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49화 (49/341)

우연 또는 운명 (1)

“혹시 이번 영화에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도움요?”

진태용 사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 준비하는 작품 장르가 느와르잖습니까? 이게 검사와 조폭의 전투예요. 복잡한 걸 부탁드리는 게 아니라, 명목상으로 법률 및 리얼리티 쪽으로 자문 역할 좀 맡아 주셨으면 해서요.”

“아아…….”

그는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로 저희가 귀찮게 막 이것저것 여쭤보고 하려는 건 아니거든요. 까놓고 말해서, 최 검사님이 워낙 스타 검사로 유명하시니까 이름 걸고 그 홍보 효과 좀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라…….”

“아, 뭐 실제로 도와드릴 일은 없고요?”

“예. 가끔씩 오셔서 회식이랑 시사회에서 얼굴만 비쳐 주시면 됩니다. 이미 시나리오는 다 나와서 고증까지 마친 상태라 딱히 고생하실 필요도 없고요.”

무언가 숨기는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한 그대로 나를 간판으로 쓰려는 것.

안 그래도 바로 며칠 전, 박성현 차관을 성추행으로 쳐내면서 또 한 번 검사들의 대표로 TV에 얼굴을 비친 만큼, 슬쩍 이름만 걸어서 ‘현실감을 살렸다!’, ‘리얼리티의 정석!’이라는 등의 홍보로 써먹으려는 거겠지.

진태용 사장은 부드럽게 손을 한 바퀴 돌려 비비며 말을 이었다.

“페이는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페이는 둘째 치고, 영화 쪽에 자문으로 이름을 건 경력이 있으면 커리어에 확실히 도움이 될 테니까.

무엇보다 멋있기도 하고.

영화가 흥하면 좋고, 망해도 소리 소문 없이 잊히는 것이니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

다만, 이 정도 위치나 되어서 쉬운 이미지를 보여 줄 필요는 없지.

“그렇군요.”

“예. 혹시 생각해 보시고 괜찮으시다면…….”

“저도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은데, 제가 신분이 신분인지라…… 위쪽에 허락을 맡아야 해서요.”

코를 찡긋거리자, 진태용 사장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물론이죠. 검사님께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만 도와주십사 하고 부탁드리는 거니 절대 부담 갖지 마십시오.”

“예.”

슬쩍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공무원은 이런 걸로 페이를 받으면 안 됩니다.”

들고 있던 포크로 안주 하나를 찍어 들며 말했다.

“하다못해 이런 음식 하나 못 얻어먹는데 어떻게 페이를 받겠습니까? 하하하.”

“그러면 좋은 수가 있죠.”

그는 목소리를 낮춰 간사하게 말했다.

“이면 계약서로 처리해서…….”

“어허이!”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저는 그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진태용 사장은 실수했다는 듯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이내 휴대폰을 꺼내어 음흉한 눈으로 갤러리에서 사진 몇 장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번에 들어온 신인 배우들 프로필인데, 혹시 원하시는 친구 있으면…….”

“진 사장님.”

나는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 뒤집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깨끗하게요. 저는 그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건 먹으면 체한다.

체할 걸 알면서도 먹는 녀석들은 길거리의 굶주린 부랑아들만도 못한 놈이 되는 법.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려 먹을 줄 아는 게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정확한 방법이다.

이걸 알면서도 당장의 눈앞에 있는 음식에 침을 흘리다가 넘어가는 녀석들이 태반이라는 게 웃기는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진태용 사장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겠지.

남자가 살면서 갈구하는 세 가지가 바로 돈과 여자 그리고 명예인데, 명예는 검사라는 직업으로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

그런데 돈도 싫다, 여자도 싫다고 하니 내가 뭘 바라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오히려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가볍게 말했다.

“진 사장님께서 저한테 빚 하나 지신 걸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빚요?”

“예. 뭐, 언제든 제가 도와 달라고 요청하면 한번 발 벗고 나서 주실 수 있는 그런 빚이랄까요?”

