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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 출세하신다!-87화 (87/341)

잠식 (2)

“예, 지금 입구에 도착했는데 철문이 잠겨 있어서요.”

-그 옆에 보시면 쪽문 열려 있는데 그쪽으로 들어오시면 되거든요.

“제가 차를 가져와 가지고…….”

-아, 그러셨구나. 알았으면 진즉에 열어 뒀을 텐데 죄송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네, 천천히 나오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과의 전화를 끊고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핸들을 두드렸다.

지금 있는 곳은 소망원 앞.

서기웅 검사장의 부인이 운영하는 보육원이다.

혹시나 윤설하가 전화를 하면 내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될까 봐 싶어 내가 직접 전화까지 해서 약속을 잡고 왔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저 멀리서 여직원 하나가 후다닥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고, 나는 곧장 차에서 내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많이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 그 검사님 맞으시죠?”

일단 시작은 좋다.

여직원이 알아본다는 것은 원장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니까.

“아, 네.”

나는 머쓱한 척 적당히 대답했다.

“와아…….”

그녀는 감탄사를 내며 자물쇠로 잠겨 있는 철문을 열어 길을 열어 준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건물 뒤쪽으로 가시면 주차장 있거든요. 거기에 대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바로 여직원이 가리킨 곳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를 끝내고 차에서 내려 슬쩍 건물 주변을 살피자, 확실히 보육원이 과포화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올려다본 베란다에는 건조대가 다닥다닥하니 붙은 채 빨래가 걸려 있었고, 신발장에도 신발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었으니까.

그사이 다가온 여직원이 친절하게 나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녀는 곧장 나를 원장실로 데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고상한 분위기의 여성이 일어나며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원장 이영미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서준입니다.”

나를 본 그녀의 눈빛에서 놀라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굳이 여직원이 일러 주지 않아도 알아챈 모양.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눈을 반달처럼 휘며 물었다.

“특수부 최서준 부장님 맞으시죠?”

스타트 좋고.

내가 특수부 검사라는 걸 은근슬쩍 밝히는 수고는 덜었다.

“아, 네. 맞습니다.”

“남편이랑 TV로 많이 봤어요.”

“영광입니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차를 준비해 준 여직원이 나간 뒤에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텄다.

“들어올 때 보니까 원생들이 꽤 많은 것 같던데요.”

“아, 이번에 새로운 아이들이 많이 들어와서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저희도 정신이 없답니다. 오늘 아침엔 직원분이 늦잠을 주무셔서 완전 전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단어 자체는 고급 어휘가 아니었지만, 말을 섞을수록 그녀의 말에서 기품이 느껴진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보통 보육원의 원장이라고 하면 학교 선생님에 가까운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이 여자는 오히려 부잣집 사모님에 가깝달까.

청렴한 서기웅 검사장의 부인으로 아주 완벽하다는 느낌.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친한 고등학교 동창 중에 보육원에서 자란 친구가 하나 있는데, 보육원에서의 삶이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친구분 중에 보육원 출신이 있으시다면 검사님도 어느 정도 이쪽 생활을 알고 있으시겠네요.”

“예. 그래서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여유가 되어서 보육원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쪽으로 몰았다.

물론,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며 나는 절대 거만해 보이지 않도록. 아주 겸손하면서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이곳에서 생활을 해 본 게 아니라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 수가 없어서, 차라리 금전적으로 후원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거든요.”

“아아, 기부요?”

후원이라는 말에도 그녀는 고상한 태도를 고수하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 남편도 검사라서 주머니 사정이 그렇게 넉넉지 않다는 걸 아는데 이렇게 결심하셨다는 게 너무 대단하세요.”

“아닙니다. 저도 이번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게 있어서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거라서요.”

젠틀한 이미지부터 구축한 뒤에 궁금하다는 듯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부군께서 검사님이시라니…… 혹시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아, 서기웅 씨입니다.”

나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혹시 이번에 중앙지검으로 부임하신 검사장님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투에서는 거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남편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라는 모습.

“검사장님의 사모님이셨다니…… 제가 진즉에 알아뵀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곳의 원장으로 봐 주세요. 남편 이야기는 말이 나온 김에 한 거니까요.”

“아, 네.”

떨떠름한 척 연기를 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기부해 주실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한 1억 정도 할까 하는데, 어떨까요?”

“1억요?”

지금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이영미 원장의 동공이 잠시나마 떨리는 게 느껴졌다.

