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6)
“아, 그러셨군요.”
강중식 부장은 진지하게 공감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라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전화로 제보한 이홍재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강중식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홍재에게 동감의 뜻을 표하고 있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그가 회사 내에서 겪었던 일들.
워낙 커다란 회사이기도 하고, 부서가 부서인 만큼 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보니,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까다로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과정에서 이홍재는 뭐든지 척척 해내는 우수한 사원이 아니라, 실수를 일삼는 문제 사원이었다.
들어가는 것까지야 고향 선배의 인맥을 통해 어떻게든 들어왔으나, 그 안에서 살아남는 건 온전히 그의 역량.
그런데 그는 경호원으로 있으면서 짧은 기간에 큼지막한 실수를 몇 개나 저질렀다. 폭행을 당한 건 아니었으나, 그 많은 실수로 인해 인격을 모독하는 폭언이 쏟아졌고, 그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사실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개 민간인인 그가 주옥그룹에 대해 불만을 드러낼 수 있는 건 불매운동이 전부.
그러던 도중, 뉴스와 신문에서 자신이 아는 일에 대한 사건이 나오자,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복수할 생각으로 공안부에 제보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전화를 강중식 부장이 직접 받은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강중식 부장은 솔직한 마음으로는 주옥그룹과 같은 재벌그룹의 경호실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까이는 건 당연히 그 인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홍재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유일한 구원이었으니까.
“그런 놈들은 호되게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홍재는 그저 강중식 부장이 겉으로 하는 달콤한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홍재 씨의 제보가 주옥그룹 녀석들을 골탕 먹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예. 전화로 말씀하셨던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으면 하는데…….”
“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정확한 날짜는…….”
그는 직접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근무했을 때 적어 놓은 업무 일지까지 이곳에 가지고 나왔기에 틀리지 않았을 터.
“그날, 외제차에 사과 박스가 들어갈 곳이 없을 정도로 꽉꽉 집어넣었거든요. 트렁크는 물론이고 뒷좌석과 조수석까지 가득 채워서…… 진짜 운전하는데 방해될 정도로 꽉 차 있었거든요.”
“액수는 대략적으로 기억나십니까?”
“사과 박스 열 개였으니까…… 엄청 많지 않을까요?”
강중식 부장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5만 원 권으로 사과 박스 하나에 가득 채울 정도로 돈을 넣으면 대략 12억.
그 박스가 열 개라면 무려 120억이다.
막연하게 100억 원대 뇌물을 수수했다는 건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 큰돈을 날름 받아 챙기고 그렇게 깨끗한 검사 코스프레를 했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홍재는 기억을 되짚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그건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는 업무 일지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 돈을 실어 주고 며칠 뒤에 바로 그 검사가 이철기 부회장한테 12억을 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하더라고요.”
“그러면 이철기에게 받은 돈을 밝히는 조건으로 대가성으로 그 돈을 받은 건가요?”
“제 추측엔 그렇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대가성이 아니라, 최서준이 선물한 것이었지만, 강중식 부장이 끼워 맞춘다면 충분히 앞뒤가 맞아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강중식 부장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치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 말, 법정에서도 증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법정에서요?”
법정이라는 말에 이홍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거는 조금…….”
“무슨 문제가 있나요?”
“혹시 보복을 당하진 않을까 해서…….”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중식 부장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저희가 확실하게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보자 이홍재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미 승기를 잡은 강중식 부장은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은 무엇에 넘어오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법정에 서 주시면 제가 감사의 의미로 소정의 사례금을 지급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이홍재의 눈빛이 반짝였다.
“사례금요?”
“예.”
강중식 부장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공식적인 사례금은 아니고, 제가 감사해서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흠흠, 그렇다면…….”
순식간에 동의하는 태도로 바뀐 이홍재는 음흉한 눈빛을 뜨며 물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나 주시는지…….”
“3천 드리죠.”
3천만 원이라는 큰돈에 이홍재의 눈이 반짝였다.
20대 후반에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3천이라는 돈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반응을 보고 무조건 동의할 것을 알아챈 강중식 부장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런데 제가 마음 같아서는 더 챙겨 드리고 싶은데…….”
“어휴, 아닙니다. 저도 이 정도면 엄청나요.”
그러나 강중식 부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자극적이게 발언을 해 주시면 1억 드리죠.”
“1억요?”
이홍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1억.
그 대기업이라는 주옥그룹의 경호팀에서도 신입이었던 그는 연봉 1억을 꿈도 꾸지 못했다.
물론, 다른 이들은 비서실장에게서 용돈을 받고는 했지만, 늘 사고만 치는 이홍재는 그걸 받을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강중식 부장이 제시한 1억은 이홍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가 넘어왔다는 건 강중식 부장이 알아채기에 충분했다.
그는 엉큼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돈을 받는 걸 보셨다고 발언하시는 겁니다.”
“……네?”
“사과 박스를 받는 걸 목격하셨다고 했잖아요. 사실은 그 안에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들어 있는 걸 보셨다고 하시는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아 다르고 어 다른 수준이지만, 그걸로 1억을 드리는 겁니다.”
이미 1억에 눈이 돌아간 이홍재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언론사와 인터뷰할 때도 살짝…….”
