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1)
한 해가 흐른 뒤, 2023년.
본디 계획대로라면, 2023년 새해맞이와 함께 차장검사로의 승진이 이뤄져야 했으나, 한동민 검사장에게 가한 최규현의 압박으로 인해 새해 승진 목록에 끼지 못하고 한발 물러났다.
다만, 제3차장검사가 곧 사표를 내고 대형 로펌으로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그 빈자리를 채울 계획.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면, 최규현도 막을 수 없기에 차장검사 승진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을 터.
여유롭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차장검사로의 승진을 한 달 앞둔 화창한 봄날.
나는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 윤설하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청첩장요.”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향해 열어 보라는 눈짓을 했다.
봉투를 열어 본 윤설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성태현 시장님 결혼하시는구나!”
“예.”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성 시장님이 당선되는 데 특수부에서도 설하 씨가 많이 도와주신 걸 알고 있어서 꼭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렇다고 직접 만나 뵈러 오기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저한테 따로 부탁하셨습니다.”
윤설하는 밝게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초대해 주신 건 감사하긴 한데, 굳이 제가 갈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저는 부장님이 지시하신 걸 따른 것뿐이니까요.”
“정말 안 오실 거예요? 유명 인사들 많이 올 텐데.”
“제가 언제 그런 거에 관심 가지는 것 봤어요?”
그녀는 너스레를 떨었다.
“저는 오직 부장님만 보고 일하는 건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윤설하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장하영이 선택한 두 검사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아, 박기원이랑 남민제 검사 말씀하시는 거죠?”
“예, 맞습니다.”
박기원과 남민제 검사.
장하영 검사가 자신의 후임으로 꼽아 내게 인사시켰던 두 남자다.
사실, 둘에게 경쟁을 붙여 더 뛰어난 사람을 장하영 검사의 후임으로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울시장 선거를 포함한 많은 일로 인해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해 잊고 있었던 터.
차장검사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기에 이제 슬슬 결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둘 다 실적은 특수부에서 톱으로 꼽힙니다. 매달 1, 2위를 다투고 있을 정도라서 누가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입니다.”
“둘 중에서 먼저 굵직한 건수를 터뜨리는 인물이 선두로 올라오겠네요.”
“그럴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더 팽팽하게 경쟁이 붙은 모양.
아무래도 차장검사 직함을 달기 전까지 결정을 내리긴 힘들어 보였다.
서로 꾸준하게 견제를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결정타라고 할 만한 건수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 부분은 장하영 검사에게 일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도중, 윤설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는 본인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둘 중에 한 명을 택하는 게 아니라, 둘을 계속해서 붙여 놓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이벌 구도를 유지시키라는 거죠?”
“예. 선의의 라이벌이 있다면, 서로 더 능률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선의가 지켜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켜보면 재미있긴 하겠네요.”
눈을 빛내며 윤설하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세요. 대신, 특수부가 두 개의 라인으로 갈리거나 대립하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덧붙였다.
“그랬다가는 제 손으로 전부 지방으로 쫓아내 버릴 테니까요.”
내가 차장으로 올라가면, 이두형이 부장검사로, 장하영이 부부장검사를 맡게 된다.
이두형과 장하영의 능력과 카리스마는 말할 것도 없으니 특수부가 양분되는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엄포를 둔 것.
윤설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윤설하는 청첩장을 살펴보다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성태현 씨 결혼이 굉장히 빠르시네요. 두 분 만난 지 이제 1년 정도 된 거 아닌가요?”
“1년 조금 넘었죠, 아마.”
“혹시 과속이신 건가요?”
“과속은 아닌데…….”
성태현의 주변인이라면 전부 알고 있으니 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설명하기는 조금 애매했다.
“결혼 확정을 짓고 나서 아기가 생겨 가지고…….”
“오, 그래요?”
“네. 과속이라고 봐야 될지, 아닐지 조금 애매하네요.”
“출산 예정일은 언제예요?”
“아마 올해 12월쯤 될 거예요. 안 그래도 결혼을 일찍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기가 생긴 탓에 처제가 배 나오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고 예정일을 더 당겼어요.”
“아, 그렇구나.”
윤설하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직접 가서 축하해 드리면 참 좋아할 텐데.”
그녀는 미소만 짓고는 내게 질문을 돌렸다.
“그나저나 부장님은 아이 생각 없으세요?”
“낳아야죠. 집사람도 이제 한동안 방송 활동 쉴 생각이라서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는데…… 이게 또 마음 같지 않네요.”
윤설하는 능글맞게 웃음을 지었다.
“와, 그런데 진짜 부장님 아이는 어떨지 정말 궁금해요.”
“왜요?”
“사모님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부장님 유전자도 어마어마하잖아요. 외모도 외모시지만, 머리도 엄청나시니까…… 게다가 부장님 동생분도 의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 네. 맞아요. 이번에 서울 쪽으로 발령 나서 이사 왔어요.”
“아들은 검사에 딸은 의사라니. 진짜 어마어마한 집안의 유전자잖아요. 게다가 한지유 씨도 명문대 출신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유전자까지 합쳐지면…….”
윤설하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어마어마한 아이가 나올 것 같은데요? 세상 혼자서 살겠어요.”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집사람 닮은 딸이나, 절 쏙 빼닮은 아들이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내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한지유.
윤설하는 눈썹을 들썩이며 뒤를 가리켰다.
