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3)
-은색 봉고차 도착했습니다.
“차 번호는?”
-43로 4298입니다.
장하영 부부장검사가 말했던 자동차.
PBC 방송국의 차량이다.
생중계를 할지, 녹화를 떠서 시사 프로그램에 보낼지, 뉴스에 보낼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최규현 의원이 흘린 정보를 듣고 왔다는 사실.
“검사들은 다 준비됐습니까?”
-예. 4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 있고, 나머지는 사각지대가 없도록 직접 몸을 숨기고 나와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후에 진입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45분.
나는 근처 카페로 가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약속 장소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
가야지.
다만, 주인공이 파티에 제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멋이 없잖아?
자리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입에 가져다 댔다.
쓴맛.
오로지 쓴맛만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개운하기는 개뿔, 더럽게 쓰기만 하다.
이렇게 맛대가리 없는 걸 왜 먹는 건지, 원.
한 10분쯤 지났을까.
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
-보낸 이 : 윤설하
-미르스 항공의 박 상무 도착했습니다.
약속 시간 하나는 잘 맞춘다.
그러나 나는 일어날 생각 없이 의자에 등을 더욱 기대었다.
그들에겐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게 필요할 시간이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찔끔찔끔 먹어 대던 에스프레소 잔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8시 30분.
그제야 나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주 여유롭게 차에 올라 황학동 벨로민트 타워로 향했다.
지하 3층에 내려가자, 장하영 검사가 말했던 PBC의 은색 봉고차와 검은색 승용차 4대가 주차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물론 다른 자동차도 주차되어 있어서 검사들이 숨어 타고 있다는 건 알 리가 없을 터.
당연한 말이지만, 다른 차들의 주인이 등장할 일은 없었다.
모두 내가 섭외한 차량들이니까.
중앙에 차를 갖다 대자, 구석에 숨어 있던 SUV 한 대가 다가와 나란히 주차했다.
“안녕하십니까, 검사님.”
이대팔 머리로 깔끔하게 정돈된 남자가 내리며 깍듯하게 머리를 숙였다.
아마도 박 상무일 테지.
“아, 네.”
적당히 대답을 하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건부터 확인하죠.”
“예.”
박 상무가 뒤쪽에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에게 곁눈질을 하자, 곧장 트렁크가 열렸다.
사과 박스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파란색 박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슬쩍 박스를 열어 보니 5만 원 다발이 가득 들어 있는 상태.
대략 박스 하나당 5억 정도 들어가는 모양.
딱 봐도 느낌이 왔다.
돈을 옮기는 시간을 오래 끌어 PBC의 카메라에 잘 담기게 하려는 거겠지.
아주 뻔히 속내가 들여다보인다.
“회장님께서 잘 좀 부탁드린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김병호 회장님은 둘째 치고…….”
나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최규현 의원님은 잘 지내시죠?”
“예?”
그는 당황한 눈빛을 지었다.
잠깐만.
일부러 방송국 녀석들에게 들리라고 페이크를 친 건데, 박 상무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수상하다.
이거 박 상무도 김병호 회장 뒤에 최규현이 있는 걸 아는 듯한 느낌인데?
실수한 걸 알아챈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
“옮길까요?”
그 탓에 자세한 건 알아내지 못했다만, 확실한 건 캐낼 수가 없었다.
물론, 더 파고 들어간다고 나올 것도 아니기에 더 캐물을 생각도 없었고.
“그러시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 상무의 수행 비서로 보이는 검은 정장의 사내가 내 차로 파란색 박스를 옮겨 담기 시작했다.
물론, 빠르지 않은 속도로.
“여러 개로 나눠져 있어서 제 차에 들어갈는지 모르겠네요. 이거 보아하니, 돈 담기에 최적화된 박스가 아니라 빈공간이 많은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고…….”
지잉지잉.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보낸 이 : 윤설하
-차장님, 지금 PBC에서 뉴스 속보를 내면서 지금 있는 현장을 생중계로 송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엉큼한 놈들.
적당히 찍어서 다듬고 송출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생중계로 엿을 먹여 보겠다, 이거지?
물론, 최규현의 아이디어일 것이다.
그 정도나 되는 인물이니 이런 거래 현장을 생중계로 담아서 뉴스 속보로 내는 발칙한 상상을 하는 거겠지.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궁금하네.
이런 경우엔 방송심의규정 위반이 되는지, 아닌지.
한번 기다려 보면 알겠지.
나는 담배 연기를 마시고는 아주 깊게 내뱉었다.
***
“안녕하십니까, 현장 특별 생중계를 나온 신민훈 기자입니다.”
기자는 숨죽인 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카메라를 향해 말을 시작했다.
“저희 PBC에서는 고위 검찰이 특정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다는 밀보를 받아 은밀하게 현장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뇌물로 추정되는 돈을 주고받는 것으로 판단이 되어 긴급 뉴스 생중계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기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서준과 박 상무를 비추기 시작했다.
집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이 뉴스를 지켜보고 있던 최규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드디어 네가 골로 가는 날이구나.’
그는 보드카를 넘어 샴페인까지 딸 생각으로 미리 준비해 두었다.
최규현은 보드카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고는 다시금 TV로 시선을 돌렸다.
현장에 나와 있는 기자는 눈을 끔뻑이며 확인하더니 당황한 기색을 띠며 말을 이었다.
“어, 잠깐만요. 이거 아무래도 익숙한 얼굴인데요?”
기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서울중앙지검 최서준 차장검사 아닙니까?”
