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4)
120억.
집으로 들고 올라오는 것만 해도 한 세월이 걸린 큰돈이다.
재벌들의 비자금만큼 깔끔하게 세탁된 돈은 없다.
은행으로 달려가서 통장에 넣는 등신 같은 일만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추적할 수 없는 검은돈.
조만간 스위스에 계좌를 하나 열러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걸 다 집에 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사실,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
지금껏 뭐 빠져라 일해서 모은 돈이 고작 1억인데, 하룻밤에 호텔에서 2천만 원이 넘는 돈을 쓰고 양쪽 사이에서 줄다리기한 것만으로 120억이라는 돈을 받아 왔다.
광주지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니지, 추억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에게 소식을 전해 주는 게 우선이니까.
사과 박스에서 500만 원 뭉치 스무 개를 챙겨 적당한 싸구려 가방에 집어넣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
“특수부요?”
윤설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하 씨 그런 일 있었던 거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괜찮아요. 뭐, 검사님 승진하시면 좋은 일이니까요.”
말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본인도 그걸 느꼈는지 목소리 톤을 올려 말했다.
“자정이 다 되어서 오시길래 저는 다른 일이 있는 줄 알았어요.”
“다른 일이라니요?”
“갑자기 보고 싶어서 오신다거나?”
분위기를 회복시키려고 던진 농담이라는 걸 알지만, 괜히 더 민망해졌다.
“크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하긴 한데, 내가 가더라도 같이 따라와 줄 수 있겠어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었어요?”
윤설하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빼놓고 가시려고 한 건가?”
“빼놓다니요. 설하 씨랑 아라 씨 둘 다 데리고 가야죠.”
“좋네요.”
특수부의 부장검사인 강현수가 고의로 낸 교통사고 때문에 이렇게 누워 있는 그녀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제가 가면 강현수 부장 표정 볼만하겠는데요.”
“뺨도 때렸다면서요?”
“네. 아주 찰싹 소리 나게요.”
“잘했어요. 이번에도 건들면 한 방 먹여 줘요.”
코를 찡긋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병실을 나서기 전, 들고 온 가방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생활비에 보태 써요.”
가방 안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러고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더니 이내 옆구리를 붙잡았다.
“아야.”
놀란 탓에 갈비뼈에 충격이 온 모양.
“몸조리 잘하세요.”
“아니, 검사님, 이거 너무 큰데…….”
그녀의 얼굴에 감동과 당황이 동시에 차올랐다.
“돈 때문에 힘들면 언제든 말해요. 눈치 보지 말고.”
임성진의 밑에서 돈 때문에 서류 조작을 했고, 그로 인해 모진 짓을 당했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직장 상사로서 그런 부담감은 덜어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정에 여유가 생겨야 바깥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평소와 달리, 내 손에 120억이라는 큰돈이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감사합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꾸벅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병실을 나섰다.
이제 윤설하는 완벽한 내 사람이다.
***
“선물은 만족했나?”
강현수 부장검사는 능글스럽게 물었다.
선물은 개뿔, 한지유와 자면 그걸 빌미로 내 목줄을 쥐고 흔들려는 속셈이었겠지.
지금, 분명 속으로는 왜 방을 옮겼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을 터.
“만족만 했겠습니까?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그랬다면 다행이지.”
그는 더러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방을 옮겼던 것 같은데…….”
말이 나오자마자 강현수 부장을 째려보자, 그는 괜히 제 발 저린지 변명을 했다.
“오해는 말아. 한지유한테 들어서 알게 된 거니까.”
한지유가 말했을 리가 없지.
내 목줄을 쥐었다고 생각하며 신난 마음이었을 텐데, 막상 까고 보니 몰래카메라에 아무도 찍히지 않아서 울분이 터지는 걸 삼키느라 열깨나 받았을 거다.
“오해한 적은 없습니다만.”
별일이냐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 번쯤은 사치 좀 부려 봐야겠더라고요. 마이너스 통장이 있어야 정신 차리고 열심히 일할 테니까요.”
“아, 그런가.”
그의 입가엔 아쉬움의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미련을 갖는 모습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간 보는 건 여기까지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래 생각해 봤는데.”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며 말했다.
“동료의 뒤를 쫓아서 그들을 쳐내고 올라가는 것보다는 권력의 흐름에 합류해 호사를 누리는 삶이 더 멋지지 않을까합니다.”
그제야 강현수 부장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잘 생각했어.”
그는 손을 테이블 위로 뻗었다.
악수를 하며 잡은 그의 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강현수는 비열한 눈빛으로 말했다.
“권력이란 게 멀리 있을 땐 두려워 보이지만, 가까이 있으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거든.”
“아, 그런데 저도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예상치 못했다는 듯 강현수의 눈썹이 으쓱였다.
