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 (6)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공석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온더록스 잔에 다시금 위스키 잔을 부었다.
“검사님, 더 드시면 정말로 위험하십니다.”
그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내게서 위스키병을 가져갔다.
“지금 바로 장인어른께 전화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그시 그를 쳐다보자, 그는 휴대폰을 꺼내며 호소했다.
“정말입니다.”
그는 테이블 밑에 있던 재떨이까지 꺼내 올렸다.
“담배 한 대만 태우고 계십시오. 금방 연락하고 오겠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황급히 황철용 의원에게 전화를 걸며 한쪽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공석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순식간에 술기운이 확 몰려왔다.
다른 술도 아니고 40도짜리 위스키를 그 큰 온더록스 잔에, 그것도 얼음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셨으니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 게 이상할 테지.
꽤나 큰 크기의 잔이니, 한 350ml에서 400ml 정도.
그러나 취할 수는 없는 노릇.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취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감싸며 약간이나마 술기운을 날려 주었다.
공석민은 충분히 알아먹은 것 같으니, 이제 남은 건 황철용.
그의 성격상 늦은 시간이라도 당장 이곳으로 뛰어올 것이다.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오지 않을 이가 없겠지.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렸다가 내가 최규현에게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는 대권 주자로 누가 나서든 간에 상관없이 최규현 선에서 정리가 되고 말 테니까.
담뱃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 순간 피잉- 머리가 돌며 순식간에 취기가 올라왔다.
젠장.
너무 오버했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숙취 해소 음료라도 사 오는 건데.
그러나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되돌릴 수 없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취기가 올라오는 건 막을 수는 없더라도, 술기운에 완전히 잠식당하지만 않으면 된다.
한 모금만 피웠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뜨리자, 방문이 열리며 공석민 사장이 돌아왔다.
“검사님, 지금 장인어른께서 이곳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15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죠.”
15분.
지금 컨디션으로 보면 그 안에 취기가 돌지도 모르겠는데.
문제는 황철용 의원이 온 뒤다.
그가 온 뒤에도 이 정신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최대한 짧고 빠르게 이야기를 끝내야 했기에 머릿속으로 그와의 대화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정신을 부여잡고 집중을 한 탓일까, 미간이 구겨진 덕분에 공석민 사장은 내 눈치를 보느라 말도 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한 채 옆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정확히 15분이 지난 시각.
황철용 의원이 이곳에 도착했다.
가벼운 의상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집에서 급한 대로 아무거나 입고 뛰쳐나온 모양.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어, 최 부장.”
그는 미안한 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사위가 말하는 게 서툴러서 실수한 것 같아. 이해 좀 해 줘.”
“의원님이 직접 오셨으니 이제 괜찮습니다.”
입을 열며 대화를 시작하니 다시금 취기가 뻗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눈을 부릅뜬 순간, 황철용 의원이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 행동을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그것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공 사장님이랑 서론은 많이 이야기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나는 한쪽 팔을 무릎에 올리며 상체를 기울였다.
“누구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줄 수 있는가?”
“말씀하십시오.”
“오늘 어떤 대화가 오가든 간에 총리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걸로.”
취기가 올라온 탓인지, 나는 조금 더 과감해졌다.
“생각은 해 보죠.”
그는 난색을 표했지만, 대책은 없었다.
이미 이 상황에서 주도권은 나한테 있었으니까.
“자네도 혹시 따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은 있나?”
누가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랄까 봐, 황철용 의원도 내 대답을 먼저 들으려 한다.
나는 정색하며 다시 말했다.
“누구를 생각하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제야 황철용 의원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민국당의 경동수를 생각하고 있네.”
경동수.
민국당 내에서 찍은 인물.
당내의 주요 인물들이 선택한 것이니, 황철용 의원도 그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것이겠지.
얼근하게 취기가 오른 탓일까, 평소보다 과감하게 질렀다.
“그래서 저한테 어떤 제안을 하시려고 이 자리에 부르신 겁니까?”
술기운이 오른 탓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황철용 의원이나 공석민 사장도 어느 정도 분위기 파악은 했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눈만은 부릅뜨고 있는 상태.
아직 알코올에 잠식되지는 않았다.
황철용 의원은 잠깐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함께 경동수와 손을 잡도록 하지.”
“최규현 국무총리님을 배신하고 말입니까?”
“배신이라기엔 어감이 조금 위험하지만, 100% 틀린 말은 아니지.”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양쪽으로 발을 걸치고 싶네. 우리 라인을 버리고 싶지도 않지만, 여기서 총리님 말씀대로 대한당 남문석이만 지지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엔 민국당에서의 내 위치가 너무 위태로워져.”
나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각 그대로를 내뱉었다.
“그 말씀은, 총리님 몰래 경동수를 대통령에 당선되게 하도록 은밀하게 돕겠다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크흠.”
적나라하게 그의 의도를 드러내자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맞네.”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이들이 먼저 접근하지 않아도 나 또한 경동수에게 붙으려고 생각을 했던 터.