그제야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제가 또 경상도 출신이라 의리만큼은 죽여주죠.”

“좋네요.”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 물론 위에서 허가가 떨어졌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직 일개 검사에 불과해서 마음대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최 검사님께서 그런 말씀 하시면, 대한민국 검사 다 머리 숙이고 다녀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부성 멘트라도 듣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그에 대한 대답 대신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확인해 보고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한 잔 하실까요?”

“좋죠.”

그와 소주잔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들이마셨다.

쌉싸름한 알코올 향이 기분 좋게 코로 뿜어져 나왔다.

진태용 사장.

나름대로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스타 프로덕션의 사장이라는 인물의 배짱에 대해 한번 확인해 볼 시간이다.

적당한 선에서 끝나면 몰라도, 괜찮은 인간이라면 오래도록 끈을 이어 놓을 필요가 있다.

이 바닥에서 놀다 보면 연예계 쪽도 얽히고설키기 마련.

분명 위에 있는 양반들 중에선 연예인에 침을 흘리고 마수를 뻗거나, 스폰서를 자청해서 돈줄이나 프로그램 및 광고를 대 준 인물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그러려면 당연히 기업들과 더러운 관계로 연결이 되었을 터.

이런 부분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곳에서도, 연예계 쪽에서 내로라하는 진태용 사장이라면 분명 도움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잘 이야기하고 계셨어요?”

그사이, 흡연을 마치고 돌아온 송재훈 PD와 박수형이 테이블에 착석했다.

“표정 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신 것 같은데.”

“별거 아닙니다. 우리보다 두 분이 더 재미있는 대화를 하신 것 같은데요?”

송재훈 PD는 실실 웃으며 옆에 있는 박수형을 가리켰다.

“아, 웃긴 일이 하나 있어서요.”

“뭔데요?”

“이번에 WK일보에, 이 친구랑 동명이인으로 후배가 하나 들어왔다고 하네요.”

“동명이인요?”

“예. 부서는 다행히 다르답니다. 정치사회부로 들어온 박수형 기자라네요. 하하하핫!”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졌다.

박수형.

정치사회부의 박수형 기자.

왜 내가 이걸 잊고 있었을까.

미래 문자에서, 그 일기장을 적어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예순 살의 나.

문자를 받은 당시에 박수형을 만났다는 말은 전혀 없었는데,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당시에 WK일보에 있는 박수형이라고 확신했다.

그게 제일 큰 맹점이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송재훈 PD가 아는 후배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간 게 문제였다.

그것만 가지고 박수형의 연결 고리를 찾았다고 신나 했으니까.

그 순간, 박수형이 어설프게 웃는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 뭔가 이상했어.

평상시에는 상종도 하지 않을 한심한 녀석을 60 평생 최고의 동료 중 하나로 꼽다니.

암만 미래 문자를 봤다고 한들, 나는 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절대 자선사업가가 될 만한 성격도 아니고.

박수형은 딱히 복잡한 생각은 없는 듯, 허허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친구 얼굴 한번 봤는데, 머리에 새치가 가득하더라고. 한 마흔 되면 백발이 될 것 같던데.”

“에이, 염색하겠지.”

오케이, 이걸로 확신.

문자에서도 60도 안 된 녀석이 머리가 하얗게 셌다고 했다.

이제라도 찾았으니 됐다.

멀리 돌아오긴 했으나, 미래에 내게 큰 도움이 될 ‘진짜’ 박수형을 찾는 건 성공했다.

연예부의 박수형을 만나면서 잠깐 의심하긴 했지만, 역시나 미래 문자는 완전한 사실들만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헛고생한 게 아쉽기야 하지만, 연예부의 박수형을 통해서 오늘 진태용 사장과 연결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쨌든 간에 연예계 쪽에 다리 하나는 걸어 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연예부의 박수형에게 남은 마지막 기대는 하나.

정치사회부의 박수형과 연결되는 일.

그게 이 인간의 마지막 이용 가치다.

나는 자연스럽게 안주 하나를 찍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 정치사회부의 박수형이라는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랍니까?”

