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4)
“안녕.”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김윤근 전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미안해서 어떡하나, 네가 야심차게 말했던 계획이 전부 박살이 나 버렸는데.”
그는 독살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눈빛이 악에 차 있는 걸 보니, 아직 포기하고 다 내려놓은 건 아닌가 보네.”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특별한 건 아니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평생 감옥에서 썩는 것 정도?”
김윤근 전무의 눈에 살기가 풍기기 시작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거만 들어주면 되는데, 어려운 부탁인가?”
“대체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건데!”
“나한테 잘못은 안 했지.”
난 검찰공무원증을 들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대신 나를 믿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죄를 지었잖아. 나는 그들을 대표해서 악을 처벌하는 검사고.”
“하.”
김윤근 전무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다른 그룹에서 돈을 받아 처먹은 걸 다른 재벌들이 모를 줄 알아? 그러고도 국민을 대표한다는 소리가 나오나?”
“나오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돈 받는 건 부수적인 거고, 나는 대한민국 검사 그 누구보다도 범죄자를 잘 잡아들이거든. 악질적인 녀석들까지도 말이야.”
테이블 위로 그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며 말했다.
“꼬우면 검사하든가.”
“…….”
“말했지, 밖에선 재벌이니 뭐니 했어도 여기선 내가 왕이라고.”
그는 입술을 씹었다.
안 그래도 상처가 났던 입술이었기에 찢어져 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김윤근 전무의 눈에는 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만이 드러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때, 교도관이 노크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검사님.”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그는 김윤근 전무의 눈치를 살피고는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미르스 항공의 김병호 회장이 검사님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김병호 회장이면 미르스 항공의 대표이자, 김윤근 전무의 아버지 되는 사람.
“그 인간이 왜요?”
“이유는 말해 주지 않는데,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그가 나를 만날 만한 이유는 없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려는 건가?
뭐, 들어서 손해 볼 건 없겠지.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여기서 부자 상봉도 시켜 주죠, 뭐.”
“아…….”
그는 김윤근 전무를 흘긋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문제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교도관은 고개를 꾸벅이고 문을 나섰다.
김병호 회장이 먼저 만나자고 접근한다라…….
이미 본인이 짜 놓은 판이 엎어진 상황.
경동수까지 내게 넘어왔기에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또 만나자고 하는 건 분명 제안할 만한 카드가 있다는 것인데.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켰다.
나는 김윤근 전무를 향해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여기 있으니까 아빠 보고 싶지?”
“뭐?”
그 말을 끝내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김병호 회장이 들어왔다.
교도관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고, 김병호 회장은 오자마자 90도로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사님. 김병호라고 합니다.”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잡고 공손히 악수를 요청했지만, 나는 고개만 까딱이고는 김윤근 전무의 옆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서 앉으시죠.”
아버지가 받는 수모에 김윤근 전무의 표정이 굳었지만, 별 수 있겠는가.
불만이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김병호는 군말 없이 김윤근 전무의 옆에 가서 앉았다.
사실, 김병호 이 인간도 보통 더러운 녀석이 아니다.
미르스 항공을 조사하며 알아낸 바로는, 미르스 항공의 실권을 잡고 있는 그를 중심으로 온갖 사내 비리와 부조리가 이뤄지고 있었으니까.
스튜어디스들이 젊은 나이에 승진하려면 그에게 따로 봉사를 해야 한다는 소문까지 사실로 판명되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단둘이 대화하면 안 되겠습니까?”
“왜, 아들 녀석 앞에서 말하기는 부끄러운 겁니까?”
그 말까지 듣고 나자, 그는 표정 관리가 어려운 듯 살짝이나마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김병호는 다시 온화한 얼굴을 되찾고 말했다.
“아닙니다. 검사님 편하신 대로 하시죠.”
“안 그래도 그러고 있습니다.”
나는 귀를 후비다가 귓밥을 김윤근 전무에게 후 불었다.
김병호는 못 본 체하며 내게 말했다.