“제가 욕심이 조금 많아서요.”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 그를 위해 추가로 설명했다.
“저는 달콤한 게 있으면 나눠 먹고 싶지 않아요. 제가 독점하고 싶지.”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한지유. 다른 사람 주지 마십시오. 저 혼자 독차지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강현수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껄껄 웃었다.
“꽤나 만족스러웠나 보이.”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역시 우리 최 검사, 아니, 최 부부장 남자네.”
“콩이 한 쪽이면 한입에 쏙 넣어야지, 그걸 왜 나눠 먹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바로 현명한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의 표정에서 생각이 드러났다.
분명 그는 내게 한지유를 접대시켰던 게 특수부로 오게 된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국내 톱스타인 그녀와 잤다면, 권력의 달콤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테니까.
그 덕분에 강현수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자연스레 특수부로 녹아들 수 있었다.
드디어 본게임 시작이다.
“자네, 아직 펜트하우스 가 본 적 없지?”
“펜트하우스요?”
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걸렸다.
“마침 오늘 밤에 파티가 있거든. 가서 인사라도 돌리자고.”
***
“특수부로?”
김석원 고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간다고 얻을 게 있겠어?”
“지금까지 제가 조사한 것들은 고작해야 수박 겉핥기일 뿐입니다. 고검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녀석들은 어차피 본진을 칠 수가 없습니다. 꼬리 자르기든 덮어씌우기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겁니다.”
그 말엔 수긍하는 듯 고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옥메디컬에 대한 정보와 함께 부장검사들의 비리가 담긴 사진 및 서류들을 고검장에게 보여 주며, 아예 그 뿌리를 캐내기 위해 특수부로 잠입하겠다고 보고했다.
고검장이 듣기엔 상당히 합리적이면서도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감찰부에서 스파이를 보내 큰 건을 터뜨리는 건 영화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니까.
물론, 보고한 대로 그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잠입하는 건 아니다.
고검장에게 말하는 건 일종의 보험.
만약, 그곳에서 내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면, 얼마든지 감찰부의 일을 위해 잠입한 것으로 퉁 치고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없이 그곳에 적응한다면, 감찰부의 태를 벗고 특수부에 남으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이 일은 퇴임까지 1년 6개월밖에 남지 않은 고검장 외엔 아무도 모른다.
그 세월만 지나가면 특수부에 계속해서 남아 있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특수부에서 부부장검사 자리까지 제안을 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확인해 보니까 특수부 부부장검사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그 자리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김석원 고검장은 한참 동안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최 검사.”
“예.”
“내가 얼마나 이 자리에 힘들게 올라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네는 알 거야.”
그는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 어마어마한 자리에 올라왔으니 정년하기 전에 멋진 작품 하나는 터뜨리고 가야 하지 않겠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작품 한번 멋들어지게 그려 봐. 일이 잘못되더라도 언제든지 감찰부로 돌아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지도 마.”
“물론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비리 게이트를 터뜨릴 수 있도록 준비해 보겠습니다.”
“믿네, 최 검사.”
됐다.
당분간 특수부와 김석원 고검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을 테지만, 그거야말로 내 특기.
이제 재미있을 만한 일들만 남았다.
***
“긴장할 필요 없어.”
“높으신 분들이 많다고 하니 괜히 목도 메네요. 크흠.”
내가 목울대를 울리는 모습을 보고 강현수는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깍듯이 인사하고 거절 안 하면 되는 거야.”
그게 인간관계에서 제일 어려운 것일 텐데.
호텔 엘리베이터는 쉬지도 않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이쪽 라인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도비호텔을 이용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호텔 사람과도 커넥션이 있는 모양.
이윽고 도비호텔의 최상층인 37층에 도착했다.
37층, 펜트하우스.
누군가가 주거하는 목적이라기보단, 이쪽과 관련된 사람들을 위해 아예 개조를 해 두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자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과하지 않게 신나는 음악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휘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
대형 연예기획사의 대표부터 시작해서 서울 시의원, 지식경제부 차관, 경기도지사. 심지어는 야당 원내대표와 여당의 핵심 국회의원이 와인 잔을 들고 화기애애하게 웃는 경이로운 모습까지 보였다.
그뿐이랴, 정장을 입은 남성들과 상반되게 여성들은 몸의 절반 이상이 드러나는 옷을 걸친 채 돌아다니고, 남자들은 눈에 드는 여성들을 잡고 마음껏 더듬고 있는 상황.
그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웃음이 났다.
적당히 이름을 날린 녀석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곳.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그리고 이끌어 갈 핵심 인사들이 모여 서로에게 눈도장을 찍는 장소.
진정한 권력이 숨 쉬는 곳.
그래, 이곳이 바로 내가 간절하게 꿈꿔 왔던 진짜 왕들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