“커피 한 잔 타 올게요.”
“아, 네. 고마워요.”
그녀가 자리를 옮긴 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오빠, 바빠?
“아니, 괜찮아. 쉬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오빠한테 알려 줄 게 하나 있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한지유의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좋은 소식인 것 같은데?”
-그럼. 듣고 기뻐서 심장마비 올지도 몰라.
“뭔데?”
-이제부터 오빠가 아니라, 아빠라고 불려야 돼.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임신했어. 지금 산부인과 다녀왔는데 5주 됐다더라!
“정말이야? 진짜로?”
-응. 아기집도 보인대. 내가 초음파 사진 보내 줄게.
“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고마워. 정말 사랑해, 지유야.”
-나야 말로 고맙지.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일단 엄마랑 시부모님께도 알려 드려야 돼서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그래, 들어가.”
전화를 끊기 무섭게 조아라와 윤설하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가 소리 지른 걸 듣고 바로 뛰어온 모양.
나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있죠. 보통 일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일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명을 뒤로하고 특수부의 검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주목해주세요.”
검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놓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오늘 회식입니다.”
씨익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저 이제 아빠 됩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검사들은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드립니다, 부장님!”
“대박입니다!”
“경축 드립니다!”
***
2024년 가을.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의 정면에는 ‘차장검사 최서준’이라는 명패가 빛나고 있었다.
특수부의 직속 상사인 제3차장검사직에 오른 지 벌써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난 상태.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두형은 특수부의 부장으로, 장하영 검사는 부부장으로 승진에 성공했다.
정현우 검사는 공안부 부장으로, 홍석장 검사는 공정거래조사부에서 과학기술범죄수사부로 옮겨 가 부장을 달았다.
이로써 서울중앙지검의 3대 요직 부서의 부장을 전부 내 사람들이 차지한 아주 멋진 상황이 펼쳐진 것.
뿐만 아니라, 9급이었던 조아라는 8급 공무원으로. 7급이었던 윤설하는 6급 공무원으로 승진했다.
그렇다고 하나, 둘은 여전히 내 실무관과 수사관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내가 승진한 것보다 더 좋은 건 바로…….
“아빠!”
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 녀석이 있었으니까.
“우리 지훈이 왔어?”
한지유에게 해맑게 웃는 나의 아들, 최지훈을 넘겨받아 품에 안았다.
퇴근하며 함께 나오던 윤설하는 조카를 보는 눈빛으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발음이 벌써 이렇게 똑 부러지다니…… 이제 8개월 아닌가요?”
“네. 맞아요.”
“100일에 치아가 났다는 걸 듣고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성장 자체가 정말 빠르네요. 이게 바로 유전자의 힘인가 봐요.”
“지훈이 아빠 덕분이죠.”
지켜보던 한지유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참 보기 좋아요.”
윤설하는 내 아들의 볼을 가볍게 두어 번 잡았다가 나에게 말했다.
“저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들어가요.”
“조심히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먼저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한지유와 함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처제네랑 식사한다고 했지?”
“응. 지수네도 쌍둥이 데려온다고 하더라.”
성태현 시장 내외는 과속 아닌 과속으로 아주 건강한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란성 쌍둥이지만, 성별은 같은 아들 둘.
2023년 12월에 둘을 낳았고, 아쉽게도 지훈이의 생일은 2월이었기에 한 살 어린 동생이 되었던 터.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덕분인지 자매끼리 서로를 도와주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흐뭇해질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처제네랑 같이 외식하는 거면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오시지.”
“두 분 지금 지방에 놀러가셨어. 모임에서 관광버스까지 대절했다고 하시던데?”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 너랑 처제 도와주시느라고 늘 죄송스러웠는데.”
한지유는 피식 웃으며 최지훈을 안고 뒷자리에 있는 아기 시트에 고정시켰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면 다행이고.”
나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어머님이랑 아버님한테 용돈 보내 드렸으니까 알고 있어.”
“우리 부모님인데 나보다 네가 더 잘 챙기는 것 같아.”
“그래야 내가 사랑받지.”
한지유는 능글맞게 웃음을 짓고는 뒷좌석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조만간 한번 올라오신대. 지훈이 보고 싶으신가 봐.”
“언제쯤?”
“다음 달이나, 겨울 되기 전에 오신다니까 다음 달이나 되지 않을까?”
“그래, 고생 좀 해 줘.”
“고생은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어쩌면 이렇게 참다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같이 살면 살수록 더 사랑이 커져 간다니까.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식당에 도착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리는데,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먼저 들어가 있어.”
“응.”
한지유와 아들을 먼저 보내고 다시금 차에 올라 전화를 받았다.
“네, 최서준입니다.”
-고성탁입니다.
“고 프로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신의 손, 고성탁에게는 성태현을 세뇌시키는 일을 맡겨 두었던 터.
2년 가까이 진행 중인 터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를 하지 않는 상태.
성태현의 곁에서 업무를 돕고 있는 만큼, 괜히 나와 연락을 긴밀히 주고받는 걸 들켰다가는 그에게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오늘 나눈 대화에서 뭔가 뉘앙스가 이상했던 점이 있었던 터라,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성태현을 회유하는 데 문제가 생긴 모양.
나는 감정을 가라앉힌 채 말했다.
“말씀하세요.”
고성탁은 짙은 한숨을 내뱉은 뒤에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