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3)
“그나저나 확실히 우리 쪽 라인보다는 그쪽 라인의 몸집이 더 큰 것 같네요. 인원수로 보나, 전체적인 규모로 보나…….”
중앙지검만 보더라도 우리 쪽보다는 김재욱 검사장을 필두로 해서 그쪽 라인의 부장검사들이 짱짱하게 버텨 주고 있는 상태니까.
“예, 뭐 그렇죠.”
성태현은 아쉬움에 혀를 한번 차며 말했다.
“그쪽에 비해 우리 쪽이 세력 싸움이 조금 더 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세력 싸움요?”
“예. 최 검사님은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라인의 중심에 최규현 국무총리님께서 오르셨잖아요? 그런데 사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신경전이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이건 내가 듣지 못했던 사실인데.
“우리 쪽 라인이 1번 라인이라면, 그 동맹 라인을 2번 라인이라고 부르죠. 전 대통령이 1번 라인이었다면, 현 대통령인 권재철 대통령은 2번 라인이거든요.”
전 대통령과 현 대통령 모두 같은 대한당 출신이지만, 라인은 서로 달랐던 모양.
“원래 1번 라인에서는 최규현 국무총리와 대한당 당대표인 허일문 의원이 서로 경쟁하면서 누구 하나가 넘버원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세력에는 우두머리가 있어야 안정을 얻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매일같이 경쟁만 하고 있는 불안정한 형태라, 새로운 인물들을 데려오기보다는 다들 각자의 자리를 다지느라 바빴죠.”
각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사이, 주요 인재들을 전부 2번 라인에 빼앗겼던 모양이다.
“그러던 도중 2017년에 권재철 대통령이 당선이 되면서 구도가 완전히 뒤집어졌죠. 최규현이 국무총리에 오르며 넘버원에 등극하고 허일문 의원은 자연스레 넘버 투로 내려간 겁니다. 그 뒤에야 이제 안정을 찾고 인재 영입을 시작하면서 다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고, 그러던 도중에 검사님께서 이쪽 라인으로 들어오시게 된 거죠.”
“그렇군요.”
“물론, 그렇게 된 게 사실상 우리에게도 좋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한당 당대표인 허일문 의원은 아무래도 우두머리감은 아니니까요.”
암만 같은 라인으로 묶여 있다고 해도, 이곳 또한 실리를 위해 뭉친 곳이다.
밥그릇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달까.
일단 확실한 건, 적어도 권재철이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이상 다시금 세력이 흔들릴 일은 없다는 사실.
그 순간, 머릿속에 다시 탄핵이라는 단어가 드리워졌다.
현재 대통령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진 상황.
만약 그가 탄핵이라도 된다면, 우리 라인엔 다시금 혼돈이 몰아치는 것이다.
최규현 국무총리가 힘이 빠질 가능성이 굉장히 크니까.
잠깐만, 이게 아니지.
최규현이 권재철의 사람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권재철은 2번 라인, 최규현은 우리 쪽 라인이다.
탄핵에 같이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대통령의 공백기인 6개월간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오히려 그때 더 힘을 얻어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도 있다.
잘만 하면, 대통령 권한대행을 넘어서 대권 후보로 올라갈 수도 있는 법.
대한당에서 차기 대권 주자로 불릴 만한 인물이 없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최규현과 경쟁했던 대한당의 1인자 허일문은 노련한 정치인이지, 대통령감이라곤 평가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아무래도 최대한 몸을 웅크리면서 상황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내 몸을 지킬 아주 튼튼한 방패를 만들면서.
그 과정의 첫 번째는 김재욱 검사장이 나의 부장검사 자리를 빼앗지 못하게 하는 것.
그가 한태민을 특수부 부장검사로 올릴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
“최서준입니다.”
“한승호입니다.”
그는 번질번질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악수하고는 명함을 건넸다.
“TV에서만 뵙던 검사님을 이렇게 다 뵙네요.”
한승호가 건넨 명함에는 ‘한울물산 전략지원팀 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딱 보아하니 원래 운영하던 팀이 아니라, 재벌 3세인 그를 위해 만들어 낸 부서라는 직감이 왔다.
“앉으시죠.”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와인? 샴페인? 양주? 아니면 소주 쪽도 준비되어 있고요.”
확실히 재벌답게 여유가 넘쳐흐른다.
주옥그룹의 재벌 2세인 이철용 회장을 만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
아무래도 재벌 1세들이 완전한 대기업을 이룩하기 전에 자랐던 재벌 2세들과는 달리,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구축되고 안정된 상태에서 자란 재벌 3세인 만큼 온몸에 자신감과 패기가 넘쳐흐르고 있달까.
“오늘은 우리의 만남을 축하해야 하는 날이니 샴페인으로 하시죠.”
“샴페인 좋죠.”
그는 손뼉을 두 번 쳐서 사람을 불러 곧장 샴페인을 준비시켰다.
서로에 대해 탐색전을 하듯 간단한 신변잡기를 나눈 후,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공석민 사장한테 들어 보니까 100배나 해 먹으실 거라던데요.”
“아, 그 친구가 쓸데없이 진솔해서 사실대로 이야기했나 보네.”