“원래 정치 1번지에 있다가 왔다나 봐요. 경력직이라고는 하는데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고요.”

정치 1번지라.

배진수 기자가 있던 그곳이다.

아무래도 그 박수형 기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란 걸지도.

가능하다면 그 운명을 조금 더 당길 생각이다.

***

“영화?”

강현수 부장검사는 눈을 크게 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무슨 헛바람이 들었어?”

영화 자문 역할로 들어간다고 하자, 역시나 강현수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 검사, 방송 물을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여자 연예인들 나온다기에 그냥 얼굴이나 한번 비치고 구경이나 하려고 합니다. 여배우들 얼굴도 구경하고 같이 술 한잔도 할 수 있다는데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강현수 부장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배우 좋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는 겉으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현수 부장은 내가 한지유에게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거라고 알고 있으니까.

진짜라고 생각하는 가짜 동영상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 최서준이라는 인간은 연예인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하찮은 일개 검사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 거라면 뭐, 내가 책임지고 오케이해 줄 수 있지.”

강현수 부장은 인심 쓰듯 거만하게 말했다.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다만, 거기에 금전적인 거래가 끼어 있으면 위험한데.”

“아, 걱정 마십시오. 무상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검찰 이미지 개선 및 국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쪽으로 포장해서 말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문제 될 게 전혀 없지.”

“검사장님께 따로 보고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아이, 됐어.”

그는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자네 요즘 검사장님이랑 별로 안 좋은 것 같더구먼. 내가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자주 뵙고 남들보다 더 가까우니까 한번 말씀드려 볼게.”

자신과 검사장이 같은 라인이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이 녀석, 내 쪽 라인에서 동맹 라인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에 더 비열하게 변한 것 같다.

“최 검사는 걱정할 것 없어. 오늘 바로 가서 오케이해도 돼.”

“아, 감사합니다.”

강현수 부장, 이 인간 아주 나를 연예계 쪽으로 눈이 돌게 만들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연예인들과 놀아나면 자신에게 위협이 덜 될 것이라고 판단했겠지.

당분간은 웅크리고 있어도 그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 그런 자리 있으면 빠지지 말고 놀아. 젊을 때 놀아야지, 나처럼 결혼하면 재미 못 본다.”

“감사합니다.”

“가 봐. 변동 사항 있으면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나가기 직전,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부장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저희 라인에서 그쪽으로 옮겨 가신 이유가 있습니까?”

“왜, 자네도 오고 싶어서 그래?”

그는 피식 웃으며 거만하게 날 쳐다보았다.

“내가 그쪽 라인에 넣어 놓고 옮겨 와서 서운한 건가?”

“아닙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별거 없어.”

그는 의자에 머리를 묻으며 가볍게 웃었다.

“검사장님이 이쪽이잖아. 승진하려면 같은 라인을 타야지.”

아니나 다를까, 간신처럼 붙은 것이었다.

“그렇군요.”

“자네도 오고 싶으면 말하고.”

“아닙니다. 저는 이쪽이 좋습니다.”

“그래. 그러면 가 봐.”

“쉬십시오.”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검사장을 직접 만나면 태클을 걸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 간다.

담배를 한 대 태울 겸 1층으로 내려가자, 진태용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예, 최서준입니다.”

-아, 최 검사님. 지금 전화 괜찮으십니까?

“네. 안 그래도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잘됐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예. 상부에 보고했는데 오케이 사인 떨어졌습니다.”

-이야, 타이밍도 딱 좋네. 그러면 걱정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담배를 한 모금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 주신 겁니까?”

-아, 이번 주 금요일에 회식 하나가 잡혔는데 최 검사님도 오셔서 편하게 한잔 즐기시고 가셨으면 해서요.

“회식요?”

-예. 물론 이번엔 프라이빗한 자리라서 1/N로 나누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농담조 말에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금요일이면 따로 정해진 일정은 없어서 괜찮을 겁니다.”

-그러면 그날 저녁에 케라스호텔에서 뵙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회식 장소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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