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해로 (2)
“와, 오빠 이런 요리도 할 줄 알아?”
음식을 먹어 본 한지유는 연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진짜 맛있어, 대박.”
그녀는 엄지까지 척 들어 올렸다.
자취할 때 혼자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자기만족을 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만족감이었다.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는 어머님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잘 먹으니까 뿌듯하네.”
“진짜 맛있다니까. 오빠가 공무원만 아니었으면 요리 프로그램 같이 나가자고 하고 싶을 정도야.”
“하하하, 칭찬이 과한데?”
“진심인 걸 어떡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식사를 멈추지 않았다.
먹는 음식에 반지를 넣어 놓을까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건 바로 윤설하와 조아라 듀오에게 거절당했다.
20년 전 고백법이라나, 뭐라나.
나름대로 아이스크림과 달리 회심의 방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안 하길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오빠도 얼른 먹어 봐.”
그녀는 손수 내 입에 새우를 넣어 주었다.
“이렇게 오빠랑 제주도에 오니까 완전 힐링되고…….”
식탁에서 그녀와 한참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
“오빠가 요리했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같이 영화나 한 편 볼까?”
“영화관 여기서 가려면 꽤 먼데?”
“아니, 안방에 빔 프로젝터 있잖아. 그걸로 보자.”
“그거 좋겠다.”
“응. 내가 준비하고 있을게.”
“알았어.”
고무장갑을 끼는 그녀를 뒤로하고 태연하게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캐리어에서 USB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하는 등 모든 세팅을 마쳤다.
문제가 있을까 봐 영상을 다시 확인하고, 볼륨은 괜찮을까, 몇 번씩 점검을 하는 것은 물론, 혹시나 입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어 양치와 가글도 여러 번이나 더하고 난 뒤에야 한지유를 맞이했다.
그녀도 거실의 화장실에서 다시 씻고 왔는지 화사한 향기가 풍겨 왔다.
“우리 영화 뭐 봐?”
한지유는 머리를 틀어 올리며 내 옆에 착석했다.
“보면 알 거야.”
“뭔데, 뭔데?”
눈을 반짝이며 묻는 그녀에게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빔 프로젝터로 쏘아져 나오는 화면에서 검은 빛이 걷히며 긴장이 가득 깃든 내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 지유야.
순식간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어, 뭐야?”
한지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연신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아니, 처음 만나기 전부터 원래 널 좋아했어. 물론, 그때는 순수한 팬심이었지. 그러다가…….
영상 편지 속의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한지유의 시선이 화면으로 고정되었다.
내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인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지금까지 속으로만 생각하던 내용을 영상 편지에 담아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기에 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지유가 여전히 영상 편지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반지 케이스를 꺼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영상 편지가 끝에 다다랐고, 동영상 속 내가 나직이 말했다.
-지유야. 마지막으로 네게 할 말이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동영상이 멈추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반지 케이스를 열어 내밀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한지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진즉에 붉게 물든 그녀의 눈가에는 촉촉함을 넘어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이내 목이 멘 듯한 그녀는 감동에 벅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사랑해.”
그녀는 내가 반지를 껴 주기도 전에 나를 와락 껴안았다.
숨이 막힐 듯이 세게 껴안는 한지유.
나는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반지 끼워 줄게.”
한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반지 케이스에서 꺼낸 반지를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 주었다.
“너무 예쁘다.”
자신의 반지를 본 한지유는 다시금 눈물을 왈칵 흘렸다.
“왜 이렇게 울어? 누가 보면 시집오기 싫어하는 줄 알겠다.”
“아니거든.”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내 손을 잡았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청혼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이게 내 로망이었다고.”
“그래?”
“응. 막 밖에서 화려한 것보다, 이렇게 둘 만의 공간에서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우이잉.”
한지유는 말하면서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입술을 들썩였다.
청순함의 대명사였던 그녀가 오히려 귀여워 보이기까지 할 정도.
그나저나 이런 게 로망이었다니.
윤설하와 조아라의 조언으로 아주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이거 아무래도 복귀하면 두둑이 챙겨 줘야겠는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상 편지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제는 오히려 흐뭇하고 뿌듯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칠석날에 결혼하자. 그날에 하고 싶다며.”
내 말에 한지유는 같이 여행을 갔을 때, 동생이 말해 줬던 게 떠올랐는지, 나직이 읊조렸다.
“아, 한지수 진짜…….”
“왜, 칠석날 싫어?”
“……좋아.”
“그러면 올해 칠석날부터 내 와이프 되는 거다?”
한지유는 조심스레 날 올려보고는 똥그란 눈을 반짝이며 두어 번 깜빡이더니.
“오늘부터 하면 안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렇게 제주도의 밤은 깊어만 갔다.
***
“고생하셨어요.”
무심한 듯이 조아라와 윤설하에게 작은 가방을 툭 건넸다.
단박에 가방 안에 든 내용물을 알아챈 윤설하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꽤나 효과가 좋았나 보네요.”
“그게 로망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윤설하는 사건을 해결한 것처럼 주먹을 쥐며 기뻐했다.
“나중에 청첩장 나오면 제일 먼저 두 분부터 드릴게요.”
“아, 이거 그대로 축의금에 넣으라는 뜻이었군요?”
“김영란법에 걸릴 일 있어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잘 쓸게요.”
