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 (4)
“개인적으로 우리 최 검사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어때, 한번 해 보겠어?”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역시 최규현 국무총리.
이 바닥에서 끝판왕이 되기 직전인 그는 노련하게도 어떤 일인지 설명하기보다는 할지, 하지 않을지에 대해 먼저 물어봤다.
일의 수행 여부보다 자신의 손을 잡을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크게 한번 도움을 받았기에, 이번만큼은 최규현과 함께 가기로 한참 전부터 결정을 내린 상황.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최규현 국무총리는 만족스러운 듯이 입꼬리를 휘었다.
“민국당에서는 아마도 경동수가 올라올 거야.”
“현 서울시장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놈이 이번에 서울시장을 사퇴하고 대선 판에 뛰어들 거란 말이지.”
경동수.
아직 팔팔한 50대 초반의 인물.
올해 쉰셋이라고 들었다.
정치판에서 50대 초반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 수준으로 취급당하는 게 일반적인 일.
최규현 국무총리는 그 어린 녀석이 대선에 출마한다는 게 불만인 듯 말을 이었다.
“민국당에서 이번에는 기필코 여당이 되려고, 혁신이니 개혁이니 뭐니 하면서 아직 베이비파우더 냄새도 안 가신 놈을 출마시키려는 것 같아.”
“경동수는 당내 경선에서 걸러지지 않겠습니까?”
“아니, 황철용 의원이랑 이야기를 해 보니까 당 자체에서 경동수를 밀어주는 것 같아. 아마 경동수가 무조건적으로 민국당 대표로 출마할 거야.”
당 자체에서 밀어준다면 더 두고 볼 것도 없다.
어쩐지 탄핵 소추안이 가결될 즈음부터 서울시장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다 싶더니,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
“대충 보면, 젊은 피를 수혈해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자는 그런 뉘앙스로 달릴 것 같더라고.”
상당히 위협적인 선거 전략이다.
안 그래도 SNS가 선거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젊은이들이 투표의 핵심으로 대두한 지금, ‘젊음’과 ‘소통’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테니까.
게다가 이번에 탄핵당한 권재철에게서 국민이 마음을 돌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고집’이었다는 사실이 젊은 경동수에게 힘을 실어 줄 수밖에 없을 테지.
게다가 그에 정반대로 대한당의 대표로 출마할 남문석은 올해 나이가 68세.
무려 열다섯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난다.
세대 차와 젊음을 공격 카드로 내민다면, 이쪽은 필시 노련함과 경험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이미 경동수는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를 역임한 만큼, 그러한 경험으로는 쉽게 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 대선, 절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쉽지 않은 수준을 넘어서 불가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점에 미래 문자라도 와서 힌트를 주면 바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으나, 최근 몇 달간은 깜깜무소식이라 문자에 기댈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면, 결론은 하나.
우리가 밀고 있는 남문석을 무조건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수밖에.
그래야 나도 살고 최규현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최규현 국무총리는 나를 부른 것일 터.
그는 양손의 손가락 끝을 맞붙이며 내게 말했다.
“최 검사.”
“예.”
“경동수의 약점.”
최규현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필요해.”
“알겠습니다.”
토 달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모습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래서 최서준 검사를 좋아한다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편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차피 무슨 자료를 가져오든 간에, 경동수는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거야. 민국당 전체가 뒤를 봐주고 있는 이상 그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해.”
“최대한 크게 흔들 수 있는 건으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최규현 국무총리는 자신의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잘 부탁해.”
“맡겨 주십시오.”
“그래. 기대하지.”
내가 와인 잔을 따라 들자, 그는 자신의 잔으로 가볍게 내 와인 잔과 부딪쳤다.
챙- 하며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막이 호텔 룸에 퍼졌다.
***
“하아.”
황철용 의원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최규현 국무총리가 낮은 확률로 대한당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이렇게 처음부터 민국당을 거르고 대한당을 선택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까.
“괜찮으십니까, 의원님?”
같은 민국당 김문조 의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대선 때문에 그렇지, 뭐.”
황철용 의원의 말에 김문조 의원은 슬쩍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이거 아무래도 대선에서 승리가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총리님께서 결정하신 건이니까.”
김문조는 불만이라는 듯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민국당 소속인 데다가 민국당의 승리가 점쳐지는데도 대한당을 응원해야 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네요.”
게다가 황철용은 민국당의 원내대표인 인물.
그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암만 대한당 내에서 권재철을 포기했다고 한들, 권재철이 대한당 소속이었던 탓에 국민들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대한당을 선택하신 데는 이유가 있겠지.”
황철용 의원은 은근히 최규현 국무총리를 돌려서 깠다.
그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이었다는 뜻.
김문조도 한탄을 뱉으며 동의를 표했다.
“정말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면, 설명이라도 해 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때, 황철용 의원의 사위 공석민이 다가왔다.
“장인어른, 괜찮으십니까?”
한울 투자증권의 사장으로 있는 공석민.
