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2)
“일단 알겠습니다.”
윤설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월향이라…….’
그 이름은 윤설하의 머릿속에도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최서준을 부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과정에서 강현수 부장을 무너뜨릴 때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으니까.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세한 내막까지 알 수는 없었으나, 부장검사들의 비리를 에메랄드 목걸이에 담아 온 바로 그 여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 사건이 터진 직후라서 파주 요정에 그대로 남아 있지는 못 했던 모양.
윤설하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윤 박사.
“아, 네. 선배님 바쁘세요?”
-아니야, 이야기해.
“요즘 이두형 부부장님 맡은 건 중에 급한 거나 중요한 건은 없죠?”
-딱히 없어. 뭐, 내가 도와줄 거 있어?
그녀와 전화하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이두형 부부장의 수사관인 박철웅.
윤설하가 부산에서 최서준의 지시를 이행하는 동안, 서울에서의 조사는 박철웅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예. 부장님 지시로 떨어진 건데…….”
-그러면 당연히 해야지.
부장이라는 말에 박철웅 수사관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부부장님께서도 혹시나 도와줄 게 있으면 만사 제쳐 두고 윤 박사 도우라고 했어.
“감사합니다. 파주 요정에 대해 몇 가지 조사를 좀 해 주셔야 될 것 같아요.”
-파주 요정?
“네. 부장님께서 특수부 검사들 데리고 몇 번 가셨던 적 있으시니까 이두형 부부장님께서 자세한 위치를 알고 계실 거예요.”
-그래. 그 다음엔?
“거기서 월향이라는 여자에 대해 찾아 주세요.”
-일하는 직원이야?
“예. 3년 전까지는 확실하게 있었는데 아마 지금은 없을 거예요.”
-가명이지?
“네. 그런데 파주 요정을 떠난 지 꽤 오래되어서 아는 사람이 많이 없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관련해서 아는 내용들은 전부 조사해 주세요.”
-알겠어. 언제까지 파악하면 돼?
“최대한 빠르게요. 본명은 이하연이라고 하니까 경찰 쪽에 사람 통해서 사진도 먼저 구해 주시고요.”
-그래, 알아보고 오늘 저녁에 연락할게.
“부탁드릴게요.”
-그나저나 부산에서 수확은 좀 있어?
“잡다한 건 몇 가지 있긴 한데, 아직 굵직한 건 없어요.”
-조금 더 힘내 보자고. 특수부에 있는 다른 검사들 전부 그 사건 실체 파악하는 데 힘쓰고 있으니까 금방 나오실 수 있을 거야.
“당연하죠. 그러면 고생해 주세요.”
-수고해.
윤설하는 전화를 끊고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며 휴대폰을 통해 슬쩍 확인한 인터넷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 기사가 쉼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서준 부장이 구속되어 있긴 하지만, 독사 강중식 부장과 싸울 때보다 오히려 여론이 괜찮다는 사실.
한지유와 결혼이 확정되었다는 걸 그녀의 소속사인 HS엔터테인먼트에서도 알고 있는 만큼, 언론전을 HS엔터에서 신경 써 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다행히 언론 쪽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기에 윤설하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조금 더 수월한 상황.
남은 건 자신이 늦지 않게 최서준이 시킨 걸 이행하는 것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설하 본인이 직접 부산까지 내려온 만큼, 최서준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일단 억울한 누명부터 풀어야 미친개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할 테니까.’
***
“아, 별로 없어요?”
-응. 이쪽 바닥이 원래 그렇잖아. 소리 소문 없이 훌쩍 떠나가는 사람도 흔하고 워낙 물갈이도 빨리 되니까. 파주 요정에서 선수로 근무하는 여자들 중에서는 월향이를 아는 사람이 두세 명밖에 안 남았는데, 다들 소식은 못 들었다고 하더라고.
윤설하도 예상했던 바였다.
화류계라는 곳 자체가 서로 긴밀하게 친해지고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해지는 경우도 드물고, 철새처럼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옮겨 다니는 게 많은 곳이니까.
-윤 박사한테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그래도 이게 하루 만에 찾아낸 거니까 추가적으로 더 조사해 보고 나오는 대로 알려 줄게. 일단 사진 보냈거든. 한번 확인해 볼래?
“네.”
윤설하는 이어폰이 꽂혀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이하연의 사진을 확인했다.
화류계 종사자답게 짙은 화장에 크고 짙은 눈망울. 성형 수술을 했다는 티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예쁜 얼굴.
거물급 정치인들만 상대했던 파주 요정에서도 에이스라는 게 단번에 이해가 될 정도.
-그리고 내일부터는 그만뒀던 사람들도 찾아가서 조사해 보려고 하는데…….
휴대폰 너머로 박철웅 수사관의 말이 들려오던 도중, 윤설하의 시야에 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다시금 휴대폰을 들어 박철웅 수사관이 휴대폰으로 보내온 사진과 저 멀리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비교했다.
그와 동시에 윤설하의 눈빛이 반짝였다.
‘찾았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박철웅 수사관에게 말했다.
“아니요, 선배님. 조사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
“네. 그 대신 내일 변호사 접견에서 부장님이랑 제가 직접 통화할 수 있게 준비 좀 해 주세요.”
-접견실에서?
“예. 할 수 있으시죠?”
-어렵지 않지. 그거면 돼?
“네. 추가 사항 있으면 보고드릴게요.”
-그래, 고생해.
“선배님도요.”
전화를 끊고, 윤설하는 핸들에 상체를 얹은 채 목을 앞으로 더 기울였다.
