붙었다고.
“오, 그래?”
나는 반색하며 물었다.
“누가 이겼다고 소문났디?”
-당연히 네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공 검사장 완전히 꼭지 돌았다니까.
“꼴에 열받아 봤자 어쩌겠어? 속으로 삭여야지.”
-검사장뿐만 아니라, 평검사들까지 난리 났어. 다들 중앙지검 조져 버린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
“그래도 거기가 단합은 되나 보네.”
킬킬 대며 웃음을 터뜨리자, 송현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진짜 옛날부터 간이 큰 건지, 아니면 그냥 미친놈인 건지 구별이 안 간다니까.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어휴.
“그건 그렇고 이번 썬더볼트 게이트 마무리되면 용호랑 셋이서 한번 보자. 걔 이번에 사업 잘돼서 한번 거하게 쏜다더라.”
-알았다. 몸조심해라.
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현 정권까지 개입되어 있어서 생각 이상의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래, 고맙다.”
***
-썬더볼트 성폭행 사건의 향방은 여전히 미궁 속…… 시원한 사이다는 어디에?
-얼마 전에 발생했던 썬더볼트 성폭행 사건은 여전히 수사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난항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모 검찰 관계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심지어 중앙지검과 서부지검의 조사 방향과 수사 내용도 엇갈려 혼선이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중략)……. 각 지방검찰청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피해자의 상처가 더욱 커지고 있다. 검찰은 이에 각성하여 서둘러 범인 확정 및 처벌에 힘써야 할 것이다.
-깨시민일보 장원영 기자
“서부지검에서 일부러 흘린 것 같습니다.”
“100퍼센트지.”
나는 피식 웃으며 신문을 접었다.
지난 번 이후로 서부지검은 정말 이를 갈고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윗대가리인 공한영 검사장이 나한테 대판 깨진 탓인지, 오기와 깡으로 밀어붙이며 중앙지검을 꺾을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오고 있는 상태.
물론, 그 생각 자체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중앙지검이 다른 곳에 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자신 있는 건, 실제 피해자의 주장이 우리 중앙지검과 일치한다는 사실.
우리가 피해자에게 KM그룹의 첫째 아들 홍태민 부회장의 사진을 보여 주자, 그녀는 물뽕으로 인해 정신을 잃기 전까지 그의 바로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도 서부지검은 여전히 허승건 실장을 진범으로 몰고 있는 상태.
그들은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할 당시, 술에 취해서 같이 있던 사람과 실제 강간한 사람을 착각했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진술하는 용의자도 데리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서부지검은 정황증거를 손까지 보고 있는 상태. 명백한 불법행위였지만, 누가 검사들 아니랄까 봐 다른 이들에게 걸리지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조작을 하고 있어 건들기가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황증거는 허승건 실장을 범인으로, 실제 피해자의 증언은 홍태민 부회장을 가리키고 있는 상황.
검찰 내에서도 이렇게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니 수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지.
그렇기에 이렇게 검찰을 까 내리는 기사가 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멀지 않았다.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한 직후, 병원으로 향했던 덕분에 그곳에서 범인의 DNA를 채취해 뒀으니까.
이번 사건에서는 최초 경찰 조사가 시작된 직후, 클럽 MD 중 하나가 자신이 피해자를 강간했다며 거짓 자백을 했다가 DNA 조사 결과가 불일치해서 들통나고 말았던 경력까지 있는 만큼 이번에도 DNA 조사 결과는 아주 중요하게 작용할 터.
국과수에서는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사건이기에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결과를 알려 준다고 했다.
그렇게만 되면 조만간 서부지검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아니, 박살 내 줄 수 있을 터.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장하영 부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장 부부장.”
-검사장님, 지금 자리에 계십니까?
그녀의 목소리에선 다급함이 전해져 왔다.
“검사장실에 있는데 무슨 일 있나?”
-직접 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1분 내로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기자, 갑자기 불길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악재가 될 거라고는 DNA 대조 검사 결과밖에 없는데.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장하영 부부장검사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들고 온 문서 한 장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지금 국과수에서 DNA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장하영 부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했던 DNA와 허승건 실장의 DNA 대조 결과, 동일 인물로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뭐?”
그녀가 건넸던 보고서를 살피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장하영이 말한 대로 국과수의 확인 결과, 용의자의 DNA는 허승건 실장의 것일 확률이 99.99%라는 내용.
“이게 무슨 개소리야?”
“죄송합니다. 저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장하영 부부장도 영문을 알 수 없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피해자가 정말 착각했을 리가 없는데.
아니, 애초에 허승건 실장이 범인일 수가 없다. 그랬다면 이런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 순간, 보고서의 밑에 적혀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이번 분석이 국과수에 맡겨진 이유가 뭐야?”
“처음에 병원에서 채취했던 DNA 시료를 최초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확보했기 때문에 서부지검에서 허승건 실장의 DNA를 채취해 국과수로 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국과수는 경찰에 소속된 기관.
다시 말해 최규현의 손에 꽉 쥐여 있는 상태.
그가 의도적으로 판을 엎으려고 했다면 지금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만약 서부지검에서 국과수에 허승건 실장에게서 채취한 DNA를 보낸다고 해 놓고 실제로는 홍태민의 DNA를 보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
그랬다면, DNA 결과는 지금처럼 나오는 게 당연해질 테지.
이렇게 된 이상, 국과수는 믿을 수가 없다.
남은 건 한 곳뿐.
“DNA 시료, NDFC로 보내라고 하세요.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사람 붙여서 확인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장하영 부부장이 나가자, 머릿속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검찰의 국과수라 불리는 NDFC에 대한 신뢰는 높은 편이었지만, 만약 이번 조사에서 서부지검이 손을 썼다면, NDFC 연구원까지 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
무엇보다 KM그룹이 자금까지 받쳐 주기에 더욱더 위험했고.
결국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윤설하 사무관 불러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검사장실로 들어왔다.
“사무관님, 아직 저희 쪽에서 홍태민 DNA 채취는 하지 못했죠?”
“예. 홍태민은 변호사를 통해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DNA 대조 결과에서 허승건 실장이 범인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면, 홍태민 부회장의 DNA를 채취하려 했지만, 이번 결과로 인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검사 결과가 불일치했다면 피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홍태민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DNA 채취를 강제로 가능했을 테지만, 현 상황에서는 아무리 피해자가 홍태민을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한들, 본인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인물이 등장했고 그의 DNA가 용의자와 일치해 버린 탓에 홍태민의 DNA를 채취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만약 적당한 수를 써서 강제로 DNA 채취를 하려고 나선다면, 홍태민은 KM그룹 법무팀에다가 대형 로펌까지 동원해서라도 거부하려 들겠지.
“홍태민의 DNA만 손에 넣으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겨날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윤설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합법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불법적으로 얻어 낸 DNA라도 필요하시다면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나는 부탁한다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을 알아들은 윤설하는 방긋 웃더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사장님, 저 사흘간 휴가 좀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