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52화 (52/341)

우연 또는 운명 (4)

“과연 우연일까요?”

“예?”

“운명일지도 모르죠.”

나는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가 꼭 만나야 되었을 운명.”

박수형 기자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 없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눈을 번뜩였다.

“그렇죠. 운명일 수도 있죠.”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내려가 1층에 도착했다.

여운을 남기되, 내가 아쉬운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함께 일할 운명이라면 또 뵐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짧게 여지를 남기고 먼저 떠나갈 분위기를 풍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박수형 기자는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 운명은 직접 정할 수 있죠.”

그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심판자 사건 맡으실 예정이죠?”

속에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제대로 봤다.

역시 나의 사람 보는 눈은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심판자 사건을 내가 맡는다는 건 아직 보도되지 않은 사실.

검찰 측에서도 상급자와 몇몇 관련자 및 경찰의 수뇌부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박수형 기자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눈빛을 보아하니, 떠보는 게 아니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

그런데 기자의 신분을 가지고도 그 사실을 기사로 내지 않았다.

검경 합동 수사가 시작되는 것을 넘어, 그 본부의 수장이 나라는 사실은 당연히 트래픽 1위를 가져올 수 있는 화젯거리다.

그런데도 기사를 쓰지 않았다는 건, 정보처로부터 엠바고만큼은 확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

박수형은 고작 한마디만으로 그의 정보력과 신뢰성을 동시에 검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 이래야 내 최측근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정도 능력은 있어야 믿고 일할 수 있지 않겠어?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 어필하겠다는 듯이 자신감 있게 말을 이었다.

“검사님께서 눈이 번뜩일 만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렇게 접근하는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다만, 그중에서 제대로 정보를 갖고 있는 기자는 거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죠.”

박수형은 어필하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대로 된 정보입니다. 제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하죠.”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밤이라 그런지 카페인이 당기네요.”

“조용히 이야기하기 좋은 카페를 알고 있습니다. 함께 가시죠.”

***

최서준이 정치사회부의 박수형 기자와 함께 이동할 무렵, 서울 도심의 한곳에서는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 반장, 소식 들었어. 검경 합동 수사본부 들어간다며?”

“어, 벌써 거기까지 전해졌어?”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심판자 사건의 첫 건을 맡았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나? 하하핫.”

남자는 한껏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검경 합동 수사본부에 광역수사대 에이스가 들어갈 줄은 몰랐어.”

“윗대가리들이 보기에 만만한 게 광수대지, 뭐. 여기저기 다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

김 반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겸손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랑스럽게 어깨를 내밀었다.

“내가 사건을 잘 해결하긴 하지.”

“허허허, 그나저나 이번 합동 수사본부장 말이야, 그 스타 검사 녀석이 맡는다던데, 사실이야?”

“나도 그렇게 들었어.”

“그 최서준인가 뭔가 하는 놈 맞지?”

“맞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카메라 마사지 몇 번 받더니 떡하니 감투 쓴 거지, 뭐.”

“암만 그래도 합동 수사본부장직은 최소 부장검사 이상이 맡는 거 아닌가? 내가 알기로 그놈이 부장검사급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위에서 슬쩍 밀어준 거 아니겠어? 뻔하잖아.”

“어휴, 그쪽도 연줄로 가는 건가?”

“다 그런 거지, 뭐.”

“김 반장이 고생 좀 하겠어.”

“적당히 구슬리면 넘어오겠지. 암만 그래 봤자 30대 초반 아니겠어? 연륜으로 밀고 나가야지.”

“그래. 검사 녀석들 어차피 서류 볼 줄만 알지, 실전에서는 제대로 힘도 못 쓰잖아. 경찰이 잡는 거 보고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라고 그래.”

“하하하하, 심판자 녀석 잡고 술이나 한잔 살게.”

“좋지.”

김 반장.

광역수사대의 반장을 맡고 있는 김형석 경감은 한껏 거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

박수형 기자와는 엘리베이터에서 이미 탐색전을 마친 상태.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오래 끌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달콤한 정보라는 게 뭡니까?”

“검사님께서 비밀을 지켜 준다고 약속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모양.

“알겠습니다. 약속드리죠.”

테이블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박수형 기자는 길게 호흡을 내뱉고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는 주변을 슬쩍 확인하고는 서류 봉투에서 신문지로 둘둘 말려 있는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지퍼 백에 담겨 있는 작은 물건.

보관 형태를 보자, 물건의 정체에 대한 직감이 들었다.

“설마, 이거…….”

말을 삼키자, 박수형 기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품입니다.”

“허어.”

그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사건 현장에서 제가 직접 챙겨 온 물건입니다.”

박수형 기자에게 지퍼 백을 건네받아 물건을 자세하게 살폈다.

“이게…….”

“범인이 사용한 인공 눈물입니다.”

인공 눈물.

정확히는 반쯤 사용한 1회용 인공 눈물이었다.

“지문 확인은 했습니까?”

