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에서 신뢰는 (3)
“넘어갔어?”
“예. 제임스 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장영순이 직접 2만 장을 최서준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김 실장의 보고에 최규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네가 힘도 좋아. 어떻게 가져간 거야? 한 20kg는 될 텐데.”
“캐리어에 넣어 끌고 간 걸로 확인됩니다.”
“그래?”
최규현은 팔걸이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제임스 킴도 믿지 못한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사람 못 믿는 건 여전하다니까.”
김 실장의 고개가 갸울여졌다.
“옛날부터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의 물음에 최규현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최서준에 대한 조사는?”
“100억을 넘기는 장면을 찍긴 했으나, 캐리어에 담겨 있어서 확실한 증거로 쓰이긴 힘들 것 같습니다.”
“돈을 담는 모습을 찍었을 것 아니야? 장영순에게 그 동영상 못 받았어?”
“그게…….”
김 실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영상을 깜빡하고 못 찍었다고 합니다.”
“뭐?”
최규현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내가 그거 챙기라고 했어, 안 했어?”
“분명 지시는 했는데 장영순이 잊어버렸다고…….”
“이 망할 할망구가!”
최규현은 이를 빠득 갈았다.
돈을 넘기더라도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최서준의 배만 불리게 생겼다.
결국 최서준이 상품권을 현금화하는 장면을 추적하는 데 온 힘을 쏟는 수밖에 없어진 상황.
흐름을 추적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득 없이 최서준에게 100억을 고스란히 넘기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최서준은 현직 검사.
돈세탁에 관해서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을 터.
그러나 이 모든 건 장영순의 설계였다.
실제로는 직접 찍어 놓고 본인이 따로 보관만 하고 있었다.
최규현이 신성호에게 똑같은 제안을 했다는 걸 듣고, 완전히 최규현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덕분.
만약 장영순은 자신에게 위기가 온다면 여차하는 순간에 최규현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주며 그에게 붙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규현은 이를 알 리 없었기에 결국 불똥은 김 실장에게 튀었다.
“이런 무능한 자식!”
“……죄송합니다.”
“김 실장, 자네가 책임지고 돈 세탁 과정 추적해.”
“알겠습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곰은?”
“지금 안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예.”
최규현은 홀로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의원님.”
커다란 떡대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깍듯이 인사했다.
“어, 승민이 오랜만이야.”
최규현은 넉살 좋게 웃으며 정승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동안 덩치가 더 커진 것 같아.”
“의원님께서는 더 인자해지셨습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지?”
“제가 언제 의원님 앞에서 감언이설 하는 것 봤습니까?”
그는 껄껄 웃으며 먼저 상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앉게.”
“예.”
“혼자 고생 많았지?”
“의원님의 품이 따뜻했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최규현이 보기에 정승민은 덩치에 맞지 않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이제 치정과 관련된 문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이제 정신 차렸습니다. 가끔 놀 때도 아주 신사적으로 행동하고요.”
“결혼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래. 돈만 있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뭐 하러 결혼해?”
이미 결혼해서 손주까지 본 최규현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승민은 맞장구만 쳤다.
“맞습니다.”
짧은 안부 인사를 마치고 최규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거 캠프에 와서 도와줬으면 하는데…….”
“의원님.”
정승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한테는 물어보시는 게 아니라, 명령하시면 됩니다.”
“그래.”
최규현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휘었다.
“들어오게, 승민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승민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밖에서 홀로 떠돌며 배운 게 많습니다. 반드시 의원님께서 각하 소리를 들으실 수 있도록…….”
“언제 적 각하인가, 요즘은 대통령님으로 충분하네.”
“아, 그렇습니까?”
둘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규현은 정승민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번에 당선되면, 자네에게도 좋은 자리 하나 넘겨주지.”
“좋은 자리라면…….”
“비서실장 말일세.”
정승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청와대 비서실장.
대통령의 실질적인 오른팔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
정승민은 슬쩍 고개를 돌려 문이 꼭 닫힌 걸 확인한 뒤에야 다시 물었다.
“그러면 김 실장은…….”
최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는 그 자리에 오를 만한 인재가 아니야. 그릇이 작아.”
그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휘어졌다.
“적어도 자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정승민은 감복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대통령님.”
***
“퀸 인베스트먼트 자금까지 전부 넘겨주시죠.”
-자금까지요?
휴대폰 너머로 장영순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건 너무 큰…… 아니, 애초에 최규현이 눈치챌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틀 뒤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될 테니, 저희도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
그녀가 주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퀸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을 받는 순간, 최규현에게 돌아갈 길은 없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저를 믿고 따라오시죠. 한 배를 탄 이상,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녀 본인의 비자금 통로를 딱 잘라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망설일 수밖에 없을 테지.
그러나 그녀를 생각해 줄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미 사기 전과로 몇 번이나 교도소에 들락거렸던 인물이다.
최소한 돈줄을 내가 쥐고 있어야 허튼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한들, 그녀의 숨통이 완전히 막히는 건 아니었다.
암만 내가 비자금을 넘기라고 말했어도, 장영순이 직접 준비하는 것이다.