“알겠습니다. 어려운 건 아니니까요.”
“좋습니다.”
강중식 부장은 아주 만족스럽게 그에게 손을 뻗어 맞잡았다.
“아주 재미있게 사건이 해결될 것 같군요.”
***
정확한 날짜를 들은 덕분에 막막하던 조사는 순식간에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감찰부에서는 크게 수사 협조를 해 주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권한을 얻은 것만으로도 최서준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행적을 합법적으로 아주 빠르게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강중식 부장은 제보를 받은 지 정확히 사흘이 되는 날.
최서준의 차명 계좌에 숨겨진 10억.
120억 중 나머지 110억의 행방은 찾을 수 없지만, 10억은 고스란히 통장에 남아 있는 걸 확인했다.
돈의 세탁 과정까지 아주 완벽하게.
그 외의 돈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최서준의 목을 날리기엔 10억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점점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제보자였던 이홍재가 며칠 전에 자신이 요구한 대로 트루미디어와 인터뷰까지 한 덕분에 국민들 사이에서 최서준의 뇌물 수수 혐의는 확정이 된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무슨 카드를 준비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최서준이라도 이미 이 지경이 되어 버린 언론을 한 번에 뒤집기는 힘들 터.
‘아니면 아예 카드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걸지도.’
강중식 부장은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렸다.
경호원의 증언과 자신의 증거 두 개면 최서준은 빠져나갈 수 없다.
스타 검사로 불리며 최연소 기록들을 써 나가던 그의 장렬한 최후를 눈앞에 뒀다.
“부장님.”
“어, 왜?”
부하검사 하나가 눈빛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최서준 부장이 오늘 병가로 출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
순식간에 강중식 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건 완벽하다.
무너지는 공무원의 전형적인 절차.
최서준의 끝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직감이 피어올랐다.
‘울며 겨자 먹는다는 생각으로 언론에 터뜨렸는데 이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될 줄이야.’
박재필 고검장에게 까여서 옷을 벗을 생각까지 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야.’
몇 번이나 최서준에게 당했지만, 결국에 살아남는 건 자신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 천하의 최서준을 무너뜨리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 강중식 부장은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가장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희 애들 말로는 경호실에서 그 사과 박스 내용물을 볼 수가 없는 터라…… 아마 망상으로 발언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망상이든 아니든 간에 진짜잖아요.”
답답함에 소리를 터뜨렸다.
“그렇다고 돈이 없고 딴 거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요.”
그랬다가는 사과 박스를 받은 사실을 인정하는 게 되어 버릴 터.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려 버렸다.
“회장님, 이거 밝혀지면 저만 X되는 게 아니라, 회장님도 같이 죽는 겁니다. 알고 계시는 거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검사님을 구해 드리려고 어떻게든 저도 열심히 뛰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아…….”
짙은 한숨을 내뱉었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철용 회장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조심스럽게 다른 말을 꺼냈다.
-일단 조금 쉬시지요. 제가 강원도 쪽에 별장 하나가 있는데 거기서 며칠 정도 쉬면서 머리 식히시고…….
“안 그래도 지금 제주도에 와 있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한지유의 별장.
슬슬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뇌물 수수범으로 확정하고 검찰청과 집 앞까지 기자가 몰려든 상황이라서 집에 있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그 나간 놈들 입단속 잘하라고 몇 번을…….”
열이 나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벽을 쾅 내려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건 전부 그 제보자 한 놈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철용 회장도 연신 사과하고 있었지만, 이홍재라는 놈이 이미 강중식 부장에게 붙었던지라, 방법이 없었다.
-제가 더 상황을 파악해 보고 대처 방안 찾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나 그렇다고 이홍재라는 놈한테 먼저 접근하진 마십시오. 잘못하다가는 그것까지 녹음되어서 터지면 정말 박살 납니다.”
-예. 저도 생각 없이 움직이진 않습니다.
“또 연락하시죠.”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후우.”
기사가 터진 지 며칠이 지났지만 수십 번이나 했던 기자회견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의심은 점점 더 커져 갔고, 강중식 부장이 점차 뻗어 오는 마수에 대한 초조함이 커져만 갔다.
마른세수를 몇 번이나 하자, 한지유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오빠, 밥이라도 먹어. 지금 이틀째 오빠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미안해, 지유야.”
미안함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뇌물 수수범으로 몰리면서 자연스레 여자 친구인 한지유에게까지 시민들의 돌팔매질이 이어졌으니까.
그 덕분에 그녀는 잘 찍고 있던 영화 촬영까지 잠정 중단하며 나와 함께 제주도로 도피한 상황.
그러나 한지유는 한 번도 내 탓을 하거나,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날 챙겨 주고 위로해 줄 뿐.
“아니야, 뭐가 미안해.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그녀는 내 등을 쓸며 말을 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오빠 믿어. 무슨 일 있더라도 걱정하지 마. 내가 오빠 먹여 살리면 되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데 어찌 그녀에게 고맙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남자로서 의지가 되어 주기는커녕, 여자 친구에게 위로나 받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참담한 심정에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하얀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펑펑 내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지나갔던 그 어느 겨울보다도 추운 겨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