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 (1)
-서울중앙지검 출신 前검사 신용호 양심 고백
예상치도 못했던 큼지막한 자막이 TV에 떠올라 있었다.
아니, 신용호가 왜?
처음엔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터진 줄 알았다.
그러나 TV에서 생중계되는 녀석의 기자회견을 보던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검사를 그만두고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주옥그룹으로부터 10억 원의 뇌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있던 한지유도 놀란 눈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 오빠 친구 아니야?”
“맞아.”
이거 왠지 느낌이 싸한데.
-지금 논란의 중심에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부 부장검사인 최서준 부장의 뇌물 수수 혐의는 최서준이 아니라 제가 받은 것이며, 뇌물은 100억 원대가 아니라 10억 원의 뇌물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는 상상도 못 한 발언을 시작했다.
-까놓고 말해서, 지방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지 1년도 채 되지 못한 검사에게 주옥그룹이라는 대형 재벌이 100억 원대의 뇌물을 준다는 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아니, 지금 저 자식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제가 경제범죄조사부에 있을 무렵, 주옥그룹과 연이 닿았고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던 도중 비서실의 공효익이라는분께 10억 원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조건은 이철기 前부회장에 대한 비리 혐의를 터뜨리는 것이었고요.
그때, 기자 하나가 손을 들고 물어왔다.
-그러면 최서준 부장님이 터뜨리신 건은…….
-최서준 부장이 터뜨린 사건의 소스를 제가 제공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주옥그룹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요. 그저 제가 이런 건수가 있으니 터뜨려 보지 않겠냐는 식으로 제안을 했고, 당연히 이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검사라 어떻게든 실적을 내기 위한 최서준 부장한테는 엄청난 건수였으니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사실과는 달랐다.
그러나 청산유수처럼 그가 말한 덕분인지, 아주 그럴 듯한 시나리오였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의심하기가 어려울 정도.
-그러던 과정에서 이철기 前부회장은 최서준 검사가 자신을 무너뜨릴 만한 사건을 터뜨릴 준비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걸 뇌물로 막으려고 하자, 청렴한 최서준 검사는 그 받은 돈을 그대로 가져와 기자회견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발언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신용호는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돌아가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순식간에 나의 결백이 증명되고 있었다.
결백하지 않은 나의 결백이.
신용호는 사건에 대해 전후사정을 정리해서 깔끔히 밝히고 다시금 호소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때 최서준이 그 친구는 이제 막 서울로 올라온 햇병아리 검사였습니다. 재벌 그룹이 그런 신참한테 돈을 줬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이미 자리를 잡아서 연줄이 있던 저를 통해서 안전하게 터뜨리기 위해 저에게 뇌물을 줬던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최서준 부장을 음해하기 위해 100억 원대 뇌물 수수 혐의라느니, 뭐니 그런 모함을 하니까 제가 답답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검사를 해 먹다가 잘렸던 제가 어떻게 지금 주옥그룹의 법무팀에서 당당하게 일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러자, 익숙한 뒤통수의 기자 하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WK일보의 박수형 기자.
그가 질문했다는 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것일 터.
-그렇다면 왜 최서준 검사님은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던 건가요?
-저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그런 걸 겁니다.
그는 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그놈을 이용해 먹고 돈을 은닉할 때, 그 녀석의 흔적이 드러나도록 몰래 세탁 과정까지 거쳤습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챘겠지만, 이 못난 놈을 친구라고 생각해서 지켜 주기 위해 차마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대로 있다가는 최서준 그 친구가 완전히 덤터기를 쓸 것 같아서…….
신용호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이 쓰레기 같은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 친구에게 미안해서라도 그 녀석을 지켜 주기 위해서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그 의리를 위해서 바닥까지 내려갈 생각이었던 것 같아서요.
이번엔 정치1번지의 임유나 기자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러면 최서준 부장님은 그 뇌물 수수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건가요?
신용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 모든 뇌물 수수는 제가 했고, 최서준 부장은 친구를 잘못 둔 죄로. 아니, 그 친구에 대한 의리가 깊은 죄로 이러한 의심과 음해 속에서 견디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주옥그룹 비서실의 공효익이라는 비서분께 10억 원을 전달받았습니다. 이게 주옥그룹 위에서 전달해 온 건지, 공효익 씨가 자체적으로 실천한 건지는 제가 알 수 없으나 돈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죗값을 치를 것이며 저는 성실히 조사에 임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순식간에 플래시가 터지며 셔터 음이 돌아갔다.
그는 미리 준비했지만, 준비하지 않은 것처럼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찰 출신이었던 제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언론에 인터뷰를 한 제보자 이홍재 씨가 오히려 돈을 받고 거짓 증언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면 조금 더 투명한 결과를 낼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가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순식간에 범죄자가 되어 버린 그에게 이러한 발언은 적절치 않았다.
다만, 그가 했던 일련의 발언들은 신용호라는 인물을 주옥그룹에서 뇌물을 받을 정도로 능력 있는 검사 출신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신용호의 발언은 충분히 국민들에게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감찰부에 자수를 하러 가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신용호는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역전(逆轉).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독사 강중식 부장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역전(力戰)을 해도 판을 뒤집지 못했지만, 신용호의 등장 한 번으로 판도가 180도 뒤집어졌다.
