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에서 신뢰는 (8)
-현장에서 노트북이 사라졌습니다. USB가 꽂힌 채 통째로 말이죠. 잠깐 정전이 됐던 사이에 누군가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건 다분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전후 상황을 파악한 아나운서가 격정적인 톤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정말 안 보이는데요.”
어느샌가 윤설하도 한 걸음 다가와 TV를 살피고 있는 상태.
“완전히 사라졌죠?”
“네. 사각지대가 아니라, 밖으로 나간 것 같아요.”
실제로 노트북을 훔쳐간 범인을 찾던 카메라가 앵글을 돌려 기자회견장을 전체적으로 화면에 담았지만, 여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에 장영순의 동영상이 담긴 USB를 가져왔던 남성이 장영순과 전혀 관계가 없는 단순 심부름꾼이었다는 수사 결과가 나온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이번엔 기자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기자들과 시청자들은 USB와 노트북에 정신이 팔려 있을 테니까, 현장에 있는 수사관들한테 연락해서 여자 추적해 보라고 지시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암만 빠르게 움직인다고 한들,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여기서 나간 거지?
아니, 누군가에 의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건가?
일단 확실한 건, 이 정전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하여 차단기를 내려 정전을 위장했다는 사실.
여기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설은 장영순의 심부름을 받고 온 여성이 정전을 틈타 직접 노트북과 USB를 들고 현장을 빠져나갔을 경우다.
애초에 등장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장영순의 지시라면, 굳이 이렇게 할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블러핑’을 위해서.
실제로 증거는 없으면서 그저 사실에 대해 밝히겠다고 선언했다면 충분히 이런 짓을 벌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약 증거가 없어서 블러핑을 친 것이라면, 기자회견 전에 분명히 최규현이나 나에게 접근해서 협상을 하려 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똥줄을 타는 걸 이용해야 블러핑의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최규현은 몰라도 나에게 제안은커녕, 접촉조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없는 일을 떠벌린 것도 아니고.
걱정되는 게 없었다면 최규현이 나와 손잡았을 리는 없으니까.
만약 장영순에게 국민들로 하여금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증거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최소한 그것을 밝힌 뒤에 기자회견장을 암전 상태로 만들고 빠져나가는 게 정상적인 판단일 터.
그러나 기자회견이 시작하기 무섭게 바로 여자는 USB와 함께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결국 이번 정전에 배후에 장영순이 아닌, 다른 인물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의심 가는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내가 아니니, 답은 최규현뿐이지.
그가 움직인 게 틀림없다.
그때, 뒤늦게나마 방송국에서도 여자가 사라진 걸 파악하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 현장에서 들어온 말씀을 전하자면, USB를 가져왔던 여성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현재 기자회견장 입구에 있는 카메라로 화면을 돌려 보겠습니다.
TV에선 외부의 모습을 비춰 줬지만, 조금 전의 그 여성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
일단 폭로가 중단되었기에 한숨 돌리긴 했다만, 이거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곧장 휴대폰을 들어 최규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그는 받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면, 국민들은 나와 최규현에게 의혹을 가지긴 하겠지만, 그건 다른 이슈와 시간이 해결해 줄 터.
그러나 장영순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이거 아무래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
***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최규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최서준입니다.”
-아, 최 검사 미안해. 내가 바빠서 전화 온 걸 몰랐네.
너스레를 떠는 걸 보니, 정전을 일으킨 건 이 인간이 확실하다.
“기자회견 봤습니다. 어쩌시려고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예끼, 이 사람아. 누가 들으면 내가 납치라도 한 줄 알겠어.
나는 납치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없는데.
정말 납치라도 한 건가?
왠지 의심이 커졌다.
나는 슬쩍 그를 떠보듯이 말했다.
“장영순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열받아서 더 큰 걸 터뜨리려고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 할망구의 기자회견은 이번이 끝일 거야.
왠지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선 확신이 느껴졌다.
“의원님 설마…….”
-아니, 내 감이 그렇다는 거지.
최규현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최 검사, 이번엔 내가 자네 도와준 거야. 기억해야 돼.
“의원님.”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만약에 여기서 장영순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면 저희에게 의혹이 더 쏠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겠지. 다만 이걸 또 이용할 수 있는 게 바로 대선 아니겠나?
그 순간, 바로 직감했다.
이 개X끼.
손잡자는 말에 좋다고 오케이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
장영순이 폭로하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게 우리에게 타격이 덜 할 것이라는 건 지나가던 똥개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영원히 폭로를 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앞으로 대선까지 몇 주만 더 버티면 최규현은 대통령에 당선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장영순이 다시 입을 열더라도 최규현을 국가원수직에서 끌어내릴 수는 없게 될 터.
