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5)
“그나저나 성왕동으로 정한 이유가 있습니까?”
신동현 대표의 물음에 간단히 답했다.
“민국당의 텃밭에 민국당을 달고 당선되어 봤자 크게 눈에 띄지 못합니다. 저희에게 국회의원은 어차피 딛고 올라가야 하는 발판 아니겠습니까?”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어차피 서울시장을 목표로 한다면, 지방이 아니라 서울의 성왕동에서 임팩트를 보여야 한다는 뜻이셨군요.”
“맞습니다.”
기왕이면 정치 1번지인 종로가 더 좋았겠지만, 그곳은 다름 아닌 최규현의 지역구.
그곳은 결원될 리가 없으니 두 번째인 성왕동을 택한 것이다.
성왕동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구에서 당선이 된다면, 차기 서울시장 선거에서 분명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가장 베스트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곧바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 당선되는 것일 테지만, 그건 논외.
서울시장 자리는 2030년에 22대 대선이 펼쳐지기 전까지 성태현이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확실하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때문에 신동현 대표가 2030년까지 기다리는 건 무리.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이번에 얻은 국민들의 주목과 관심이 잊히고 말 테니까.
고로 현재 상황에서 최고의 선택은 성왕동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것.
물론, 성왕동이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렸을 테지만, 운 좋게 부정선거로 인해 빈자리가 생겼으니 이를 놓칠 필요는 없겠지.
21대 대선에서 성태현이 당선되고 서울시장 바통을 이어받기 전까지 최소한 2선 국회의원의 타이틀은 얻을 수 있을 터.
다른 곳도 아니고 성왕동이라면 국회의원으로서의 경력이 길지 않아도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데 다른 의원들로부터 태클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보궐선거는 내년 2월 12일 예정입니다. 그 전까지 SV그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
“예. 안 그래도 미르스 항공 사건이 터지면서 지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들놈들에게 물려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혹시라도 자식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만약 지분 싸움으로 번질 경우, 언론에 나와서 서민과 거리가 먼 재벌이라는 이미지의 프레임을 씌울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 얻은 국민을 위하는 이미지에 타격이 오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비 된 입장으로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세 아들 간의 능력 차이가 명확해서 분쟁이 벌어지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천천히 일정을 정리했다.
현 대통령인 경동수의 임기는 내년 5월까지.
대선은 4월에 펼쳐질 터.
보궐선거가 끝나면 바로 대선 준비에 돌입해야 하니, 일정이 상당히 빡빡하다.
그때, 성태현이 우리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언제 오셨습니까, 시장님.”
“조금 전에 왔습니다. 진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요즘 얼굴 뵙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워낙 바빴잖습니까.”
“하긴, 이번에 두 분이 정말 대단하셨죠.”
“어휴, 아닙니다.”
신동현 대표는 손을 내저었다.
“다 검사님이 설계해 주신 대로 따라갔을 뿐인 걸요.”
“그러면 다 제 덕분인 걸로.”
내가 능글맞게 말하자, 둘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성태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예전보다 더 능글맞아지신 것 같습니다.”
“애를 키우다 보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나저나 처제는 어떻습니까? 곧 출산 예정일 아닙니까?”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네요. 만삭이라 와이프가 힘들어하는 게 안쓰럽고 고마울 따름이죠.”
“오,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신동현 대표가 눈을 번뜩이며 성태현을 바라봤다.
“이거 아무래도 제가 조카 탄생 선물을 준비해야겠는데요.”
“아이, 그러실 것 없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퉁기며 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다음 달이면 쌍둥이랑 생일이 비슷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저희 부부 내외도 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예정일로는 이틀 정도 늦는데…….”
신동현 대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쌍둥이를 낳고 딱 1년 만에 셋째라니…… 성 시장님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힘이 아주…….”
그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고 성태현은 부끄러운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집사람이 고생하는 게 미안할 따름이죠.”
그때, 뒤에서 한 남자가 찾아왔다.
“신동현 대표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다름 아닌, 조현웅 의원.
그에게도 보궐선거에 관해 내가 언질을 해 놓은 게 있기에 아마 그와 관련된 게 아닐까 싶다.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따 뵈시죠.”
“예.”
신동현 대표가 떠난 뒤, 성태현과 둘만 남은 자리.
그가 먼저 정적을 깼다.
“그나저나 이번 대선에 대해 이야기는 좀 해 보셨습니까?”
“네. 만세당에서 후보 단일화를 하자는 제안이 왔는데, 거절하고 조현웅 의원 혼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 뒀습니다.”
“아…….”
그는 주변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나 패배할 경우를 대비한 건가요?”
역시나 척하면 착이다.
“맞습니다.”
“그러면 따로 선거 전략에 관해서 이야기는 하셨나요?”
“아니요. 자세하게 더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마침 정부에서 블랙박스 수색 포기 선언이 나와 버려서 더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성태현의 눈썹이 들썩였다.