고심 끝에 고른 액수인 1억은 그녀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윤설하가 파악한 보육원의 운영 비용 중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해 줄 만한 액수에 조금 더 얹은 금액이었다.

물론, 이보다 더 커지면 일개 검사가 기부하기에는 과하다고 판단될 수 있기에 오버하지 않은 것이고.

“1억은 조금 그런가요?”

모르는 척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너무 큰 금액이라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는 지금 삶에도 만족하고 돈에 대한 커다란 욕심이 없어서요.”

“아아, 그러시군요.”

1억은 예열 과정이었다.

이제 이영미 원장의 마음을 열게 할 카드를 꺼낼 시간.

“아,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어떤 건가요?”

“기부하는 이름을 익명으로 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익명요?”

그녀는 차분한 표정에 다시금 지진이 일었다.

“어떤 이유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안 그래도 지금 언론의 주목을 너무 많이 받고 있어서 사실, 부담스럽거든요. 검사는 검사로서의 일을 다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른 쪽으로 알려진 것 같아서, 괜히 이번 선행이 다른 뜻으로 비춰지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부장검사로 올라온 만큼, 일에 열중하고 싶기도 하고요.”

“아아.”

그녀는 나직이 말을 뱉었다.

“정말 이 시대에 몇 안 남은 참된 검사님이시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익명으로 기부하고 싶으시다면 저희는 당연히 뜻을 존중해 드릴 겁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네, 그러면 익명으로 1억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큰 금액을 쾌척해 주시는데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잘 돌봐 주세요. 그게 제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그녀의 눈빛에선 이미 나에 대한 호감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만 가면, 서기웅 검사장을 구워삶는 게 정말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지금 바로 계좌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아니면 현금이라거나…….”

“아니요. 후원 증서도 만들고 준비해야 할 과정이 있어서,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네. 제가 혹시 몰라서, 계좌로 입금하면 운영비 출입 내역에 제 이름이 공개될까 봐 싶어서 현금으로 준비를 해 왔거든요.”

“미리 준비를 해 오신 건가요?”

“예.”

“아아.”

그녀는 잠깐 무언가 생각하더니 눈을 번뜩이며 내게 물었다.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그녀는 이전과 달리 분주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조금 전의 그 여직원인 모양.

후원과 관련한 서류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바쁜 걸 보고 나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차에 가방이 있어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원장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이영미 원장의 마음에 드는 것만큼은 제대로 성공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의 성격상, 내가 기부했다는 사실은 외부로 절대 퍼지지 않고 익명이 지켜질 테지만, 그건 전혀 아깝지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상사이자 그녀의 남편인 서기웅 검사장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길 리는 없을 테니까.

애초에 이 기부 자체는 서기웅 검사장 부부만 알고 있다면 본디의 목적은 완수한 것이기에 구차한 미련 따위 가질 생각은 없었다.

현재 위치까지 올라온 만큼 언론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천천히 차에서 가방을 가져오는 사이, 이미 서류는 준비되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천천히 읽어 보시고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네.”

나는 찬찬히 서류를 읽어 나갔다.

어차피 사인할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영미 원장에게 조금 더 지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었으니까.

내용을 다 읽은 뒤에는 거침없이 사인을 하고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 검사님. 현금으로 기부하게 되면 세금 공제 쪽은 불가능하게 될 텐데 괜찮으신가요?”

“예. 문제없습니다.”

사인을 다 하고 펜을 내려놓자, 이영미 원장은 친절하게 물었다.

“한번 실내도 돌아보시겠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

실내를 한 바퀴 돌고 차로 향했다.

“검사님 덕분에 소망원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네요.”

주차장에 도착하자 보육원 아이들이 내 차 근처에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늘 빈자리로 가득한 주차장에 깔끔한 외제 차가 있으니 신기했던 모양일 테지.

“얘들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발랄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그래, 안녕.”

아이들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번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영미 원장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카드.

“아, 원장님. 혹시 말입니다.”

더없이 따뜻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봉사 활동도 올 수 있는 건가요?”

“네. 물론이죠.”

이영미 원장의 눈이 다시금 반짝거렸다.

“검사님이라면, 아이들과 놀아 주시거나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아주 충분한 봉사가 될 것 같습니다.”

“예. 그러면 한번 날짜 잡아서 오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원장은 다시금 내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보육원 입구까지 나와 날 배웅했다.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소망원을 보며 한 가지 확신이 차올랐다.

서울중앙지검의 실세, 서기웅 검사장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실권자로 올라설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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