내가 뇌물 수수범이라는 더러운 이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모자라,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의리남으로 둔갑시켜 주었다.
신용호, 이 미친놈.
박수형 기자와 임유나 기자까지 포함된 것도 모자라,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보면, 제3자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며칠 전 윤설하와 통화할 때 그녀가 말했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 볼게요.’
이거 설마 윤설하가 설계한 건가?
이 시나리오를?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내 주변 사람에 대해 빠삭하게 알면서 이러한 시나리오를 그릴 만한 능력자는 없으니까.
100퍼센트 윤설하다.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고마움과 감동이 피어올랐지만, 동시에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는 신용호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젠장.
신용호한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일단 윤설하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들어 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찰나.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이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바로 귀에 가져다 댔다.
“야, 이 미친놈아.”
-어이, 우리 의리남 최서준 부장님!
신용호는 너스레를 떨며 전화를 받았다.
-내가 보낸 영상 편지는 잘 받았나 모르겠네.
“잘 받다 못해서 이해가 안 될 지경이다. 이러면 너 골로 가는 거야. 알고 있는 거야?”
-야, 내가 얼마 전에 우정에 관한 영화를 봤거든.
이 자식,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가면 X나 멋있잖아. 안 그러냐?
“너 정신 나갔어?”
-똥물도 한번 뒤집어쓴 놈이 맛깔나게 뒤집어쓰는 거야.
신용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폐인 되어서 자살할까 말까 고민하던 걸 구해 준 게 바로 너다. 나 무너뜨린 놈들한테 복수해 주고 지금처럼 멀쩡한 삶 살게 해 준 게 바로 너라고. 그런데 내가 너 위해서 한 몸 희생 못 하겠냐?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그러나 입에서는 차마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진짜 또라이 새끼야, 넌.”
-너 아니었으면 난 이 세상에 이미 없어. 네가 살아야 나도 사는 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넉살을 떠는 그의 모습에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자식아, 너는…….”
-야, 까놓고 말해서 나도 임성진 사건 때부터 감방 들어가야 되는데, 네 덕분에 실형 안 받고 살아 있던 거잖아. 지금 들어가는 거지.
“너 지금 집행 유예기간이야. 이렇게 되면 너 가중처벌이라고.”
-알지, 인마. 근데 내 친구가 대통령이랑 절친인 건 아냐?
그의 진실 섞인 헛소리에 나오던 눈물이 들어가고 오히려 헛웃음이 터져 버렸다.
“내가 너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 믿고 들어가는 거니까 빨리 빼 낼 생각이나 해라.
“그래, 이 자식아.”
-서준아.
그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너는 늘 빛만 쬐면서 살아라. 어둠 속에 갇히는 건 나 하나로 족해.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는데 이런 망나니 자식 때문에 내 옆으로 떨어지려고 그래?
“……고맙다.”
-아, 이 자식아. 갑자기 센치해지지 말고. 나는 남자 위로하는 건 딱 질색이다.
나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 친구 팔아서 살아났는데 빛을 쬐는 게 아니라, 광원까지 찾아가야지.”
-그거 좋네.
그는 감탄을 흘리며 말했다.
-옛날부터 말발 하나는 죽였다니까.
“지금 네 말 때문에 내 감동도 사라질 판이다.”
-감동하지 마, 인마.
그는 곧바로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친구 팔아서 살아남았다는 소리도 하지 말고. 네가 내 목숨 구해 준 거에 비하면 이건 별거 아니니까. 정말로 난 아직도 너한테 고맙다. 이렇게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게 행복하고 감사하니까.
신용호는 말해 놓고도 민망한지, 곧바로 가벼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남자의 뜨거운 우정. 이런 거라는 거지.
“됐어, 새끼야. 꼭 말해 놓고 뒤에 분위기에 초를 쳐요.”
헛웃음을 흘리자, 그가 큭큭거리며 내게 말했다.
-야,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어쩌라고.”
-털 나면 지유 씨가 슬퍼할 것 아니야?
“됐다. 빨리 감찰부 들어가기나 해라.”
-안 그래도 지금 가고 있다. 생방송이라도 딜레이가 있어서 10분 뒤에 방송된다더라. 난 이미 고검 주차장 들어가고 있어.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참고로 수사는 현성이한테 받기로 이미 이야기 다 해 놨어. 네가 도와줄 필요 없으니까 걱정 마라.
송현성 부부장검사.
나와 신용호 송현성까지 셋 모두 대학 동기였던 데다가, 이미 이야기까지 되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터.
-내일 첫 비행기 타고 서울 와서 출근할 준비나 해라.
“그래, 진짜 고맙다.”
-오글거리는 소리하지 말고 옆에 지유 씨 챙겨 줘. 많이 놀랐을 테니까.
“그럴게.”
-그리고 윤설하 수사관한테도 넌 진짜 만나자마자 절 한번 올려. 그분이 모두 설득하고 판 만든 거니까.
역시나 그랬던 모양.
“알았다. 들어가라.”
-그래, 마음 편히 쉬고.
“……다시 한번 정말로 고맙다.”
-끊어,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신용호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