이미 상부로부터 전해들은 덕분에 알고 있었지만, 그는 처음 보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은 미르스 항공의 박훈 상무로 보입니다.”
그때, 최서준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이는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담길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방송상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차피 책임을 윗선에서 질 것이기에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기도 했고.
“말씀드린 순간, 박훈 상무의 차로부터 최서준 검사의 차로 돈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박스가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인터넷의 온갖 사이트엔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뿐만이랴, 방송국에는 실제 상황이 맞냐며 문의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할 정도.
실제 상황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의 내용이 대부분.
기존 6시로 예정되었던 시간과 달리, 최서준이 시간을 바꾸고 여유까지 부린 덕분에 뉴스 속보가 늦어졌고, 덕분에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던 도중 뉴스 속보로 옮겨진 탓에 예상했던 것보다 시청자가 훨씬 더 불어난 탓이 컸다.
이 점까지 최서준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얻어걸린 것.
하늘이 돕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나 최서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기자는 최서준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까지 최서준 검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사기를 치며 국민을 농락하고 있던 겁니다. 수차례 뇌물 의혹이 있었으나 모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던 인물입니다. 그런 이에게 국민 검사라는 호칭까지 붙여 줬다니…… 한 명의 국민으로서 참담한 심정이 듭니다.”
그때, 방송국으로부터 현장에 있는 기자에게 한 가지 사항이 지시되었다.
-돈이 담긴 박스가 전부 옮겨지면 현장에 나가 직접 당사자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고 인터뷰해.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붙고.
기자는 당황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까라면 까야 하는 법.
그는 군말 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
물론, 그 지시 사항은 최규현이 PBC 사장에게 전화해서 이를 통해 내려온 내용.
뉴스 속보를 통해 지켜보던 최규현은 두근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TV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갑자기 최서준 차장검사가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 입력하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돈을 옮겨 담던 직원이 스무 번째 박스를 마지막으로 멈춰 섰다.
“돈이 담긴 박스가 전부 최서준 차장검사의 차에 옮겨졌습니다. 이 장면은 저와 VJ뿐만 아니라, 시청자 여러분…… 아니, 국민 여러분 모두가 증인이 되어 함께 보셨습니다. 저는 기자가 아니라, 한 명의 국민으로서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기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제가 직접 나가서 현장을 덮쳐 최서준 차장검사에게 어떤 심정으로 이러한 짓을 한 건지,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따져 보겠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려는 그때.
최서준이 정확히 PBC의 카메라가 있는 곳을 보며 아주 온화하고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당황한 기자는 그대로 문을 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설마, 알아챈 건가?’
그 생각을 하기도 잠시.
최서준은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튕겼다.
그 순간.
팟-!
4대의 승용차에서 상향등이 켜지며 중앙에 있던 최서준과 박 상무를 비추었다.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듯한 느낌.
깜짝 놀란 기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고리를 잡은 채로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잠깐만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4대의 승용차에서 검은 옷의 정장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기자는 본능적으로 이 상황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최서준 검사가 파 놓은 함정인 것 같습니다.”
그때, 최서준이 카메라를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그 모습에 기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방금 전 방송국에서 내려온 지시 사항이 떠올랐다.
‘나가서 인터뷰 따라고 했지.’
기자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지금 직접 나가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겠습니다!”
***
문자로 담배를 던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상향등을 켜라고 했는데 아주 타이밍을 잘 맞췄다.
일종의 퍼포먼스.
지상파로 생중계가 되고 있다는데, 국민들을 위해서 이 정도 퍼포먼스는 보여 줄 수 있으니까.
그와 동시에 차에서 내린 평검사들과 수사관들이 우르르 달려와 미르스 항공의 박 상무에게 다가가 그들을 제압했다.
그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이 은색 봉고차에서 기자와 카메라가 내려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장하영 부부장검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 상무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형사소송법 200조 3항 및 212조에 의거하여 당신들을 뇌물 공여 혐의에 대한 현행범으로 영장 없이 긴급체포 합니다. 이에 대하여 당신은 변호인 선임 및 체포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으며, 변명할 말씀이 있으면 지금 바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미란다 원칙 고지.
나중에 토를 달수도 없을 테지.
나는 애써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와 기자를 바라봤다.
“누구십니까?”
기자는 놀란 표정을 숨기고 내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PBC의 신민훈 기자입니다. 뇌물 수수가 일어난다는 첩보를 받아 현장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저희가 상부 허락 없이는 인터뷰가 불가능해서요.”
내 공을 설명하는 것보다, 원칙을 지키는 모습이 더 국민들에게 어필될 테지.
나는 코를 찡긋하며 한마디 말만 덧붙였다.
“저는 검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간단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뒤로 물러나자, 검사들은 박 상무와 그의 수행 비서를 체포하여 연행했다.
카메라가 그들을 담고 있을 때, 윤설하가 슬쩍 내게 다가와 물었다.
“차장님, 제가 긴급체포 할까요?”
“예?”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박 상무랑 수행 비서는 이미 체포됐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윤설하의 손에는 담배꽁초가 하나 쥐여 있었다.
“그건 왜 들고 있습니까?”
“혹시나 공공장소에 담배 던진 걸로 꼬투리 잡을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누가 윤설하 아니랄까 봐.
“담배꽁초 버린 걸로는 긴급체포가 안 돼요. 그리고 여긴 공공장소가 아닌데.”
“위법은 아니어도 사람들이 욕할거리가 되기엔 충분하죠.”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커피 한 잔 사겠습니다.”
“좋죠.”
나는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곧장 서울중앙지검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