“혹시 저희가 검사님께 한 번도 도움을 드린 적이 없어서 서운하셨더라면, 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아이, 검사가 그런 거 받는 직업입니까? 국민들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거죠.”
“역시 국민이 꼽는 최고의 검사님이십니다.”
그는 아부성 짙은 멘트를 뱉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미르스 항공이 무너지면 저희 일가도 문제지만, 까놓고 말해서 국가에도 큰 손실을 끼칩니다. 저희가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외화를 포함하여 저희가 독점으로 쥐고 있는 항공 노선 등에 전부 문제가 생기는 것이잖습니까?”
“본론만 말합시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마시고.”
“검사님 주머니를 채워 드리고 싶습니다.”
대답하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받을 생각 없는데요.”
이건 진심이었다.
이런 돈을 받아 봤자 체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체한 녀석들을 주야장천 잡아들였던 나니까.
다만, 이러한 제안을 했다는 건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실제로 모아 둔 자금이 슬슬 떨어져 가고 있는 건 사실이었고, 그걸 어느 정도 이 녀석이 눈치채고 있다는 뜻이니까.
신동현 대표와 손을 잡았다고 한들, 그는 이번 추락 사고에서 국민들의 환심을 사느라 SV그룹 자금뿐만 아니라, 본인의 비자금까지도 끌어왔다. 무리를 한 거지. 그 탓에 그쪽으로부터의 지원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는데, 주옥그룹에서 받는 용돈만으로는 내 사람들을 챙기기도 부족한 수준이니까.
그렇다고 하나, 미르스 항공과 손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뇌물이나 던지실 의도라고 하신다면, 더 이상 대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그는 불굴하며 오히려 눈썹을 들썩였다.
“평범한 게 아닙니다.”
그 순간.
지잉지잉.
짧게 두 번.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왠지 모르게 이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대답을 보류하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쉬었다 대화하시죠. 오래 있었더니 목이 타네요.”
“아, 네. 우측으로 돌아가시면 간수들이 사용하는 정수기가 있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그를 뒤로하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보낸 이 : 36
-동영상
2년 만에 오는 미래 문자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동영상을 재생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아, 김 회장님 오셨군요.
미르스 항공의 김병호 회장과 최규현 의원이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1번 라인을 나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에 미르스 항공도 1번 라인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으니까.
잠깐만, 보낸 이가 36이면 올해 안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건데…….
동영상 속 배경은 1번 라인의 모임 장소인 도비 호텔.
그러면 다음 달에 이 인간이 출소한다는 건가?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간을 구기며 다시금 동영상에 집중했다.
-이번에 총선 결과가 안타깝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죠.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타격이 커서 골치가 아프네요.
최규현은 씁쓸하게 웃음을 짓고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회장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이번에 미르스 항공도 꽤나 손해를 많이 보셨을 텐데요.
-그 부분은 괜찮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도움을 주고 있거든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이번 사고 원인에 제 아들 녀석과 손주 녀석들이 휘말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실은 조종실에서…….
그는 조종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동영상을 보면 볼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최규현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는 처음 들은 것처럼 심각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김병호 회장도 조심스러운 말투를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아하니, 그 또한 비밀을 밝히는 것 같은 느낌.
대체 왜 이러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퉁겼다.
이거 미래 문자가 아니구나!
과거.
이미 일어났었던 이야기에 대한 문자.
아주 오래 전에도 딱 한 번이지만, 이처럼 과거의 내용과 관련한 문자가 온 적이 있었다.
그때처럼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내게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겠지.
이 과거 문자는 미래 문자보다 더 중요한 내용일 터.
나는 두 눈을 뜨고 다시금 집중했다.
조종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최규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김병호 회장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요?
-일단 블랙박스를 못 찾으면 모든 게 일단락됩니다.
-그건 맞지만, 해경이 그걸 포기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정부에서 무조건 찾아내라고 할 테니까요.
-경동수로 직접 통하는 라인을 알려 드리죠.
최규현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뇌물을 먹이시는 겁니다.
-아…….
김병호 회장은 난색을 표했다.
