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폭풍 (4)
TV 속 한지유는 조금 전까지 안쓰러움과 강경함이 뒤섞이던 모습과 달리, 이번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일들로 인해 제가 개인적으로 최서준 검사님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술렁이는 기자들의 소리가 TV 너머로 전해져 왔다.
강현수 부장에 대한 사실을 고발할 때보다 오히려 카메라 플래시가 더 많이 터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닐 테지.
시끄러워진 건 TV 속만이 아니라, 사무실도 마찬가지.
“어머, 대박.”
“걸크러시야.”
윤설하와 조아라는 마치 아침 드라마를 시청하는 주부가 된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홀로 마음을 키워 오던 도중, 이번 영화인 <느와르의 정석>의 주연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스럽게도 영화의 자문 역할을 최서준 검사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제가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했고 최서준 씨와 진지하게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보험이었다.
아주 확실한 보험.
혹시나 내가 성 상납과 관련해서 그녀와 엮인 것으로 괜한 오해를 받을까 싶어, 오히려 먼저 나와 교제한다는 사실을 밝혀 그런 가능성 자체를 조기에 사그라지게 만든 것.
애초에 그녀와 내가 사귄다는 사실을 밝히는 건 내게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한지유의 직업상 교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기가 식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래서 밝히는 시기를 그녀에게 완전히 일임했는데, 한지유가 오늘 이 사실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최서준 씨와 교제를 시작한 지는 아직 3개월이 채 되지 못했음을 밝히며, 혹시나 오늘 기자회견으로 인해 그분께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말씀드립니다.
한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를 끝으로 기자회견은 끝이 났다.
나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건 종결이네요.”
윤설하는 의자를 빙글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우리가 준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는데요?”
“네. 기자회견 한다고 해서 어느 정도 해결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끝낼 줄은 몰랐어요.”
남은 건 정말 시간문제.
감찰부가 추가적으로 날 조사할 일조차 없을 것이다.
강현수 부장은 당장 옷을 벗더라도 시원찮을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한지유다.
옷을 벗어도 대중이 법을 대신해서 심판을 내려 줄 터.
그녀의 팬덤이 일어선다면, 오늘 안에 강현수 부장에 대한 온갖 테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니까.
윤설하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검사님 낙인 찍히셨네요.”
“예?”
“한지유 남자 친구라는 낙인요. 그거 평생 따라다닐걸요?”
음흉한 눈으로 지켜보던 조아라는 한술 더 떴다.
“낙인 지우려면 결혼하는 수밖에 없어.”
“대신에 남편이라는 낙인이 찍히겠죠.”
“맞아, 맞아.”
저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아주 쿵짝을 치고 난리가 났다.
“이제 궁금한 건 다 알았으니까 사무실에서는 한지유 이야기는 그만하는 거죠?”
“그건 조금 아쉬운데.”
“아직 저희 궁금한 것도 많아요.”
“아니, 진짜 이 사람들이…….”
지이잉.
울려오는 휴대폰의 진동.
발신인은 한지유.
여기서 전화를 받았다가는 이 여자 둘이 또 난리를 칠 것 같아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어, 지유야. 기자회견 잘 봤어. 고생했다.”
-괜찮았어?
“응. 사실대로 밝히기 힘들었을 텐데 정말 큰 결심 했어.”
-아니야. 오히려 마음 편했어. 가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랄까. 다 오빠 덕분이야.
한지유의 목소리에서 홀가분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걸 꾹 참았다.
-아, 그리고 오빠랑 사귀고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밝혔어.
“잘했다.”
-오빠는 이제 완전 도장 찍힌 거야.
“도장?”
-내 거라는 도장.
윤설하에 이어서 얘까지 낯 뜨거운 말을 하네.
-이제 완전히 낙인찍혔으니까 바람도 못 피우겠다. 그치?
“하하, 그렇겠네.”
-어?
그녀가 장난기 섞인 어투로 말했다.
-목소리가 아쉬운 것 같은데?
“전혀.”
-오늘 고생했으니까 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자.
“그래. 이번 건 마무리하고 가려면 조금 늦을 텐데 괜찮아?”
-응. 오빠 집에서 기다릴까?
“그래도 되고. 한 8시쯤에 끝날 거야.”
-알겠어. 그때 봐.
“들어가.”
전화를 끊자, 문득 비친 창문에서 내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강현수 건을 마무리 지어 버려야겠는걸.
***
개봉 직전에 한지유가 터뜨린 심경 고백과 열애 사실 고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노이즈 마케팅의 극치를 찍은 그녀의 영화이자 내가 자문으로 들어간 영화인 <느와르의 정석>은, 개봉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한지유가 열애 사실을 밝혔는데도 오히려 그녀의 팬이 더 늘었다는 점.
그녀와 나의 연애 스토리가 너무나도 극적이면서도 한 편의 드라마 같아서, 둘의 연애 자체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아졌달까.
그 덕분인지, 나도 뉴스를 보는 사람보다 10대, 20대에게 더 인지도가 높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만들어졌다.
강현수 부장이 완전히 죽을 작정을 하고 덤벼든 탓에 기존에 세워 둔 계획이 틀어졌지만, 오히려 한지유가 성 상납을 강요받았던 사실을 밝혀 버려서 도리어 계획보다 더 빠르게 사건이 종결되었다.
기자회견 직후, 청와대 국민 청원은 물론이고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홈페이지의 국민 소통실 페이지가 완전히 마비될 정도가 된 탓에 강현수 부장은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이틀 만에 옷을 벗었다.
