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님 출세하신다!-37화 (37/341)

천망 (4)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이철용 부회장은 눈에 띄게 안색이 밝은 모습이었다.

그의 경쟁자이자 친동생인 이철기 부회장이 구속이 되며 그는 완전히 주옥그룹을 손에 넣게 된 탓일 터.

“저야 늘 범죄자 꽁무니 쫓느라 바쁘죠. 부회장님은 신수가 훤하게 변하셨습니다.”

“하하하, 검사님 덕분이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음 달이면 회장 취임식이거든요. 혹시 초대해도 괜찮겠습니까?”

“됐습니다. 괜히 얼굴 비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요. 언론에 관심받으면 서로에게 안 좋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집 안을 살피며 감탄을 뱉었다.

“꽤나 좋은 오피스텔입니다. 여기서 거주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사람을 만날 때만 쓰는 장소입니다.”

“역시 철저하십니다.”

“부회장님이 챙겨 주신 덕분에 하나 마련했지요.”

이철용 부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바로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배우가 필요합니다.”

“배우요?”

“예. 죄를 뒤집어쓸 배우가 아니라, 노출 신을 촬영해 줄 진짜 배우가 필요합니다.”

“허어.”

그는 턱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현수, 김주철, 남우현. 세 명을 아십니까?”

“잘 알죠. 전부 다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들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철용 부회장은 흥미로운 듯 턱을 매만졌다.

“뭔가 생겼군요.”

“그 녀석들이 SL그룹과 손을 잡았습니다.”

“SL그룹요?”

여태껏 온화하던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SL그룹을 라이벌을 넘어서 원수, 쓰러뜨려야 할 숙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주옥그룹이었으니까.

“허어어.”

이철용 부회장은 분노를 삼키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더럽게 밝히길래 넉넉히 챙겨 줬는데,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부 다 날리겠습니다.”

그 말에 이철용은 눈을 빛내며 똑바로 앉았다.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걸 위해선 배우가 필요합니다.”

“말씀만 하시죠.”

“제가 성 접대받는 영상을 구하려고 강현수 부장이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이걸 역으로 이용해서, 그에게 저로 위장한 배우의 영상을 넘기려고 합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나의 신체 사이즈와 한지유의 신체 사이즈가 적힌 메모를 그에게 넘겼다.

“여기에 맞는 남자와 여자의 잠자리 영상을 구해 주십시오. 당연한 말이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절대로 문제가 되면 안 되는 부분.

“합법이어야 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돈만 쥐여 주면 하겠다는 사람은 널렸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관계를 맺고 동의하에 촬영했다면 합법이 되는 거죠.”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메모를 소중히 접어 품에 넣었다.

“동영상이 세간에 공개될지도 모릅니다.”

“얼굴은 공개되지 않는 거잖습니까?”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1주일이면 충분합니다.”

1주일.

역시나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그의 믿음직한 표정을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제가 터뜨리기 전까지는 그 세 명에게 평소와 똑같이 대해 주십시오. 돈 먹이는 건 액수가 줄어도 상관없지만, 녀석들에게 의심을 사면 안 됩니다.”

“당연하지요.”

그는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나의 일 처리에 필요한 과정이지만, 이런 식으로 전달하면 이철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내게 큰 은혜를 받은 것처럼 느껴질 터.

그에게 빚 하나를 지운 것과 다름없다.

이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오래오래 가시죠.”

“늘 바라는 바입니다.”

***

9월.

북쪽으로 올라갔던 장마전선이 시베리아고기압에 밀려 내려와 정체하며 가을장마가 시작되는 시기.

며칠째 내리고 있는 비는 멈출 기세 없이 세차게 쏟아지며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달리, 머릿속에 떠오른 고민은 쉬이 해결되지 않았다.

“하아.”

“검사님.”

언제 다가왔는지 윤설하가 따듯한 캔 커피를 내게 건넸다.

“이거 드세요.”

“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웬 한숨이세요?”

“이것저것 생각할 게 있어서요.”

진행 중인 사건들은 차차 해결되고 있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파주 요정 건을 마지막으로 배진수 기자를 떠나보내면 언론 쪽에 아는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배진수를 쓰기엔 너무나도 위험성이 클 터.

배진수를 대체할 수 있는 누군가를 반드시 찾아야 했지만, 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인맥 자체가 많지 않았다.

이철용을 통하면 쉽게 구할 수야 있겠지만, 그 기자는 당연히 주옥그룹의 개가 되는 인물일 터.

그런 녀석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송현성에게 다시 부탁하기엔 배진수가 걸렸고, 신용호는 마지막 공판을 앞두고 있는 터라 무언가 부탁하기가 미안했다.

“저한테 말씀해 보세요.”