-대통령을 움직이기엔 너무 큰 액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경동수는 이미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죠. 더 이상 돈 들어올 구멍이 없으니, 큰돈이 아니더라도 움직일 겁니다.
-어느 정도면 될까요?
-100억이면 됩니다.
최규현의 말에 김병호 회장은 언제 고민을 했냐는 듯, 얼굴이 밝게 펴졌다.
-그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러면 블랙박스 수색이 중단될 겁니다. 찾지 못하면 게임 셋이죠.
-만약 정권이 바뀌면…….
-다음 정권을 누가 잡으실 것 같습니까?
최규현은 자신감에 충만한 얼굴로 물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김병호 회장은 안 봐도 뻔했다.
-최 의원님께서 당선되실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제가 당선되면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 블랙박스를 건져서 조작하시면 됩니다. 적당히 항공 부품의 결함이었다고 하죠. 하청 업체 하나 조지는 걸로 덮어씌우면 끝납니다.
-그렇군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최규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런데 지금 SV그룹이 움직이는 걸 보면, 그쪽에서 블랙박스를 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번에 최서준이 미르스 항공을 덮친 걸 보면, 그 녀석과 신동현 대표가 손을 잡고 있을 겁니다.
그는 말하며 이를 갈았다.
-아주 악질인 녀석입니다. 대책을 세워 둬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아들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저와 회장님, 둘만이 알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규현은 김병호 회장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만약 블랙박스가 발견되어 세간이 공개된다면, 제가 WK일보에 미르스 항공이 경동수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사실을 제보할 겁니다.
-제보요?
김병호 회장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면 저는 완전히 끝납니다.
-끝까지 들으십시오.
최규현 의원이 미간을 구기자, 김병호 회장은 입을 닫았다.
-WK일보 정치부 부장이 최서준과 아주 긴밀한 관계입니다. 기사가 터지기도 전에 그에게 소식이 들어갈 거고, 검찰에서 다시금 압박을 시작할 테죠.
-예.
-블랙박스가 터졌다면, 그때는 이미 회장님을 포함하여 미르스 항공 임원진이 전부 구속되어 있을 겁니다.
-아…….
-걱정 마십시오. 전부 설계니까요.
그는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서준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아주 거액의 뇌물을 주는 걸로요.
-거액이라면…….
-최소 500억.
김병호 회장은 난색을 표했다.
-그 정도의 여유 자금은 없습니다.
-주는 척만 하면 되는 겁니다. 선수금 100억에 사건 종료 후 400억인 거죠. 물론, 사건이 종료되면 최서준이 구속되어 있을 테니 줄 필요가 없죠.
-아, 그렇군요. 100억 정도라면 준비할 수 있습니다. 경동수에게 줄 것과 함께 200억이니까요.
그때, 김병호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최서준이 거절하면 어떡하죠?
-그러니까 거절할 수 없게 제안을 하는 겁니다. 무려 500억입니다, 500억.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지원과 와이프가 다시 현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프로덕션에 대한 지원 및 방송사 지원 등 전부 푸시해 준다고 하면, 암만 최서준이라도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죠. 나중엔 그것도 회수해서 돌려줄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러면 아예 한 1,000억 불러 버릴까요? 그러면 전혀 거절할 염려가 없으니…….
-안 됩니다.
최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최서준 그 자식이 얼마나 조심성이 많은 놈인데……. 녀석이 의심하지 않는 마지노선이 딱 500억일 겁니다.
-그렇군요.
김병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뒤는 제가 책임지죠. 최서준 그 녀석 목을 비틀어 짜 버릴 겁니다.
최규현의 입꼬리가 아주 거칠게 비틀어진 모습을 끝으로 동영상이 종료되었다.
절로 코웃음이 쳐졌다.
이 자식, 이렇게 설계를 했었어?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접근한 거였구먼.
뇌물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저 정도의 제안이라면 사실 흔들렸을 수도.
물론, 최종적으로는 받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이용해서 역으로 박살을 내 줘야겠는걸.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에 찢어발겨 줘야 화가들이 제일 화가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