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에서 신뢰는 (1)
-이름 장영순. 올해 나이 일흔 하나. 법원에 개명 신청을 통해 ‘장미연’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외부에서 활동하는 이름은 장순옥이야.
“이 인간은 뭐 이렇게 이름을 많이 써?”
신용호의 불평 섞인 말에 최서준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름을 두 번 꼬아 주면 다들 본명이 장미연인 줄 알고 그에 관해 조사할 거 아니야? 그래도 나오는 거 없이 깔끔하니까 믿을 테고. 가명은 일부러 들키려고 쓰는 거고, 진짜 숨기려는 건 장영순이니까.
“하긴, 장영순이라는 이름은 워낙 유명하니까.”
-어쨌든 참고할 만한 사항들은 메일로 보내 놨으니까 참고하고.
“안 그래도 오기 전에 다 확인했어.”
-잘했다.
“그래, 끝나고 다시 전화할게.”
-부탁한다.
“오냐.”
전화를 끊은 신용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곧장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남에 있는 고층 빌딩의 최상층인 21층부터 23층까지 전부 사용하는 퀸 인베스트먼트.
그는 들어가자마자 직원의 안내를 받아 프리 패스로 대표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김 대표님.”
“오셨습니까?”
제임스 킴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제임스 킴입니다.”
“신성호입니다.”
신용호는 능청스레 본인의 새 이름을 말하며 제임스 킴과 악수를 했다.
“앉으시죠. 차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아, 차는 됐고…….”
그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상대방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신 사장님께서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신용호의 무례에도 제임스 킴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히려 먼저 본론을 꺼냈다.
“저희 회사에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신용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아랫사람이 아니라,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순간, 제임스 킴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운이 서렸다.
“제가 대표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장순옥 여사님 말입니다.”
그 이름이 나오자, 제임스 킴의 미간이 거칠게 찌푸려졌다.
“어디서 보낸 겁니까?”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러나 신용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대표님과 이야기하도록 하죠.”
제임스 킴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더 이상 입은 열지 못했다.
장순옥 여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회사의 내부 사정도 훤히 꿰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리시죠.”
“얼마든지요.”
제임스 킴은 신용호를 홀로 두고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장순옥 여사에게 직접 전화를 하러 가는 것이리라고 생각한 신용호는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퀸 인베스트먼트는 실제로 돌아가고 있는 회사였다.
단순히 최규현이 최서준을 속이기 위해서 만든 기업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미국에 있는 본사와의 연관성은 커 보이지 않았다.
뭐랄까,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겉으로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속은 전혀 다르게 운영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 증거로 회사의 주주 대부분이 외국인으로 되어 있지만, 전부 검은 머리 외국인인 한국인들이었다.
간단히 말해 돈이 국내에서만 돌고 있다는 것.
미국의 퀸 인베스트먼트가 실질적인 소유주라면 그렇지 않았을 테지.
그렇기에 더욱 장순옥…… 아니, 장영순이 최서준에게 어떤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알아내야 했다.
한 15분쯤 지났을까, 제임스 킴이 힘겨운 기색으로 대표실에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진짜 대표님은 만날 수 있을까요?”
“따라오시죠.”
제임스 킴은 신성호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24층.
대외적으로 퀸 인베스트먼트가 사용하는 것이 아닌 층이었지만, 제임스 킴의 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원래부터 이들이 사용하는 곳이라는 증거.
‘구린내가 아주 상당하게 풍기는데.’
신용호는 24층 내부를 천천히 살피며 제임스 킴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제일 안쪽에 이름표가 적혀 있지 않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제임스 킴은 가볍게 두 번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서는 소파 상석에 앉은 장영순이 찻잔을 든 채 신용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안녕하십니까, 신성호입니다.”
“장순옥이에요.”
그녀는 앉으라는 말 대신, 소파를 향해 눈짓했다.
신용호는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고 그의 맞은편에 제임스 킴이 자리했다.
‘못 알아볼 뻔했어.’
장영순에 대한 신용호의 첫인상이었다.
과거 군부 시절에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자료로 본 얼굴과 사뭇 달라진 모습.
장영순이라는 걸 모르고 만났다면, 전혀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톡스나 필러를 맞아 어느 정도 관리가 되어 있긴 했지만, 세월을 이길 순 없었는지 주름이 꽤나 짙게 패여 있는 탓이 컸다.
‘이래서 이름을 두 번이나 바꾼 거였어.’
장영순이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장순옥이라는 가명과 장미영이라는 본명을 이용해서 다른 이들의 의심을 해소시켰을 테니까.
장영순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신용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성호 씨가 절 어떻게 아셨을까요?”
“둘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장영순은 제임스 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려가 있어.”
“……예.”
제임스 킴은 입술을 씹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말씀하실 준비가 되었나요?”
신용호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내일 최서준 씨와 만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도발적인 멘트였지만, 장영순은 놀란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명칭을 가진 인물답게 포커페이스를 훌륭하게 유지하는 실력.
