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 (8)
박재필.
현 서울고검의 검사장으로 있는 인물이자, 강중식의 배후에 있었던 인물.
그가 내 사무실에서 홀로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인물 같았으면, 사무실에 혼자 뒀다가 문제를 일으킬까 싶어 조아라도 자리를 지켰겠지만, 다른 인물도 아니고 무려 고검장인 만큼 당황해서 밖에 나온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기사에 실린 사진으로 몇 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터라, 갑자기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독사를 박살 낸 것에 대해 경고라도 하려고 온 건가?
“크흠.”
사무실에 들어가며 인기척을 드러내자, 그가 소파에 팔을 걸치며 내 쪽을 돌아봤다.
“어, 최 부장 왔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아주 온화한 표정으로 날 반겼다.
아니, 온화하다 못해 반갑다는 느낌.
분명 내가 파악하기로는 이런 스타일의 인물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분명히 박재필 고검장이 맞았다.
일단, 당황한 기운을 지워 내고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검사장님.”
“그래, 회의하고 왔다며?”
“예. 정리할 게 있어서…….”
“바쁜데 내가 방해한 건가?”
“아닙니다. 다 끝나고 왔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그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확실히 내가 아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렇게 느물느물한 인간이 아닐 텐데.
아니, 원래 평소엔 느물느물하다가 계기가 생기면 돌변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커 보였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그의 말투에서 풍겨 오는 분위기는 일부러 위장한다고 해서 나올 법한 게 아니었으니까.
“앉지, 잠깐 이야기 좀 하려고 왔으니까.”
“아, 네.”
그는 예상외로 상석에 앉아 있지 않았기에 맞은편으로 가서 얼굴을 보고 앉았다.
그러나 박재필 고검장은 입을 열지 않고 지긋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따금씩 커피를 홀짝이는 게 전부.
그의 얼굴은 완전한 강아지상이었다.
다만, 순둥순둥한 강아지가 아니라, 사나운 불독의 느낌.
그러나 그 사나움을 숨기고 겉으로는 세상모르게 순수한 강아지인 척하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직감.
박재필 고검장의 평화로운 표정에서 나오는 온화한 태도에 순간 착각할 뻔했던 정신을 붙잡았다.
그는 다름 아닌, 독사 강중식 부장을 조종했던 인물.
다시 말해, 나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암만, 강중식 부장이 앞장서서 내게 덤볐다고 한들, 그 배후는 박재필 고검장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가 무색하리만치, 그는 평범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가 조금 껄끄럽다고 생각하나?”
“예?”
모르는 척 되묻자, 그는 능글맞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둘만 있는데 숨기지는 말자고. 강 부장 때문에 자네가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겠는가?”
“아…….”
잠깐 고민하다가 바로 인정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많은 걸 파악하고 있는 이상, 굳이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예. 일반적인 다른 선배님들이나 검사장님보다는 조금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럴 만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런데 다 잊자고.”
박재필 고검장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걸렸다.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벌어졌던 일인데 산 사람끼리 왈가왈부할 게 있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단 하나.
이 인간, 도대체 뭐지?
강중식 부장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손절하는 게 맞다고는 하나, 몇 년간 자신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목숨 줄을 끊은 나에게 와서 잊고 친하게 지내자니.
이건 정치 메커니즘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였다.
대체 왜일까.
아니, 이런 처세술 덕분에 고검장까지 올라간 건가?
나를 보며 지긋이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소름이 돋아나려 했다.
이렇게 나오니까 더 무서운걸.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는 끌끌 웃음소리까지 냈다.
“자네가 날 모르면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만하지.”
조금 더 그를 살펴볼까 하다가, 오히려 이럴 때야 말로 직구를 날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고검장의 진심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검사장의 의중을 잘 모르겠습니다.”
두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피며 찬찬히 말했다.
“강중식 부장이 긴급체포 된 지 이제 겨우 열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줄은 생각지 못했거든요.”
“열흘밖에라니.”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열흘씩이나 지난 거지.”
고검장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우리 사이에서 열흘이면 모든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나마 비틀어졌다.
“밀던 대통령 후보를 갈아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잖아.”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시야가 아찔해졌다.
설마, 내가 경동수 대통령과 손을 잡았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정신 차리자.
흔들리면 안 된다.
이를 꽉 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내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박재필 고검장이 눈치챌까 봐 싶어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비틀어진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강 부장이 실수한 게 있지만, 서로 악감정 가지지 말고 잘 지내보자, 이거지. 내가 강 부장 일하는 걸 지켜보니까 자네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는 다시금 히쭉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윗니만 살짝 보였다면, 이번에는 잇몸까지 훤히 보이는 미소가 만개한 수준.
아무래도 경동수와의 커넥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
확신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다는 것일 터.
물론, 이렇게 말했다는 것 자체가 그걸 건드리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밝힌다는 자체가 본인에게 여유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겉으로라도 느물느물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니, 나도 그에 대해 더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그의 의도대로 따라가 주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베스트였다.
독사에게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탓에, 재정비하고 고검장을 상대할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일단 겉만이라도 그의 뜻대로 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검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적대할 이유가 없죠.”
“고맙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공손하게 그 두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또 보자고.”