“예. 사설 업체에 맡겨 확인했지만, 지문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하면 범인을 추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걸 다시 말하자면, 범인이 사용했다는 게 확실하다는 뜻이다.

일반인들이라면 물건을 사용할 때 당연히 지문을 남길 것이고, 문제가 없다면 그걸 지웠을 리가 없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확인을 마친 증거품을 박수형 기자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어떻게 얻은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사실 꽤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심판자 사건들을 천천히 분석했습니다. 범인이 악질 범죄를 저지르고도 가벼운 형을 받은 녀석들을 범행 대상으로 한 건 아시죠?”

“예.”

“피해자들에 대해 전부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오는 게 이더군요.”

잠깐만, 이라면 송재훈 PD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보통 사람들은 그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전부 인터넷과 뉴스에 보도된 인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제가 확인해 본 결과로는 전부 에서 사건이 다뤄진 적이 있는 녀석들이었습니다.”

이건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애초에 경찰에서 사건을 이첩할 때 넘겨준 자료들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용.

박수형 기자는 목소리를 더 낮추어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사실을 알아내고 다시금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범죄자들을 정리한 결과, 불과 며칠 전에 미성년자 성폭행을 해 놓고도 고작 3년 형만 살고 나온 전과자가 하나 있더군요.”

흥미로운 그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성범죄자 알림e를 사용해 본 결과 그 전과자가 저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 이후로 열흘 가까이 그 전과자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가 새벽녘에 귀가한 뒤 살해당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현장을 목격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러지 못한 게 너무나도 아쉬울 따름입니다.”

박수형 기자는 분통하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가 귀가한 직후라서 저 또한 집에 있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아파트 단지에 비명이 울려 퍼지기에 혹시나 해서 그 범죄자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집 문은 활짝 열려 있고 거실에 피를 흘리며 대자로 뻗은 전과자 녀석이 보이더군요.”

“그렇다면 여섯 번째 사건의 최초 발견자이신 겁니까?”

“정확히는 저와 경비원 아저씨가 같이 발견했죠. 경비원이 신고하는 사이 현장을 몰래 살폈는데, 집 앞 현관에 인공 눈물 하나가 떨어진 게 보이더라고요. 마치 주머니에서 튕겨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요. 그래서 지문이 묻지 않게 슬쩍 챙겼고, 경찰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떴습니다.”

“허허.”

“본래 심판자는 단번에 목숨을 끊는 스타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살인에서는 급소를 노리는 데 실패했고, 피해자가 비명을 지른 탓에 놀라 빠르게 도망치다가 실수로 인공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건 흥미가 돋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의 이야기.

이런 거라면, 박수형을 시험하고 간 볼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잡고 함께 일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박수형 기자는 히죽 웃으며 증거품을 다시금 신문지에 말아 서류 봉투에 넣었다.

“이게 끝입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거 있나요?”

나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템포 쉬어 가는 말을 꺼냈다.

“피해 현장에서 증거품 훔쳐 나오는 게 범죄란 건 아시죠?”

그는 조소를 지으며 답했다.

“원래 범죄라는 건 들켜야 범죄고, 아무도 모르면 합법적인 거 아니겠습니까?”

능구렁이 같은 태도까지.

박수형은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흘렸다.

“그렇죠. 한국에선 그게 정답이죠.”

박수형 기자는 서류 봉투를 완전히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아무쪼록 인공 눈물에 대한 비밀은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기자님과 저, 둘만이 아는 비밀로요.”

“좋습니다.”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범죄 현장에 인공 눈물을 두고 갔다.’

이 사실이 증명해 주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판자는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매번 표적 또한 확실하게 정한 뒤에 움직인다.

다시 말해 모든 살인은 계획된 뒤에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특정할 만한 증거는 최대한 배제한 채 움직이려 할 터.

그런데 인공 눈물을 가져왔다.

지문을 닦았다는 건, 혹시나 떨어뜨릴 위험까지 감수했다는 것.

다시 말해, 그러한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범인은 현장에 그 인공 눈물을 가져와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정답은 뻔하다.

범인은 안구건조증과 같은 안구 질환을 앓고 있어 수시로 인공 눈물을 넣어 주는 게 필수적인 인물이라는 것.

이것만으로도 범죄자의 폭을 대폭 줄일 수 있을 터.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심판자의 범행 대상의 전원이 에 나왔다는 박수형 기자의 말이 맞는다면, 정말 가능할지도.

“기자님께서는 다음 피해자를 예측하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이번엔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심판자 사건이 워낙 큰 탓에 관련 사건들이 묻혔거든요.”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짧고 강렬하게 답했다.

“우리가 만들면 되죠.”

한껏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덧붙였다.

“심판자가 다음으로 저지를 범행 대상을 선정할 수 있게 콕 찍어 주는 거죠, 우리 손으로 직접.”

“아…….”

그는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검사님.”

그와 동시에 박수형 기자는 테이블에 있던 두 손에 주먹을 꽈악 쥐었다.

“제가 검사님께 최초로 이 이야기를 해 드린 게 신의 한 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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