“검사님이 미리 알고 계신 게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역시 성태현.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암만 동반자라고 한들, 그에게 내 약점까지 굳이 일러 줄 필요는 없지.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이죠.”
“예, 맞습니다. 그거 보고 저랑 집사람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가족으로서 그리고 파트너로서 당연한 거죠.”
그의 입꼬리가 능글맞게 비틀어졌다.
“그나저나 신동현 대표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예. 한 2년 정도 손을 잡고 있는데 괜찮은 사람 같더군요.”
“그렇군요.”
성태현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분이 함께하시고 계시는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시장님께서는 여기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국정에 치중하시면서 걱정 없이 국민의 마음만 사로잡으시면 됩니다. 더러운 정치는 제가 맡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걱정 없이요.”
그는 코를 찡긋하며 날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검사님만 믿죠.”
***
“요즘 방송국 생활은 할 만하세요?”
“어유, 요즘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송재훈 PD는 손을 내저었다.
“예전엔 발로 뛰는 맛이라도 있었는데, CP로 올라가니까 관리 감독만 하니 매일같이 사무실에 박혀 있잖아요.”
그는 자신의 뱃살을 잡으며 말했다.
“6개월 만에 10kg이나 쪘다니까요?”
“하하, 그래도 제수씨는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럼요. 야근하고 주말에 특근하고 할 필요 없이 정해진 퇴근 시간대에 가면 되니까요.”
송재훈 PD는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제가 더 죽을 맛이라니까요. 요즘 다른 팀 회식 하는데 따라갈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남들이 듣기엔 배부른 소리지만요.”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얼굴이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그거 하난 좋죠. 밤샘 작업을 안 하니까 건강을 찾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PBC에선 최연소 CP이니, 명예도 얻으셨고요.”
내 칭찬에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박수형 기자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어머님 생신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날짜를 잡을 걸 그랬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송재훈 PD와 나는 오랜만에 만나 크게 회포를 풀었다.
“그나저나 CP면 PD X-File만 담당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시사, 교양 쪽 전체를 맡고 있죠.”
“아, 그러면 퀴즈 프로그램 같은 건가요?”
“예. 그걸 포함해서 건강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도 전부 시사, 교양에 포함되거든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송재훈 PD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무언가 생각나셨습니까?”
“재훈 씨.”
나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씀만 하세요. 서준 씨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려야죠.”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다큐 하나만 찍어 주십시오.”
“다큐요?”
그는 고개를 갸울였다.
“어떤 다큐를 말씀하시는지…….”
“사람에 관한 다큐. 한 사람을 아주 멋진 인간으로 등극시켜 줄 그런 다큐 말입니다.”
송재훈 PD는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어떤 사람입니까? 서준 씨 본인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신동현 대표입니다.”
“신동현이라면 SV그룹 대표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잠깐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신 대표님께서도 정치를 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이번 일로 국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걸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않겠습니까?”
“2년 정도 준비했으면 충분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
그는 순수하게 감탄을 뱉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군요.”
“당장 내일만 보고 살다가는 이 바닥에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
송재훈 PD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는 죽어도 정치는 못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큐멘터리는 제가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일단 국장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는데, 이번 미르스 항공 참사에서 워낙 대단한 일을 해내셨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허가가 날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난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감사 의미로 오늘 술은 제가 사죠.”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양주를 먹을 걸 그랬네요.”
“하하하하, 건배할까요?”
“원샷입니다.”
송재훈 PD는 세게 잔을 부딪쳤다.
***
“의원님께서 저를 왜 찾으셨을까요?”
눈주름이 자글자글 나 있는 여성은 여유 있게 다리를 꼬았다.
올해로 일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녀가 걸치고 있는 명품들은 품위를 잃지 않게 도와주었다.
말투나 손짓에도 기품 있는 모습이, 여성이 귀부인이라는 걸 말해 주는 듯한 느낌.
맞은편에 있는 최규현 의원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인데,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깍지 낀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 두었다.
“한 10년 만에 뵙나요?”
“그 정도 됐지 않나 싶네요.”
여자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의원님께서 버리신 덕분에 제가 9년 동안 교도소에 갇혀 있었으니까요.”
“버리다뇨, 제가 장영순 씨를 얼마나 아끼는데요.”
최규현은 너스레를 떨었다.
“9년도 적게 받은 겁니다. 언론에서 최소 20년 형은 받을 거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글쎄요.”
장영순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목적이 뭡니까?”
그제야 최규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눈엣가시가 하나 있습니다.”
“맨입으로?”
“제가 대권만 잡으면 다시 강남 여왕벌이라는 화려한 별명을 되찾게 도와드리죠.”
“나쁘지 않네.”
장영순은 움푹이 파인 팔자미소를 뽐내며 최규현의 눈을 마주봤다.
“계획이나 한번 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