한승호는 뺀질뺀질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크게 한번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암만 그래도 한울그룹 클래스가 있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100배라면 꼬리를 밟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검사님을 뵙고 싶어 한 거죠.”
그는 눈썹을 들썩였다.
“꼬리를 밟혀도 그 발을 살포시 들어 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게 대한민국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꽤나 대담하시네요.”
“그럼요. 어릴 때부터 그룹 사람들을 보면서 배운 거라고는 담력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가진 거라고는 돈과, 이 객기처럼 보이는 패기가 전부거든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웃음이 났다.
마음에 든다.
자신이 가진 걸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재벌다운 재벌.
이 정도라면 손을 잡아도 나쁘지 않을지도.
“정확히 원하는 게 뭡니까? 어차피 경찰과 손을 잡아서 팀장님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으실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는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아예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한승호의 상체가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게 참으로 애매한 게, 한울 투자증권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잖습니까?”
“허.”
아주 발칙한 상상이다.
“100배를 먹고도 한울 투자증권을 그대로 살려 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30억 드리겠습니다.”
30억.
만만치 않은 돈이다.
일반인들이라면 평생 손에 쥐어 보지도 못할 큰 금액.
그러나 재벌들의 스케일을 아는 나에게는 그저 푼돈으로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철용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넘쳐 나기에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한울 투자증권을 살리는 건, 저도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으니까 이렇게 검사님을 뵙고 부탁드리는 거죠.”
“그걸 아시는 분이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신다.”
내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는 졌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50억 드리죠.”
나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검사님, 50억이면 평생 쓰고도 남습니다.”
한승호는 오히려 자신이 인심을 쓴다는 기색을 뿜어냈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 알겠다만, 이렇게 나오면 패기가 아니라 객기지.
“팀장님.”
나는 살벌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누굴 호구로 아시나.”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석민이 제게 먼저 접근한 순간부터 이미 그쪽 패는 다 까진 겁니다. 대놓고 패를 보고 게임을 하는데, 그런 푼돈이나 주면서 적당히 먹고 떨어지라고 하시는 겁니까?”
팔걸이에 올려놓았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한승호는 재벌다웠다.
아주 전형적인 재벌.
그러나 젊은 만큼 경험이 부족했다.
일반적인 평검사나 부부장검사라면 이미 넘어가고도 남았을 액수지만, 그는 나를 너무 저평가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거지.
“까놓고 말해서 회사 돈만이 아니라 한 팀장님 개인 비자금도 들어갈 걸 뻔히 알고 있는데, 프로끼리 그러실 겁니까?”
한승호의 볼이 꿈틀거렸다. 이를 질끈 물었다는 소리.
“저 최서준입니다.”
“…….”
“마음만 먹으면 한울 투자증권은 물론이고 한승호 씨까지 재벌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만들어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격분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박수를 쳐 줄 만했다.
상대를 파악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해서 거슬리면 참지 못하는 일반적인 재벌과 달리, 이 녀석은 서로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니까.
한승호는 잠깐 사이에 감정을 컨트롤하고는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아, 이거 제가 검사님께 너무 실례를 했네요.”
“38광땡일 때 패를 까셔야지, 구땡 정도로 까 버리시면 땡잡이가 날뛰잖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나는 크게 다리를 꼬았다.
“혹시 검사님께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이래야 제대로 된 거래지.
“저는 사실 욕심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억만 주시죠.”
“1억요?”
그는 제 귀를 의심하듯 목을 내밀었다.
“100배로 불리실 거잖습니까. 지금 수중에 가지고 계신 1억 정도면 정말 푼돈이잖습니까?”
내가 한 말의 내의 정도는 파악했을 터.
한승호는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말이 지금 돈으로 1억이지, 주식을 통해 불린 100억을 넘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는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쳐 날뛴다면, 거래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지.
“후우.”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래야 대화가 되는 거죠.”
“죄송합니다. 제가 챙겨 줄 사람이 많다 보니 너무 통이 작게 놀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정도도 욕심을 부리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이었다.
아직 주옥그룹에서 받은 돈도 넉넉하게 남아 있기에 최소한으로 부른 것이다.
내가 거절한다고 한들, 어차피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해결을 볼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분명히 누군가는 챙길 더러운 돈, 기왕이면 내가 챙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렇게 마무리된 걸로 알고, 사건이 정리되면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죠.”
“예?”
한승호는 진심으로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사건이 마무리될 줄 알고 기다립니까?”
그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당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테지.
그러나 그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더러움에 정의 따윈 없으니까.
“기한은 사흘 드리겠습니다. 사흘 안에 마련해서 연락 주시죠.”
“잠깐만요, 검사님. 지금 저도 이번 건 준비하는 데 들어간 게 워낙 많아서 그 정도 여유 자금은 없습니다.”
“재벌이 돈 없다는 소리는 돼지가 배부르다는 소리처럼 들립니다만.”
“그래도 100억은 무리입니다.”
“사흘입니다.”
“아니…….”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얕보고 기만하려고 했던 대가 정도는 치러야지.
어디서 감히 하늘 같은 검사 머리 위에 올라가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