잠깐 웃고 나서 자연스레 업무 이야기로 돌아왔다.
“오전에 특별한 일 없었어요? 출근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끌려가느라고 신경도 못 썼네.”
조아라가 바로 메모장을 보며 대답했다.
“아, 오전 10시 경에 송현성 부부장님께서 찾아오셨었어요.”
“현성이가요?”
“네.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닌데, 하소연할 게 있나 보더라고요. 얼마 전에 고검장님 오셨다간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같이 담배나 한 대 태우려는 생각으로 오셨던 것 같던데요.”
“따로 말하거나 저한테 전달해 달라고 한 건 없었고요?”
“예. 중요한 일은 아니신 것 같았어요.”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해 볼게요.”
“네. 그 외에는 특이 사항 없었습니다.”
“그러면 두 분 다 일 보세요. 저는 잠깐 전화 한 통하고 오겠습니다.”
“네에.”
둘을 뒤로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곧장 송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두어 번 울리자마자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
-여보세요?
“현성이, 너 아까 왔었다며?”
-어. 휴대폰 꺼져 있길래 잠깐 들렀는데 회의 들어가 있었다며.
“응. 아예 꺼 놓고 들어갔어. 무슨 일 있어?”
-아니, 너 며칠 전에 고검장이랑 이야기했다고 소문 돌던데, 그거 진짜냐?
“갑자기 사무실 왔더라고. 그게 왜?”
-아, 갑자기 그 인간이…… 아, 너 어디야? 잠깐 나와 봐.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지금 내려갈게.”
송현성이 이렇게 답답해하는 건 처음 본다.
박재필 고검장이랑 트러블이라도 있었던 건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고검 건물 뒤편으로 가자, 역시나 송현성이 홀로 담배를 꼬나물고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자연스레 그의 옆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고검장한테 까이고 왔냐?”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난 둘째 치고 너 만났을 때 뭐 이상한 거 없디?”
“내가 만나기론 완전 의외였어. 지금까지 했던 일을 보면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오히려 온화하더라고.”
“아,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다.”
송현성은 질색을 하며 담배 연기를 뱉었다.
“그 인간, 평상시에는 느물느물하고 평범한데, 한번 꼭지 틀어지면 진짜 미쳐 날뛴다니까. 광견병 걸린 것 같아.”
“대체 뭘 했는데?”
“하아.”
그는 짙은 한숨부터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독사 강중식 부장, 그 자식 사건 넘어온 거 말이야. 어쨌든 검사 처벌에 관한 거니까 감찰부가 끼어 있을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이번에 마약전담조사부랑 너희가 같이 맡는다고 들었는데?”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와서는 그거 가지고 강중식 부장에 대해 욕을 하면서 사무실을 엎어 버리고 가더라고.”
며칠 전 보았던 그의 온화한 표정을 생각하면 전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
그러나 왠지 모르게 직감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만할 것 같았다.
다시 말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가슴으로는 알 것 같았달까.
“이유 없이?”
“내가 그러니까 미쳤다고 하는 거지. 이런 발작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야. 평소에 지랄병 터뜨릴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심하더라고. 지금 그래서 수사관 하나 다리에 깁스하고 왔다니까?”
다리에 깁스까지 했을 정도면 지랄 발광을 하는 걸 넘어서 폭주했다는 걸 텐데.
“그런데 우리 수사관이 며칠 전에 네가 고검장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너한테 찾아갔지. 혹시나 무슨 일 있었나 해서.”
그는 담배꽁초를 버리기 무섭게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너 만나서는 이상한 기색 보이지 않던?”
“나한테는 오히려 잘 지내보자고 하더라고.”
“와, 나 지금 듣고 소름 돋았어.”
그는 소매를 걷으며 자신의 팔에 닭살이 돋은 걸 보여 주었다.
“그거 너 안심시켜 놓고 뒤통수치려고 준비하는 거야. 방심하지 마라.”
“안 그래도 그래서 더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암만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들, 자기 오른팔을 잘랐는데 바로 휴전 선언한다는 게 이상하더라고.”
“내가 생각해도 그게 더 무섭다.”
송현성은 진절머리를 쳤다.
“그런 상황에서 온화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는 거지?”
“어. 진짜 독사가 그놈 오른팔만 아니었다면, 천상 선비라고 생각했을 거다.”
“어휴, 완전 가면이라니까. 진짜 페르소나 그 자체야. 평소에 회의할 때만 해도 그렇게 친절한 인간이 없다니까. 정말 이중인격 아닌가 몰라.”
그는 한탄을 내뱉었다.
“일단 네 앞에서는 그 가면 속을 안 보여 줬다는 거지?”
“응. 오히려 차분한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송현성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진짜 누가 미친개 아니랄까 봐 코스프레는 제대로 하고 다닌다니까.”
잠깐만.
그가 말한 단어 하나가 귀를 사로잡았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뭐, 코스프레?”
“아니, ‘미친개’ 말이야. 그거 고검장한테 하는 말이야?”
“어. 나랑 박승수 부장님 둘이서 붙인 별명이야. 우리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암호 같은 별명.”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진짜 행동하는 게 광견병 걸린 것 같아서 그렇게 불러.”
그 순간, 나의 입꼬리가 크게 비틀어졌다.
찾았다, 미친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