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199화 (199/341)

이 바닥에서 신뢰는 (2)

“후우우.”

장영순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흔들의자에 몸을 뉘였다.

줄담배로 벌써 네 대째.

그녀의 입으로 새어 나온 새하얀 연기는 집 안을 가득 채워 뿌옇게 만들었다.

‘최규현이 뒤통수를 친 건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아니, 충분히 그럴 만한 인간이다.

과거에도 똑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장영순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불과 9년 전에도 최규현이 꺼내 준다는 말을 듣고 항소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선고를 받아들였던 기억이 머릿속에 차오른 탓.

‘최규현…….’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금 되뇌었다.

교도소에서 최규현에게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깨달을 때만 해도, 다시는 최규현과 엮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은 그 아린 기억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놈의 정이 뭔지, 원…….’

약 40년 전, 군부 시절에 강남 여왕벌로 화려하게 이름을 날릴 때 그녀와 내연 관계로 있던 인물이 바로 최규현이었으니까.

그러던 도중, 중간에 본인이 고꾸라졌다가 재기할 때만 해도 최규현이 다시금 도와주며 신뢰를 쌓나 했지만, 그것도 잠시.

9년 전에 최규현만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모아 둔 돈을 전부 그에게 뺏기고 말았다.

그러나 만기 출소 후, 다시 크게 한탕 해 보려던 준비를 하던 도중 접근한 게 또다시 최규현.

마냥 믿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신중을 기하고 있던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신성호다.

당장 내일 최서준을 만나러 가야 하는 상황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게 행운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제 와서 모든 걸 엎고 뒤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

장영순의 입장에서도 모 아니면 도였으니까.

이미 일흔하나라는 적지 않은 나이다.

한 방에 역전해 노후를 여유롭고 사치스럽게 보내느냐, 강남 여왕벌이라는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낙인 속에서 처참하게 다시 감옥에서 삶을 마무리하느냐.

그 갈림길에 서있는 상황.

절대적으로 신중해야했다.

최규현이 수족으로 쓰라며 붙여 준 제임스 킴까지 의심 되는 상황에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신성호 또한 마냥 믿지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본 결과, 신성호라는 인물은 교도소에서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 직후, 큰 사업을 펼치고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 상태.

일흔하나라는 나이와 오랜 수감 생활로서 사회에 뒤처진 탓에 감각이 무뎌진 탓일까.

장영순은 신성호가 최규현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도 넉넉지 않고, 인맥 또한 거의 사라져 버린 그녀가 혼자만의 힘으로 신성호가 개명하기 전인 신용호로서 어떤 행보를 밟아 왔는지까지 찾아내기엔 무리였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제임스 킴에게는 묻지 않았다.

그를 통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테지만, 그에 대해 물어본 사실 또한 최규현의 귀에 들어갈 게 분명할 터.

만약 신성호의 말이 진실일 경우, 최규현이 이 상황을 알았다가는 신성호와 자신 모두 이대로 끝이었으니까.

결국 이 상황에서 장영순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최서준을 직접 만나 승부를 보는 것.

그와의 대화를 통해 신성호라는 사람과 최규현의 속내까지 전부 들여다봐야 한다.

그게 그녀의 유일한 출구였으니까.

치익-.

장영순은 다시금 성냥불을 켜서 담뱃불을 붙였다.

그녀의 좁은 방을 채우던 담배 연기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더욱 자욱해질 뿐이었다.

***

“들어오시죠.”

“네.”

장영순은 검은색의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실내로 들어왔다.

“주시죠.”

“괜찮습니다.”

그녀는 가방이 마치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힘겹게 들고 있었다.

딱 봐도 무게가 상당한 게 보통 중요한 물건이 아닌 모양.

“양주 한 잔 드릴까요?”

“냉수면 됩니다.”

장영순의 요청에 따라 얼음물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녀의 얼굴에선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는 척을 하려는 게 보였으나, 은연중에 불안함이 자꾸만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제 신용호가 흔들어 놓은 덕분이겠지.

이럴 때라면, 몰아치는 게 좋을 터.

오래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예.”

장영순의 눈빛이 반짝였다.

“검사님과 조현웅 의원님 두 분께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번지르르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말씀드린 정책이 나오기만 한다면, 저희 퀸 인베스트먼트가…….”

전혀 영양가 없는 말이었기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최규현이 짜 놓은 판일 테니까.

그렇게 장영순이 한 5분쯤 설명했을 즈음, 나는 귀를 후비며 말을 잘랐다.

“됐고.”

그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돈은 어떻게 주실 겁니까?”

“바로 드리죠.”

장영순은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이 들고 온 캐리어를 나와 자신의 사이에 두었다.

“100억입니다.”

캐리어가 커 보이긴 하지만, 100억이 들어갈 만한 크기는 아니다.

100억이라면 사과 박스만 해도 10개는 나와야 할 테니까.

“장난합니까?”

날 선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지퍼를 열어 바닥에 캐리어를 펼쳤다.

“이런 씨…….”

내용물을 보고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건 전부 백화점 상품권이었으니까.

“50만 원짜리 2만 장입니다. 깡으로 수수료가 조금 들긴 할 테지만…….”

“이 많은 걸 다 어떻게 깡으로 처리합니까?”

목소리에 욱하는 기운이 섞이는 건 차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영순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회사를 통해 돈을 마련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시간이 부족해서요.”