“어, 공 서방.”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비 사위였던 그는, 두 달 전 결혼을 통해 정식으로 가족이 된 만큼 라인에서도 어느 정도 기세가 오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주변에 있던 김문조 의원은 자연스레 그에게 밀려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장인어른과 사위는 은밀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장인어른은 이대로 최규현을 따르려고 하십니까?”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켜보다가 민국당 쪽으로도 발을 걸쳐야 될 거야. 이거 최규현 총리만 믿고 있다가는 원내대표직까지 뺏기게 생겼어.”
“허어…….”
공석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문득 조금 전에 스쳐 지나갔던 사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차라리 제가 한번 최서준 검사를 만나 볼까요?”
이전에 한울 투자증권의 주가조작 사건으로 한번 엮였던 적이 있기에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공석민의 생각으로는, 그가 나서 준다면 1번 라인은 패배하더라도 자신들의 활로는 찾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황철용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최서준은 최규현이 점찍어 놓은 카드야.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오히려 최규현한테 찍힐 수도 있어.”
공석민은 음흉하게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면 섣불리 접근하지 않고 신중히 접근하면 되겠네요.”
황철용 의원은 날카롭게 눈을 떴다.
“할 수 있겠어?”
이제 막 황철용 의원과 같은 집안사람이 되어서 한창 기세가 오른 덕분인지, 공석민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뿜어냈다.
“자연스럽게 운이라도 한번 떼어 보겠습니다.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죠.”
황철용 의원은 고민하느라 사위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뿜어낸다는 것도 모르고 깊이 고민에 잠겼다.
최서준이 만약 자신들을 돕는다면, 민국당에 발을 걸치기는 훨씬 더 수월해질 터.
그의 이름값은 둘째 치고, 실력 하나만큼은 업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이번 선거에서 1번 라인이 패배하더라도 자신은 원내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지.’
결론을 내린 그는 주변을 살피며 사위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그러면 한번 만나서 간만 슬쩍 봐 봐. 최규현에게 올인하는 건지, 아니면 양쪽으로 발을 걸칠 생각이 있는지.”
그는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최서준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건 원치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
대선 날짜가 확정되며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아니지만, 그런 건 꼼수로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이에 따라 중앙지검도 같이 분주해졌다.
나처럼 라인에 속하지 못한 인물들은 각자의 활로를 찾기 위해 어느 쪽으로 붙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고 줄을 서야 했으니까.
나 또한 이두형과 함께 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장님은 선택하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대한당의 남문석 후보.”
“대한당요?”
이두형 부부장검사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재철이 탄핵되면서 대한당의 이미지 자체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그렇게 됐어.”
최규현 국무총리의 결정에 적지 않은 의문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가 대한당 소속이라고 해도, 소속 당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민국당의 후보를 선택해서 2번 라인과 경쟁하는 게 옳다고 봤으니까.
경동수가 아닌 다른 이를 밀다가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더라도, 무소속 지원자를 지원한다든지 당을 옮기는 등의 방법이 있기도 하고, 그때 가서 대한당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오히려 위기의 대한당에서는 반기면 반겼지 거부할 리는 없었으니까.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내 입장에서는 아직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지잉, 지잉.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잠깐만.”
“예.”
이두형 부부장을 뒤로하고 꺼낸 휴대폰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몇 달 만에 받는 미래 문자!
피어나는 웃음을 겨우 감추고 문자를 읽어 나갔다.
-보낸 이 : 37
-대한민국 21대 대선. 대한당 최종 후보 최규현.
아!
그래, 이걸 그리고 있었구나.
현재는 대통령의 권한대행이라서 대선에서 제외된다고 해도, 그가 이것으로 정치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미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위기에서도 대한당에 남은 의리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 점을 이용해서 차기 대선에 대한당의 이름을 달고 나서서 대권에 도전하려는 것일 테지.
이제야 최규현 국무총리의 모든 속셈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이런 상황에서 위기의 대한당에 붙은 이유가 있었어.
“혹시 좋은 소식입니까?”
이두형 부부장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 괜찮은 소식이지.”
최규현의 목적이 당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남문석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할 게 아니라 최규현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양쪽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경동수든 남문석이든,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더라도 나와 함께 갈 수 있도록.
“이 부부장.”
“예.”
“민국당의 경동수가 흔들릴 수 있을 만한 건수를 준비해.”
이두형 부부장검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너뜨릴 건이 아니고, 흔들릴 만한 건요?”
“그래.”
나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속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겉으로 빵빵 터뜨릴 수 있고 효과가 많이 보이는 건들 말이야.”
“그 말씀은…….”
이두형 부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있을 만한 건으로 준비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그에게 간단히 속내를 말해 주었다.
“우리가 제대로 일하고 있구나, 이걸 알 수 있도록 말이야. 빛 좋은 개살구, 허울만 좋은 건이라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는 이해했다는 듯 굳게 끄덕였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남문석을 흔들 만한 자료를 찾아볼 테니까.”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이두형 부부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문자 때문에 계획이 바뀌신 겁니까?”
“그래.”
나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렸다.
“누가 당선이 되든지,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는 걸 넘어서 개국공신이 되는 거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미래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