“예. 조심히 가십시오.”
박재필 고검장은 그 인사를 끝으로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휘적휘적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영 좋지 않은 예감이 풍겨져 왔다.
그와 더불어 제일 문제가 된 점은 따로 있었다.
박재필의 눈빛.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눈빛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경동수 대통령이나 김석원 장관 같은 인물들도 눈빛을 보면 어느 정도 심리가 읽어졌는데, 이 인간만은 조금의 속내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말투에서 풍겨 오는 분위기가 전부.
그만큼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라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저 인간을 경계하지 않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겠는걸.
박재필 고검장이 내가 미래 문자에서 보았던 미친개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최대한 경계해서 움직여야 한다.
오늘 온 건 일종의 탐색전에 불과할 테니까.
***
고검장이 돌아간 오후, 한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류 봉투를 들고 날 찾아왔다.
한참 동안 안부를 묻던 그는 슬쩍 서류 봉투를 내밀며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이번 사건 말이야, 이게 100퍼센트 범인이 맞는데, 자꾸 아니라고 친구가 증언을 해 가지고 말이야…….”
“아, 그래요?”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가 건넨 서류를 받았다.
물론, 펼쳐 보지도 않고 대충 휘적휘적 앞뒤로 종잇장만 넘기면서.
지금 나를 찾아온 이 남자는 건설범죄전담부의 구호성 부장검사.
1번 라인 소속이긴 하나, 얼마 전, 내가 독사에게 물려 위기에 몰렸을 때, 귀신같이 바로 입 싹 닫고 모른 척하던 인물.
내가 회복해서 올라오자마자, 다시 살가운 척 다가와 알랑방귀를 뀌긴 했지만, 한번 뒤통수를 때린 이를 내가 받아 줄 리가 없지.
“이게 진짜 중요한 거거든.”
손절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친한 척이라니.
내가 서기웅 검사장이랑 가까우니 잘 좀 이야기 해 달라고 굽실굽실하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두고 가세요. 한번 검토해 볼게요.”
“그래. 고마워, 최 부장.”
“아니요, 뭘 이런 것 가지고.”
말을 끝내기 무섭게 서류를 찢어질 듯이 세게 팍 넘겼다.
구호성 부장검사는 내가 지금의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 부장, 저번에는 내가 워낙 먹고살기가 바빠서 자네가 힘들 때 연락도 못 하고…….”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나는 손사래를 쳤다.
“바쁠 때는 그럴 수 있죠.”
“그, 그렇지?”
그는 다행이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앞으로 자네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아, 그런데.”
그러나 구호성 부장검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서류를 덮으며 그에게 건넸다.
“저도 요즘 저 먹고살기도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네요.”
“아니, 최 부장. 그러지 말고…….”
그는 죄인이 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이번 건 해결 못 하면 진짜 검사장님한테 찍혀. 이거 조금만 연장해 주면 진짜 할 수 있거든?”
“아, 네. 그러시구나.”
“서 검사장님이 자네 말이라면 바로 들어주시니까 한 번만 잘 이야기해 주면 안 될까?”
나는 그가 잡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손에 땀 차는 걸 싫어해서…….”
“그, 그래. 최 부장.”
그는 냉큼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조만간 자리 한번 마련함세. 자네가 그 파주에 요정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거기 내가 특급 코스로 쫙 준비해 놓을 테니까 최 부장은 몸만 와서…….”
“선배님.”
“어, 최 부장.”
“제가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아실 텐데요.”
“어, 알지, 알지. 그냥 내 마음이 자네랑 술 한잔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흐음.”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표정을 스윽 살피고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 최 부장.”
그는 눈을 반짝이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괜찮은 날만 말해 주면 내가 바로 요정 예약 잡을 테니까…….”
“네, 뭐…… 바쁠 텐데 가 보세요.”
“그래, 푹 쉬어.”
“예, 선배님.”
그래도 선배이기에 구호성 부장검사를 배웅해 주려고 일어나려는 순간.
“됐어, 됐어. 바쁠 텐데 나오지 말고 쉬어.”
그는 워워 손을 들어 말리고는 후다닥 나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구호성 부장검사의 뒷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곧장 조아라를 불러 구호성 부장검사가 두고 간 서류를 건넸다.
“이거 파쇄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아라는 거침없이 문서들을 전부 세단기에 집어넣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갈려 버린 서류들.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물론, 그가 부탁한 사건에 대해서는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중요할 때 누락시킬 것이다.
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이전까지만 해도 같은 라인 사람이기에 도와줬다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조차도 사라졌다.
라인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라인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올라온 이상, 라인이라는 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라인에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분명 도움이 되긴 되니까.
다만, 이런 간신배들은 철저하게 내 시야에서 밀어낼 것이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저런 녀석들은 전혀 필요가 없으니까.
독사가 무너지며 위상이 절정에 오른 덕분에 슬슬 서울중앙지검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있다.
정말 이 세계의 왕이 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머릿속에 박재필 고검장의 비틀어진 입꼬리가 스쳐 지나갔다.
젠장.
아직 한 발 남았다는 건가.
박재필 고검장.
딱 하나의 장애물만 더 넘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