사실, 이러한 검은 돈을 주고받을 때 상품권으로 주고받는 건 흔한 경우였다.

깡을 한다고 치면, 수수료가 적게는 5% 많아도 10% 정도에서 처리가 가능하니까.

무엇보다 사업가가 돈을 준비하기에 이보다 편한 방법이 없긴 했다.

법인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방법 가장 쉬우면서도 걸리지 않는 방식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100억은 이야기가 다르다.

한두 푼도 아니고, 이 정도 돈이라면 세탁 과정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 투자하는 시간과 들어가는 수수료가 만만치 않은 수준.

일반적으로는 15% 정도.

나의 지인과 내가 알고 있는 루트를 이용한다면 대략 12% 수준으로 가능할 터.

까놓고 말해서 100억을 받는 게 아니라, 88억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12억 정도 날아가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할 테지.

아마도 최규현이 내게 돈을 순순히 넘기지 않기 위해 직접 상품권으로 준비하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열흘 뒤면 대선입니다.”

장영순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충분히 세탁하고 남을 기간이죠.”

그녀는 캐리어를 탁탁 두드렸다.

“이거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우.”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제가 이걸 받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받지 않으신다면…….”

장영순은 가슴팍에 달려 있는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보였다.

“같이 죽는 수밖에요.”

볼펜형 녹음기에는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전부 녹음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겠지.

이 정도는 예상했다.

분명 자신을 위한 보험 하나는 들어 둘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최규현과 나눴던 대화의 녹음본도 있을 게 분명할 터.

장영순이 세게 나오고 있지만, 이게 블러핑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장영순은 최규현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제 신용호를 통해 최규현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심어 놓은 상황.

결국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어진 상황이라는 것이지.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장영순은 여전히 허세를 부렸다.

“과연 그럴까요? 이걸 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나는 다시금 장영순의 말을 끊어 먹었다.

“저는 선택지가 많은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죠?”

“1시간 뒤에 이곳에서 약속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젊은 사업가 한 분을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의 미간이 움찔했다.

“장순옥 여사님이 거절하신다면, 저는 그분과 갈 겁니다.”

“…….”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일부러 ‘젊은 사업가’라는 키워드를 언급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다.

장영순의 머릿속엔 어제 만났던 신성호가 떠올랐을 터.

분명 그녀 나름대로 조사했을 게 분명했지만, 제임스 킴에 대한 의심까지 심어 준 탓에 신용호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을 하는 건 불가능했을 터.

애초에 자세히 알았다면 그녀가 이곳에 나왔을 리는 없을 테니까.

결국 장영순은 자신이 결정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신용호와 만난다면 본인이 나가리가 된다는 정도의 판단은 할 수 있을 테지.

“결정하시죠, 장순옥 여사님.”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제 만났던 신성호가 장영순 자신에게 함께 살 방법을 궁리하자며 번지르르하게 말했지만, 실은 뒤에서 자기가 살아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으니까.

장영순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더욱 더 볶아쳐야 했다.

나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 장영순 여사님이라고 해야 될까요?”

힘겹게나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내 생겨난 자글자글한 주름은 마치 하회탈처럼 깊은 골을 만들어 내며 패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볼펜형 녹음기를 쏘옥 빼앗아 들었다.

“협력하기 위해서 이런 보험 따위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볍게 바닥에 던지고는.

“괜히 뒤통수를 맞을 염려가 들거든요.”

콰직 소리가 나도록 짓밟았다.

단숨에 부서지는 녹음기는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도록 산산이 부서졌다.

장영순의 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한 가지만 묻죠.”

“말씀하세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본인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거겠지.

“우리 강남 여왕벌님께서 교도소에서 너무 오래 썩으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최서준입니다.”

“…….”

“다 압니다. 알아야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죠.”

나는 방긋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최규현 의원이 뒤에 있는 것까지도 전부요.”

장영순은 어금니를 지르물었다.

격세지감이 드는 건 물론이고, 본인의 한계를 느끼며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고 있을 테지.

최규현에 대한 의심.

자신의 안전에 대한 위협.

머리 회전에 대한 압도적인 차이.

이 세 개는 장영순에게 한 가지 선택을 강요했다.

“검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죠.”

최규현이 뒤에 있는 것까지 알았다는 건, 이미 한 수 앞서있다는 걸 보여 주는 셈.

나에게 붙는 게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와중에 최규현에게 붙었다가는 자신까지 몰락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 법이니까.

“어떤 걸 하면 됩니까?”

“장영순 씨는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저는…….”

뭔가 바라는 눈치.

이 할망구, 아직 본인의 처지를 모르나 보다.

출소 후, 최규현과 손을 잡은 시점부터 그녀의 앞길에 꽃길 따윈 없어진 지 오래.

그렇기에 립 서비스 따위는 해 줄 생각도 없다.

천국을 향해 뛰는 것보다 지옥을 피하기 위해 달리는 게 더 발에 불이 날 테니까.

“예전과 같은 부와 명성은 보장 못 해 드리겠지만…….”

아니, 해 줄 생각도 없다.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지는 않게 해 드리죠.”

나는 눈을 찡긋했다.

“여생을 차가운 감방에서 보내시고 싶진 않잖습니까?”

그녀는 체념한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알겠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