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4)
이거 아무래도 계산을 잘못한 것 같다.
구속되어 갇혀 있었던 탓에 감이 무뎌진 건가?
젠장.
생각보다 일이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거드럭대며 앉아 있는 박재필 고검장의 표정을 보니,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증거는 없다.
판타지아 CCTV에 그의 얼굴이 찍힌 사실 자체가 없을 터.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당당할 리가 없겠지.
업소 장부에는 그의 출입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살인 청부에 관한 내용으로 갈 시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어진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살인에 관해서는 아주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
이렇게 되면 내가 누명을 벗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박재필 고검장을 쳐 낼 방법은 없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머리가 지끈거려 오기 시작했다.
“최 부장,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진 것 같은데?”
박재필 고검장은 히쭉 입꼬리를 비틀었다.
“날 너무 쉽게 생각한 것 아니야?”
이런 망할.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너무 자만했던 건가?
박재필 고검장은 독사 강중식 부장의 머리 위에 있던 인물인 만큼, 그 녀석보다 훨씬 까다롭다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모든 걸 꿰뚫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아직도 도현승을 100% 믿고 있는 겁니까?”
블러핑.
그러나 위기에 몰려서 치는 블러핑이 먹힐 리 없었다.
“최 부장, 아무 말이나 던지면 혼나.”
그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부산지검에서 도현승 가족을 죽인 깡패 새끼 하나를 조진 적이 있거든. 사회에 지킬 것도 남지 않은 녀석이 그 일 이후로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어. 근데 네 녀석이 암만 달콤한 말로 꼬드긴다고 한들 넘어갈까?”
젠장.
여기서 이야기를 더 했다간 말릴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있는 형사를 부르기 위해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최 부장이 뚝 떨어지려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안쓰러워서 힌트 하나 줄게.”
이가 빠득 갈렸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도현승과 나의 유일한 연결 고리라고는 판타지아에 있는 장부가 전부야. 그건 내가 일부러 남겨 놨어. 왜인지 알아?”
뒤통수를 향해 그가 나를 깔보는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최 부장이 아등바등하는 걸 보고 싶었거든.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발버둥 치는 꼴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말이야.”
박재필 고검장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 기대를 만족시켜 주길 바랄게.”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미친개라는 별명에 아주 적합하게 정말 미친 행동을 하고 있는 상황.
“고검장님.”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 자만심이 당신을 죽이고 말 겁니다.”
“그래?”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매만졌다.
“한번 기대해 보지.”
이를 꽉 물고 취조실에서 빠져나왔다.
***
젠장.
한 방 먹었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
박재필 고검장이 날린 주먹이 명치에 꽂혀 버렸다.
“후우.”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지만, 차오르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저런 미친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줄이야.
지금까지 모든 게 그의 설계대로 흘러갔다.
홍석장 검사에 대한 공격부터 이번 살인 청부까지.
미친개라고 하길래 보통이 아닐 줄은 알았는데, 암만 그래도 자신의 부하 직원을. 그것도 오른팔이었던 강중식 부장을 실제로 죽일 줄이야.
아니, 죽여 놓고 그걸 당당하다 못해 자랑거리인 듯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같은 인간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
강중식이 나를 죽이려다 실패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저 나를 쫓아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이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단순히 이번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닐 터.
이러다간 정말 고검장이 한지유에게 손을 뻗을지도…….
“이런 망할!”
한지유에게 마수를 뻗을 거라고 생각하니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것도 모자라 벽을 쾅 내려쳤다.
정신 차리자.
이러면 안 되지.
방금처럼 흥분하는 것 자체가 미친개에게 말리는 일이다.
낮에 있었던 취조실에서 그와 대면할 때도 이렇게 궁지에 몰리다가 블러핑을 치는 실수를 범했으니까.
차분하게 생각하자.
“후우.”
몇 번이나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아 찬물을 머리에 끼얹고 나서야 그나마 천천히 머릿속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홍석장 검사로 함정을 판 건 이미 지난 일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터.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한다.
이번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어 재판에 넘어간다고 한들, 증거 불충분으로 인해 나는 무죄 선고를 받는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무혐의와 무죄는 전혀 다르기에 인터넷에선 의심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터.
아니,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박재필 고검장은 문제가 될 수 있도록 선동할 것이다. 그에게 그 정도의 힘은 있을 테니까.
게다가 박재필 고검장은 무죄 판결이라는 그림이 보이는 순간부터 분명히 바로 후속타를 준비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살인 청부에 관해서는 결백이 증명되더라도, 또 한 번 박재필 고검장이 덤벼든다면 그땐 정말 상황이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언론을 통해 각종 의혹이 제기된 전적이 있는 만큼 이미지를 회복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국민들에게 신뢰성이 무너지고 말 테니까.
내가 부장검사임에도 다른 이들에 비해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여론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의혹에 휩싸이게 되면 자연스레 그 날개가 꺾이고 마는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힘이 빠져서 고검장에게 잡아먹히게 되겠지.
이게 미친개가 그리는 시나리오고, 이대로 있다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놀아나고 말 터.