납치를 당했다, 범죄의 배후다고 암만 소리를 치더라도 대통령이라는 위치에 오른 인물에게는 그저 생채기를 입히는 정도에 그칠 테니까.
하지만 검사인 나는 다르다.
최규현이 당선되면 검사장에 오르는 게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장영순이 다시금 의혹을 제기하면 그걸 계기로 날 공격할 터.
그렇게 되면, 검사직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겠지.
만약 최규현이 임기 첫해부터 상처 입을 각오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젠장.
이런 식으로 대놓고 범죄를 저질러 버리면 대처하기가 상당히 골치 아파지는데.
“의원님,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가 혼자 죽을 것 같습니까?”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아직 대선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제가 마음먹고 자폭하면 둘 다 죽을 수 있다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에헤이, 최 검사. 날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나?
그러나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우리 같이 살 수 있어. 내가 말했잖아, 높은 곳에서 붙자고. 대선이 끝나도 장영순은 폭로하지 못할 거야.
“무슨 뜻입니까?”
최규현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밤이 늦었네. 자야겠어. 내일 선거운동을 또 나가야 되거든. 나중에 보세.
그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머리가 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암만 서로 뒤통수에 뒤통수를 치는 관계였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가 내게 거짓을 말할 리는 없을 텐데.
게다가 최규현답지 않게 서둘러 전화까지 끊는 걸 보면, 더욱 수상하다.
같이 살 수 있다라…….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말하는 태도를 보면, 장영순이 대선 전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폭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터.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만약에 최규현이 정말로 장영순을 납치했다면?
회유하거나 매수 및 협박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녀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암만 그녀가 도피 중이었다고는 하나, 이번 기자회견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최규현은 현재 장영순에게 믿을 만한 인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장영순이 심부름꾼에게 돈을 직접 전달하지는 않더라도, 넘겨주는 과정에서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는 건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규현이 정전을 일으킨 그사이에 노트북과 USB를 훔치는 것은 물론이고 심부름꾼인 그 여성까지 납치했다면?
그리고 그 중간 다리를 통해 장영순의 소재를 파악했다면?
보나마나 장영순까지도 최규현의 감시하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 중 사건이 벌어진 지 24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
이게 사실이라면, 최규현이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모습이 이해가 간다.
아니,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겠지.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죽인 건가?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다.
장영순의 죽음은 그가 범죄자로 지목했던 두 명인 최규현과 나를 용의선상에 올려 놓게 만들 테니까.
아무래도 이거 잘못하다가는 최규현의 계략에 휘말려 나까지 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 대통령님. 최서준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한번 뵈시죠.”
***
최규현은 영리했다.
아니, 영악했다.
본인은 절대 퀸 인베스트먼트와 연관이 없다고 연신 호소하는 와중에도 그가 고용한 댓글 부대는 최규현이 퀸 인베스트먼트의 실질적인 소유주였음을 은근히 어필하며 경제만은 회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두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긴 하나, 프레임을 다르게 강조한 탓에 먹히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그 덕분일까, 50% 초반까지 내려갔던 그의 지지율은 다시 회복되어 50% 중반까지 올라섰다.
민국당에서는 열심히 분발하고 있지만, 조현웅 의원의 지지율은 최규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수준.
대선까지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터.
이제부터는 그가 당선되는 가정하에 움직여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장영순에 대한 행방이 아직까지도 묘연하다는 것.
그녀가 유일하게 연락을 하는 언론사인 STC에서도 그 사건 이후로 장영순에게 연락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움직임 또한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
당연한 말이지만, 새로운 이슈들과 대선으로 인해 국민들의 관심에서 장영순은 잊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에 계속해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최규현이란 인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때,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경동수.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예, 최서준입니다.”
-검사님, 오늘 저녁에는 잠깐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뵈면 될까요?”
-장소는 비서실장 통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마 광화문 근처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따 뵈시죠.
“네,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마무리하자, 다시금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오늘 경동수와 승부를 봐야 한다.
최규현의 당선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가정하에, 만약에라도 장영순이 죽기라도 했다면 내 검사 수명은 끝이 나니까.
최상의 시나리오는 장영순이 산 채로 어딘가에 은신한 채 완전히 대중들에게 잊힐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시나리오가 짜이리라는 확신은 없기에,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 둬야 하는 것이었다.
일단 머릿속으로 정리한 시나리오는 꽤나 훌륭했다.
다만, 경동수가 이를 동의해 주어야 실현 가능한 일.
그렇기에 오늘밤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윤설하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차장님!”
“무슨 일입니까?”
“방금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장영순이 지금 발견됐답니다.”
“발견됐다고요?”
“예.”
윤설하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그렇긴 한데…….”
그녀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영순이 본인의 차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런 젠장.
최악의 시나리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