틀림없는 월향이었다.
본명은 이하연.
그녀가 짙은 화장을 한 채 높은 굽의 힐을 신고 ‘판타지아’라고 적힌 업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윤설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최서준 부장님이라니까.’
대체 어떻게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도 모든 걸 파악하고 자신에게 지시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
새삼스럽게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분명 최서준 부장의 말에 의하면, 이하연은 호의를 베풀 거라고 했다.
남은 건 이제 기다림뿐.
그녀가 퇴근해 집에 돌아가는 그때가 윤설하가 움직일 때다.
***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새벽 4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판타지아에서 지친 얼굴의 이하연이 가방을 메고 터벅터벅 업소를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도착하는 검은 승용차 한 대.
택시라는 마크도 없었지만, 이하연은 자연스레 그 뒷좌석에 올라탔다.
‘콜 뛰기!’
화류계 종사자들이 주로 쓰는 불법 자가용 택시를 일컫는 말.
윤설하는 곧장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고 검은 승용차의 뒤를 쫓았다.
새벽녘이라 한적한 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가로등 불빛만이 어슴푸레 거리를 밝히고 있는 한 오피스텔의 앞.
이하연은 콜 뛰기 차량에서 내려 지친 몸을 이끌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고, 윤설하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놓고 바로 이하연의 뒤를 따랐다.
이하연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난 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윤설하가 황급히 달려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데 성공했다.
11층으로 향하던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도착할 즈음, 윤설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하연 씨.”
깜짝 놀란 이하연은 몸을 움츠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엘리베이터의 많은 버튼 중 오직 11층이라는 숫자만이 빛나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같은 11층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전부 남자들뿐인데…….’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월향이라고 불러야 되려나요?”
월향이라는 단어에 겁이 잔뜩 차오른 이하연은 가방에서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잡았다.
‘설마, 강현수 부장이 보낸 건가?’
그러나 다행히도 윤설하의 입에서는 안심할 만한 말이 나왔다.
“최서준 부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그때,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윤설하가 특수부 소속 수사관의 신분증까지 보여 주고 난 뒤에야 이하연은 긴장을 풀고 집 안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오피스텔은 넓지 않았다.
한 사람이 조금은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이하연은 냉장고와 찬장을 뒤지다가 민망한 듯이 웃으며 윤설하에게 물었다.
“차나 음료수가 없어서…… 맥주라도 드릴까요?”
“아니요, 물이면 충분합니다.”
그녀는 유리잔에 얼음 몇 개만 띄워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윤설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월향이라고 부르셔서 깜짝 놀랐어요. 이곳에서는 가희라는 가명을 쓰고 있어서…….”
이하연은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거예요? 최서준 검사님께는 다른 일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윤설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아, 최서준 부장님이 전하기로는 옷 가게를 하고 계실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제가 알아보니까 판타지아에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퇴근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따라왔습니다.”
이하연은 어설픈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오자마자 옷 가게를 열긴 했어요. 그런데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한번 해 본 적 없는 제가 갑자기 사업을 한다고 해서 잘될 리가 없죠.”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부산에 온 지 1년도 안 돼서 말아먹었어요. 이것저것 벌려 놨던 탓에 대출 빚만 잔뜩 남더라고요. 기술도 없고, 제대로 된 학력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결국은 다시 화류계로 돌아가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혹시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경계한 이유도 그 대출 때문에…….”
“아, 그건 다른 일 때문이에요. 제가 서울에서 최서준 검사님을 도우며 누구 원한을 산 적이 있거든요.”
“혹시 강현수 부장인가요?”
“네. 3년이나 지나긴 했는데 혹시나 해서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니에요. 이 정도는 예삿일이죠. 실제로 주변에 언니들 보면 그놈의 빚 때문에 실제로 살해 위협이나 협박받는 분들도 엄청 많더라고요.”
그녀는 씁쓸한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겉보기엔 예쁘고 화려하지만, 심해보다 어두운 곳이 바로 화류계니까요.”
이하연은 말해 놓고도 민망했는지,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윤설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이 남자 본 적 있으세요?”
그녀가 휴대폰에서 꺼낸 사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독사 강중식 부장을 살해한 용의자 도현승.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최서준 부장은 이하연이 도현승과의 연관성이 있으리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하연의 입에서는 최서준이 예고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아, 네. 판타지아에 몇 번 손님으로 온 적 있어요. 그런데 이분이 검사님과 무슨 연관이라도…….”
TV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는 데도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하연은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와 달리 여기서는 정치에 대해 꿰뚫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어서 뉴스는 잘 안 보거든요. 그래서 소식에 둔감한지라…….”
“그럴 수 있죠.”
윤설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도현승과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자, 이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가…….”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도와드릴게요. 말씀만 하세요.”
“아, 그 전에 혹시 직접 이 용의자에게 접대를 하셨던 건가요?”
“아니요. 같이 온 손님이 제 지명이셔서 들어갔었어요.”
순간, 윤설하의 머릿속에 최서준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박재필이 판타지아에 몇 번 갔을 겁니다. 도현승과 박재필 고검장의 연관성만 찾아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무조건 형세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순간, 윤설하의 가슴속엔 아른한 기대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휴대폰에서 박재필 고검장의 사진을 찾아내 이하연에게 보여 주었다.
“혹시 그 지명했던 손님이 이 사람인가요?”
“이분…….”
이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 기억났어요. 네, 맞습니다. 매번 저 지명하셨던 손님이에요. 검찰에 계신 높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 순간, 윤설하는 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판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