그러나 그 사실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황철용 의원과 공석민 사장은, 내가 그들을 위협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게 접근한 것.
굳이 내 속내를 알려 줘서 그들과 똑같은 위치에 설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돕고 나면 어떤 결과가 떨어집니까?”
무언가 말하려는 공석민을 향해 먼저 손을 들어 한마디 했다.
“아,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이번 건은 돈과 관련이 없습니다.”
입을 열려던 공석민이 입을 닫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황철용 의원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가 이쪽으로 발을 걸쳐 주기만 한다면, 경동수가 대통령이 되어도 최 부장을 잊지 않을 걸세.”
“그거야 당연하죠.”
나는 다리를 꼬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경동수가 아니라, 황 의원님께서 뭘 해 주실 수 있냐고 물어본 겁니다.”
그 말에 황철용 의원은 한 방 먹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도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진중한 말투로 제안했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든 간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내 의원직을 걸고서라도 자네를 돕도록 하지.”
“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발 벗고 나서 주신다는 거네요.”
“그렇지.”
“흐음.”
나는 장난기를 머금고 물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언약 하나로 퉁 치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번만큼은 황철용 의원도 지지 않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바닥이 원래 그런 바닥이지 않은가?”
아주 속물적이다.
그래서 더 좋다.
어차피 이번 건이 실패하면 그도 위태위태해지기에, 무언가 확실한 보답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
그가 건재하고 내가 건재하다면, 이 약속은 반드시 이행될 터.
최서준이라는 인간이 무너질 일은 없으니 황철용 의원에게 언젠가 한 번은 도움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좋습니다.”
“그래, 최 부장.”
그는 흡족하게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최 부장은 이렇게 쿨해서 좋다니까.”
“일단 저는 개인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자료가 구해지면 의원님을 통해서 경동수에게 넘기는 걸로 준비할 테고요.”
“좋네. 그러면 나는 당내 상황에 특이점이 생기는 대로 연락해 줌세.”
“알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끝낸 탓일까, 긴장이 풀리며 순식간에 머릿속을 알코올의 기운이 잠식하기 시작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침을 삼켰다.
여기서 취하면 안 된다.
휘청거릴 듯한 몸을 가누며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 천천히 공석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공 사장님.”
“예?”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그는 깜짝 놀라며 날 돌아보았다.
“대리 좀 불러 주시죠. 이대로 가면 내일 신문 기사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나올 것 같네요.”
“네, 바로 부르겠습니다.”
그때, 황철용 의원이 손을 저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김 기사 부를 테니까 타고 가. 그게 편하지 않겠어?”
“아닙니다. 대리가 편할 것 같습니다.”
그의 개인 기사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공석민이 전화를 하는 사이, 조금이라도 술을 깨기 위해 온더록스 잔에 냉수를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나 여전히 입에 감도는 위스키의 향내.
아, 젠장.
위스키를 따른 잔에 남은 여향이었구나.
“그나저나 최 부장은…….”
황철용 의원이 나를 부르며 무언가 이야기를 했지만, 취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마디 하다가 이내 넉살스레 껄껄 웃는 걸 보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던 모양.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공석민이 다가왔다.
“대리운전 기사가 마침 이 근처에 있어서 3분 안에 도착한답니다. 바로 내려가시죠.”
“예.”
나는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공석민과 황철용은 날 배웅하러 나오려는 태세.
일부러 눈을 또렷하게 뜨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며 말했다.
“혼자 가겠습니다. 나오지 마십시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나중에 뵙죠.”
미간에 힘을 준 탓일까, 그들은 두 번 묻지 않고 물러났다.
나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고, 오래지 않아 대리 기사와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집 주소를 일러 주고 뒷좌석에 타는 순간.
긴장이 완전히 풀리며 술기운에 잠식되었다.
거기까지가 내 기억 속 마지막 필름이었다.
***
정신이 든 건 다음 날, 침대에서였다.
분명 대리 기사가 운전하는 차에 탄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그 뒤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
혹시나 해서 몸을 살폈지만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던 모양.
안심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해서 필름까지 끊길 정도였지만, 머리가 아픈 숙취는 전혀 없었다.
역시 양주의 위력인가.
그래도 빈속에 알코올을 들이부은 탓에 속이 쓰린 감이 없지 않았기에 적당히 라면 봉지를 뜯었다.
라면 한 봉지를 끓여 와 거실에서 TV를 켰다.
그리고 화면을 보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뉴스 속보입니다. 민국당 경동수 후보가 자식들을 위장 전입시키고, 특목고에 특례로 입학을 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경동수 후보의 두 아들은 A과학고와 S외고에 재학 중인 상태이며…….
경동수를 헐뜯는 기사라.
민국당의 도준철 후보일까 생각을 해 봤지만, 그의 하나뿐인 딸은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 상태.
이런 기사가 터지면 오히려 도준철에게 터지는 역풍 또한 작지 않을 터.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최규현.
최규현 국무총리 이 인간이 벌써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