신용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최서준을 만나고 왔거든요.”
“최 검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 주려고 오신 건 아닐 테고…….”
그녀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었다.
“목적으로 들어가죠. 난 누가 빙빙 돌려서 말을 꺼내면 사기 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싫더라고.”
신용호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 냈다.
‘사기꾼 주제에 선수를 치다니.’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말하는 사람이 사기를 친다는 의심을 줄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 또한 검사 출신인 신용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최서준 검사와 만나라고 지시한 건 최규현 의원입니다. 장순옥 여사님도 최규현 의원의 지시에 따라 최서준을 만날 예정이라는 걸 알고 있고요.”
“그게 우리가 만날 이유가 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우리 장순옥 여사님은 본론에서도 핵심만을 듣길 원하시는군요.”
그녀는 그렇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용호는 졌다는 듯이 손바닥을 쫙 펴고는 말했다.
“최규현이 믿을 만한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어떤 걸 믿고 움직이는가 하셔서요.”
“글쎄요.”
장영순은 처음으로 신용호의 눈을 바라봤다.
“저희 사업가들은 구체적인 무언가를 바라지만, 정치인들은 무형적인 걸 주려고 하죠. 그게 바로 정치인과 사업가가 나눠지는 이유 아닐까요?”
질문에 맞지 않는 두루뭉술한 답변.
그녀는 절대 자신의 정보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신용호도 장영순의 속내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갑작스레 찾아온 만큼,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보다 상대가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최대한 사리려고 하는 것이겠지.
더 오래 끌다가는 성과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의심이 짙어질 가능성이 많아진 상태.
원래는 수감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고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망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신용호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저부터 까도록 하죠.”
우선은 밑밥.
“제 명함입니다.”
그는 본인의 실제 명함을 장영순에게 건넸다.
물론, 그는 신성호로 활동하기에 장영순이 의심할 만한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대선 이후에 최서준에게 50억을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제야 장영순의 눈에 흥미가 피어났다.
“그러는 신 사장님은 뭘 믿고 최규현 의원님과 함께하기로 했나요?”
신용호는 능글맞게 히죽였다.
“하나씩 주고받는 게 예의 아닐까요?”
장영순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는 100억을 넘기기로 했습니다. 간접 광고비 명목으로요. 이후에 조현웅이 당선되면 정책을 요구하기로 했지만…….”
그녀는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어차피 당선될 일이 없다는 내용이라는 것은 신용호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떤 걸 믿고 최규현 의원님과 함께했는지 알려 주시겠어요?”
장영순의 물음에 신용호는 먹혀들어 가길 바라며 승부수를 던졌다.
“저 또한 사업가이기에 구체적인 걸 받기로 했죠.”
그는 손가락을 들어 바닥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아래층.
“퀸 인베스트먼트를 넘겨받기로 했습니다.”
순간, 장영순의 얼굴 주름이 이전에 비하지 못할 정도로 깊게 패였다.
인상을 찌푸리다 못해, 찌그러졌다는 말이 어울릴 수준.
‘나이스!’
신용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최서준의 추측이 아주 멋들어지게 맞아 들어간 것 같았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이 무엇일지에 대해 회의한 결과, 최서준이 밀어붙였던 게 바로 퀸 인베스트먼트를 장영순에게 넘기는 것이었으니까.
장영순의 표정을 보면, 묻지 않아도 맞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용호는 자신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저희 둘 다 최규현에게 속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최규현에 대한 장영순의 신뢰가 아주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만족하고 멈추면 안 된다.
더 몰아쳐야 한다.
자신의 뒷조사를 해서 실제로는 최서준의 사람이라는 걸 파악하기 전에 본인을 믿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제임스 킴 대표는 믿을 만합니까?”
“최규현 측에서 붙여 준 사람입니다.”
연타석 홈런!
“그분도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일단 말하지 마십시오. 제 정체에 대해서 말했다가 괜히 최규현에게 전해지면 둘 다 골치 아파질 수도 있으니까요.”
“예. 우선 제임스 킴에게도 신성호 씨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전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다시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저희 둘 다 토사구팽 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신용호는 위급한 척 말을 이었다.
“내일 최서준과의 만남에서 승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승부요?”
“예.”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보탰다.
“더 믿을 만한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자는 거죠.”
신용호의 입꼬리가 가볍게 비틀어졌다.
***
-어, 서준아.
“잘 끝났어?”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냐?
신용호는 아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구슬려 놨으니까 내일 구워삶으면 돼. 내가 보기엔 이 할망구, 최규현한테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잘했다. 역시 신용호야.”
-당연하지, 인마. 내가 누군데.
“하하하, 고생했어. 고맙다.”
-아니야. 정확히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지켜봐야 하니까 너도 안심하지 마.
“그래, 알았다. 쉬어라.”
-너도.
그와의 전화를 마무리하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내일 장영순과 이야기만 잘 끝난다면, 최규현이 보낸 폭탄을 다시 그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될 테지.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