본인이 챙길 돈은 따로 빼돌려 놓을 건 불 보듯 뻔한 일.
최소한 남들보다 부유하게 살 만큼은 삥땅 쳐 두겠지.
아니, 이미 준비해 뒀을 가능성이 크다.
잠시나마 고민하던 그녀는 어렵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금은 이전처럼 상품권으로 돌려서 검사님께 드리면 될까요?
“아닙니다. YH로 넘기시면 됩니다.”
-YH요?
장영순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기운이 서렸다.
-YH라면…….
“맞습니다. 신성호 대표가 있는 곳이죠.”
잠깐이나마 정적이 흐른 뒤, 그녀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쪽과도 함께하기로 하신 겁니까?
“최규현을 적으로 돌린 이상, 최대한 많은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장영순은 분명 아차 싶었겠지만, 이미 발을 담근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성호 대표는 어디까지나 자금 세탁용입니다. 여사님과의 약속엔 전혀 무리가 없어요.”
-알겠습니다.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전혀 믿지 않을 테지만.
-자금 정리하고 연락드리죠.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고 창가에 서서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안을 적셨다.
퀸 인베스트먼트에서 YH로 흘러간 자금은 내가 손대지 않을 것이다.
신용호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랄까.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어차피 내가 먹으면 배탈이 날 돈이다.
그러나 같은 사업가인 신용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돈을 받으며 퀸 인베스트먼트와 이면 계약서를 몇 장 써 두기만 하면, 소액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돈을 전부 삼킬 수 있게 될 테니까.
무엇보다도 정식으로 선거기간에 돌입하면 최규현이 퀸 인베스트먼트를 이용해 날 공격하려 들 터.
그러면 퀸 인베스트먼트가 무너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회사가 끝까지 버틸지, 중간에 무너질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비자금은 누군가가 삼키리라는 사실.
어차피 장영순이나 최규현이 먹을 돈이라면, 내 주변 사람이 챙기는 게 좋을 테니까.
생각보다 더 빠른 시일 내에 신용호에게 보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똑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네, 들어오세요.”
돌아서자, 윤설하가 고개를 꾸벅이며 차장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이번 대선 캠프 목록을 확인하던 도중, 특이한 인물이 있어서 보고드리려고 합니다.”
“최규현 선거 캠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쪽에 새로운 얼굴로 정승민이 합류한 걸 확인했습니다.”
윤설하는 목록이 적혀 있는 보고서를 내게 건넸다.
“정승민이라면, 인권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인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나는 보고서를 스윽 훑다가 정승민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대로 시선을 멈췄다.
얼굴을 보자, ‘불곰’이라는 그의 별명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190cm에 달하는 엄청난 키와 근육질. 게다가 우락부락한 얼굴까지.
그를 처음 본다고 한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불곰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
“오래 전에 최규현의 사람이었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 다시 재기용했나 보네요.”
“예. 정보원에 의하면, 현재 김 실장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건 의외인데.
김 실장을 몰아내려고 하는 건가?
불곰에 비하면 능력이 부족하긴 하나, 몇 년 동안 그의 수발을 들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을 대선과 함께 몰아내려고 하다니.
확실히 최규현은 일반적인 잣대로 생각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일단은 더 주시하라고 전달하세요. 혹시 모르니 김 실장에 대해 접근할 방법도 찾아 두시고요.”
만약 그가 최규현에게 버려진다면, 내가 그의 손을 잡아 줘야 한다.
최측근이었던 인물이야 말로, 가장 큰 폭탄이 될 수 있는 위험 요소니까.
“지시대로 이행하겠습니다.”
***
“퀸 인베스트먼트 자금 흐름이라고?”
“예, 맞습니다.”
김 실장이 보고한 자료를 본 최규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금 흐름이 심상치 않은데?”
“맞습니다. 마치 정치권에 흘러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근데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조사도 안 했어?”
“……예?”
최규현은 언성을 높였다.
“수상한 게 있으면 재깍재깍 조사를 해서 보고해야 할 것 아니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
“당장 내일부터 선거운동 시작인데, 이런 사소한 내용까지 내가 직접 디렉팅해야 돼? 만약에 민국당으로 흘러갔으면 어떡할 거야?”
“빠른 시일 내에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최규현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됐어. 넌 가만히 있어.”
“예?”
김 실장의 되물음에도 최규현은 대꾸하지 않고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정승민!”
5초도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며 불곰, 정승민이 들어왔다.
“의원님, 부르셨습니까?”
“어, 승민이. 퀸 인베스트먼트 알지?”
“예.”
“거기 자금 흐름에 관해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다시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대놓고 불곰 앞에서 김 실장에게 쪽을 준 것과 다름없는 상황.
김 실장은 이가 빠득 갈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규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김 실장, 잘해야 돼. 불곰이 몇 년을 쉬다가 내 밑으로 돌아왔는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지 않게 잘 버티라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하라고.”
“잘하겠습니다.”
“그래, 가 봐.”
김 실장은 주먹을 꾹 쥔 채 선거 캠프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