윤설하는 캔 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며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혹시 알아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 가끔씩 사건 보다 보면, 제가 원래 경찰을 해야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다고 느끼거든요.”

“사건 관련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언론 쪽에 믿을 만한 인맥을 하나 구해야 되는데, 이게 영 쉽지가 않아서요. 주변에 워낙 쌍심지를 켜고 저에 대한 특종만 노리는 사람들이 가득하더라고요.”

“언론 쪽이면…… 제가 정말 믿을 만한 친구 하나 알고 있는데.”

순간, 귀가 확 트였다.

“그래요?”

“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친구인데 진짜 괜찮아요. 저랑 성향이 조금 다르거든요. 완전 정의의 용사 타입이랄까? 불의를 보면 못 참고 그러거든요.”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이런 스타일은 이 스타일대로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면 혹시 저에게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런데 기자 찾으시는 거 아니었어요?”

“언론 쪽 아니었습니까?”

“PD예요. PBC 방송국에 아시죠? 그 프로그램 PD거든요.”

이라면,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대해 캐고 그걸 만천하에 공개하는 정의로운 프로그램.

기자도 좋지만, 소속 PD라면 영향력은 일개 기자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월척을 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자리 한번 마련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죠. 오히려 그 친구가 검사님을 뵙고 싶어 할걸요.”

윤설하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연락해 볼게요.”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속 PD.

만나 봐야 알겠지만 윤설하가 말하는 대로라면, 확실히 내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인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의로운 PD와 비리를 캐내어 부수는 스타 검사.

완벽한 조합이지 않은가?

벌써부터 국민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기분이다.

잠시 후, 윤설하가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취재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고, 한 열흘 정도 후에 한국으로 돌아온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죠.”

“네. 그러면 한번 날짜 정해 볼게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말씀하신 동영상입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USB가 담긴 봉투를 내게 건넸다.

“요청하신 대로 화질은 좋지 않은 편이고 얼굴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연락해 주십시오.”

이철용 부회장의 비서실장은 자신의 명함을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대화가 끝날 줄 알았지만, 그의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회장님께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쭤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세요.”

“혹시 미혼이신 이유가…….”

“남색은 아닙니다. 아직 배우자를 못 찾았을 뿐이죠.”

“아, 그러시군요.”

그는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께서는 검사님께서 높은 곳까지 올라갈 생각이신 만큼 처가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할 텐데 혹시 결혼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그리고 만약 필요하시다면 꽤 괜찮은 집안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은 어필하듯 몇 가지 선택지를 말해 주었다.

“재벌가 집안부터 시작해서 정치가 집안, 법조인 집안 등 원하시는 쪽으로 말씀하시면 얼마든지 저희 측에서…….”

그의 말을 듣다 보니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혀로 왼쪽 볼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요것 봐라?

이철용 부회장 이 인간, 발칙한 생각을 품고 있네.

속으로 그 생각을 삼키고는 태연하게 표정 관리를 한 채 깔끔하게 거절했다.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아직은 혼자가 편합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었다면…….”

“아닙니다. 괜찮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 보세요.”

“예, 쉬십시오.”

그는 고개를 꾸벅이고 나의 오피스텔에서 빠져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바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결혼 주선이라니.

누가 보면 나를 제대로 밀어주려는 거라 할 수도 있지만, 이건 명백한 월권이다.

자신이 영향력을 행할 수 있는 집안의 여자를 소개시켜 줘서 자신의 관리하에 두려고 하는 것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이철용 부회장, 이거 마냥 좋은 인물만은 아니네.

재벌가에서 자란 데다가 총수의 자리에 오르는 게 확정된 만큼 누군가와 동등하게 서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겠지.

그렇다고 하나, 나까지 자신의 밑에 두려고 하는 건 허용할 수 없다.

겉으론 굳건한 듯이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서로의 그릇 크기를 확인하는 염탐의 시간이라는 게 더욱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물론, 저쪽의 속내를 알아챘다고 한들, 당장 관계가 깨지거나 흔들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더 오래가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확실해졌으니까.

최소 몇 년간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굳건하게 손을 잡고 있을 테지.

문제는 그다음이다.

녀석에게 받아먹은 120억은 그와 나를 둘 다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기에 문제가 될 리가 없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 간에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무래도 이 인간의 약점도 하나 쥐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재벌가의 총수만큼 모가지를 치기 어려운 인물은 없다.

그렇기에 아주 확실한 목줄을 쥐어야 한다.

그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천망(天網)과도 같은 목줄을.

역시 이 바닥엔 만만한 인간이 하나도 없다니까.

그래서 더 재미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지만.

나는 다리를 꼬며 잔에 담겨 있던 와인의 내음을 깊게 들이마셨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면 대체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어떤 인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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