당연히 그의 뒤를 따라오던 경제범죄조사부와 금융범죄전담부의 수장인 두 명의 부장검사들 또한 강현수 부장을 따라 옷을 벗었다.
그들이 물러난 덕분에 SL그룹 부회장 박현조에게는 자연스레 관심이 사라졌고, 그는 재벌 불패 3-5공식을 실현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맞이했다.
세 명의 부장검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웃을 수 있었달까.
이러한 덕분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부장검사 자리가 한번에 세 개가 넘게 공석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특수부의 부장 자리가 공석이 된 덕분에 자연스럽게 특수부 부장의 권한은 내게로 내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만큼, 나는 자연스럽게 부장검사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부장검사 자리가 세 개나 오랫동안 비어 있는 건 좋지 않다고 위에서도 빨리 부장검사 자리를 채우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꽤나 달갑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김재욱 검사장, 이 인간이 이번 일로 나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는지, 특수부의 부장검사 임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
“검사장님이 다른 생각 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
이두형 검사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경제범죄조사부나 금융범죄전담부도 모두 다른 지검에서 끌어와서 부장검사로 올렸는데…….”
그가 말하지 않아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세 자리의 공석 중 두 자리를 모두 내부에서 올린 게 아니라 외부에서 끌어온 상태.
다시 말해, 이건 특수부의 부장검사 자리를 다른 곳에서 끌어와도 문제가 없다고 어필하기 위한 포석을 깔아 두는 것이었다.
“김재욱 검사장, 이 자식 딴마음 품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성태현의 사촌 동생인 성진현에게 들은 것도 있으니,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때, 사무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끼이익.
아주 천천히 문이 열리며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눈매에 야비함이 가득 서려 있는 걸 보면, 이 바닥에서 몇 년은 구른 인물이라는 걸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야, 최서준 검사님 아니십니까?”
그는 반가운 티를 내며 손을 양옆으로 넓게 펼쳤다.
“누구십니까?”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그는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서부지검의 공정거래 및 기업범죄전담부의 부장검사 한태민입니다.”
한태민!
김재욱 검사장에게 줄을 섰다는 그 인간.
성진현에게 듣기로, 차기 특수부 부장을 맡기 위해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다지.
내가 미간을 찡그리기 무섭게, 그가 말을 이었다.
“다시 소개하자면 서울중앙지검의 차기 특별수사부 부장검사입니다. 발령이 나려면 아직 꽤 남았지만, 오늘 김재욱 검사장님과 이야기를 끝냈으니 확실하다고 봐야죠.”
그는 마치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이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정식으로 오기 전에 얼굴이나 익혀 두려고 들렀습니다.”
김재욱 검사장, 이 자식.
자신의 오른팔인 강현수 부장검사가 잘려 나가는 걸 보면서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와 있다.
정말 나랑 치킨게임 한번 해 보자는 건가?
끝까지 가자는 거지?
김재욱 검사장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기도 전에 한태민이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자, 앞으로는 제 밑에서 일하시겠네요. 앞으로 잘해 봅시다.”
그는 ‘제 밑’이라는 두 글자에 아주 힘을 주어 말했다.
이 자식이 정신이 나갔나.
이 정도면 정말 붙어 보자는 뜻 같은데.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두형 검사를 옆으로 밀어내고 한태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물론, 그가 뻗은 손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로.
“공기부 부장검사라고 하셨죠?”
“아직까지는요.”
그는 능청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한태민의 뻔뻔한 태도에 더 열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서부지검에 계시죠.”
그러나 그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왜요?”
눈빛만 봐도 직감이 왔다.
능욕하러 온 것이다.
이 자식은 날 희롱하기 위해 친히 이곳까지 행차한 것이다.
싸가지없는 자식.
그러니까 발령이 나기도 전에 이렇게 얼굴 익힌다는 핑계로 온 것일 테지.
이 정도 속내를 알았으면 나도 더 이상 겸손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로 올라오실 겁니까?”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점찍어 둔 자리입니다. 제 자리를 뺏으시면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 힘들어요.”
“에헤이.”
그는 능글맞게 손을 내저었다.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저는 위에서 까라고 해서 깐 겁니다. 이쪽으로 오라고 해서 오는 건데 뺏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가로챈 것도 아니고요.”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찼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
내 위협에서 한태민은 헛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인사하러 왔는데 잘못하면 사람 잡겠어요.”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사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그제야 그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면 나중에 뵙죠.”
나가려던 그는 문득 멈춰 서서 날 바라보았다.
“아, 2년 만기 아니었나? 제가 부임할 때면 잠깐 스치듯이 얼굴만 보고 다른 곳으로 발령 나겠네.”
한태민은 조롱하듯 말을 보탰다.
“지방에서 푹 썩다가 돌아오세요. 예쁜 사랑도 잘 챙기시고.”
그는 낄낄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전형적인 간신배 스타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인물.
말 그대로 ‘가짜’라고 불리는 녀석들이다.
저런 조무래기보다는, 오히려 요즘같이 내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이 상황에서도 나를 견제하기 위해 한태민을 부장검사로 올리려고 하는 김재욱 검사장에 대한 분노가 더욱 차올랐다.
“괜찮으십니까?”
옆에 있던 이두형 검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진정하십시오.”
나는 천천히 짙은 숨을 내뱉었다.
“두형아.”
“예, 선배님.”
“김재욱 검사장 건, 터뜨릴 때가 된 것 같다.”
그제야 이두형 검사는 입꼬리를 휘며 눈을 번뜩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