미친개의 공격을 받는 건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이번 일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녀석을 끌어내려야만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박재필 고검장이 도현승에게 살인 청부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
그러나 둘의 연결 고리를 증명해 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CCTV가 없어진 현재,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건 업소의 장부와 그곳에 일했던 이들의 목격담이 전부.
그러나 살인 청부라는 중한 범죄는 그저 몇 가지 증언만으로는 유죄 판결이 날 수가 없다.
내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
워낙에 조심성이 많은 박재필 고검장의 성격상 애초에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살인 청부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리도 없고.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까.
무슨 카드를 꺼내야 녀석을 몰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자정이 넘어갔지만 눈이 감기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은 맑아져 갔다.
지금쯤이면 윤설하가 경찰들을 대동해 판타지아를 덮쳤을 터.
아침이 되기 전까지 방법을 강구해 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긴 했지만, 전부 자질구레한 것들뿐.
결국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아침 해를 맞이했다.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나간 변호사 접견실에선, 구은호 변호사가 이미 윤설하와 전화 연결을 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바로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네, 최서준입니다.”
-아,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꽤나 지친 듯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아마 판타지아에서 수거한 증거들을 밤새 확인하느라 한숨도 못 잔 모양.
“어떻게 됐나요?”
-네. 업소 장부랑 CCTV 기록 및 교체 전 하드디스크까지 전부 확보했습니다. 장부엔 부산에서 고위급 공무원과 각종 관료들에 대한 출입 기록이 적혀 있는 걸로 확인했는데, 문제는 CCTV에…….
“고검장 찍힌 거 없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는 놀란 듯이 물었다.
-알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요. 어제 고검장이랑 만났어요. 미친개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까 장부 외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뉘앙스던데…….”
-아, 네. 맞습니다.
그녀는 송구스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고검장의 출입까지 장부에는 적혀 있으나, CCTV는 아예 찍히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애초에 해당 날짜에는 CCTV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역시나.
이렇게 된다면, 박재필 고검장은 내가 이런 식으로 움직일 것까지 전부 예상했다는 것이겠지.
아직까지도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니.
분하다 못해 내 자신이 한심해질 지경.
짙은 한숨을 내뱉자, 윤설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장부로 엮어 볼까요? 일단 출입 기록 장부가 있으니 업소 관계자들에게 돈을 쥐어 주고 증언을 조작해 볼까요?
“아니요. 그건 오히려 우리 목을 죄는 행동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고검장이나 언론에 유출되기라도 하면 역으로 저희가 박살 납니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혹시 장부 획득할 때 돈 줬습니까?”
-예. 물론, 제가 직접적으로 주진 않고 홍석장 검사를 통해 해당 지역 경찰들에게 넉넉히 쥐어 주고 마담에게는 용돈과 함께 업소 운영에 피 보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받아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박재필 고검장이 안다고 한들, 시비를 걸 수는 없을 거예요.”
이제 문제는 박재필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깨부수느냐.
녀석이 남긴 장부.
어쩔 수 없이 남긴 건지, 정말 나를 조롱하기 위해 남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만하다 못해 오만이 되어 버린 미친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힌트일 터.
이걸 활용해야 한다.
“장부에 도현승 출입 기록이 얼마나 나와 있어요?”
-출입 기록엔 일주일에 2회에서 3회 가까이 찾아온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박재필 고검장은 서울로 간 뒤로 거의 오지 않았고, 올해 설 연휴 전후로 딱 두 번 출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해당 날짜엔 도현승의 출입 기록이 적혀 있지 않고요.
예상했던 대로다.
동행이었으니 기록이 남지 않았을 터.
-장부 출입 날짜를 확인하면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지만, 정황 증거라서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박재필과 도현승이 각각 불법 업소에 드나들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업소 자체는 아직 단속이 된 적이 없는지라…….
그때,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그렇지!
그런 방법이 있었어!
박재필은 말 그대로 완벽 주의.
자신에게 흠이 되는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용납지 않을 터.
내가 분명 도현승과의 연관성을 증명하려고 하면 부정하려 들 게 분명하다.
그걸 이용해서 역으로 녀석의 목을 칠 수 있을 만한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살인 청부가 아니라, 아예 다른 죄목으로.
강중식 때와는 다르다.
내가 마약 던지기를 통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만큼 박재필 고검장은 분명히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뒀을 터.
실제 짓지도 않은 무고한 죄로 인해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現 고검장이라면 차관급의 인사. 보통의 건으로는 수사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
그러나 실제로 죄를 지었다면 다르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고 기록까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죄를 짓는다면 암만 고검장이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을 터.
실제로 박재필 고검장은 죄를 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모든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말했다.
“윤설하 씨.”
-네, 부장님.
“도현승과 박재필이 구면이라는 모든 증거를 찾아내 주세요. 업소용 CCTV가 아니라, 근처 교통용 CCTV나 방범용 CCTV, 업소 관계자 분들의 증언까지 최대한 확보해 주세요. 그게 아주 큰 힘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