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3)
카드 키에 적힌 방으로 가는 대신, 로비로 향했다.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카드 키를 보여 주며 물었다.
“이 옆방 비어 있나요?”
“잠시만요.”
컴퓨터를 확인한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쪽은 체크인이 되어 있는 상태고, 반대쪽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직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참고하라는 듯이 한마디를 보탰다.
“비어 있는 방은 카드 키에 나온 객실과 달리, 프레지던셜 스위트룸입니다.”
이름부터 너무 거창하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1박에 얼마나 하죠?”
“1천7백만 원입니다.”
말없이 눈을 감았다.
역시 노는 물이 다르다.
고작 1박에 사회 초년생의 연봉이라니.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원은 영업용 미소와 함께 말을 더했다.
“아, 부가세와 봉사료는 미포함된 금액입니다.”
1박에 1천7백만 원.
그것도 부가세와 봉사료가 각각 10%씩 붙으면 2천만 원이 넘어가는 돈이다.
평소 같으면 살이 떨릴 금액이지만, 최대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위험성을 줄이는 일이다.
한두 푼 아끼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다.
게다가 이철용 부회장으로부터 거금도 받지 않았는가.
차로 돌아가면, 지금쯤 트렁크는 물론 뒷좌석과 조수석까지 박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부로 나는 100억대 자산가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했다.
“그 방으로 주세요.”
***
카드 키를 받아 곧장 엘리베이터를 통해 36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는 굉장히 긴데 문은 몇 개 없다.
방 하나가 엄청나게 넓다는 뜻이겠지.
지체하지 않고 강현수에게 건네받은 카드 키에 나온 객실로 향했다.
3604호.
카드 키를 대자, 부드럽게 잠금 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객실로 들어가서 거실을 넘어 침실로 들어가자, 여자 하나가 바들바들 떨며 침대에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한지유다.
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가운을 잡았다.
“옷 제대로 입고 짐 챙겨서 옆에 3605호로 들어오세요.”
간단명료한 말을 한 직후, 객실 안을 스윽 훑어보고는 홀로 나가 3605호로 들어갔다.
옆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객실.
객실 안에 또 복도가 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커다란 거실과 함께 내가 사는 집의 거실보다 큰 주방 그리고 몇 개나 되는 방이 펼쳐져 있었다.
궁금해서 직접 세어 봤다.
게스트룸, 오피스룸, 미디어룸, 다이닝룸, 주방, 거실, 로비, 트리트먼트룸, 메인 침실, 서브 침실, 게스트 침실까지.
뿐만 아니라, 스파가 딸린 커다란 욕실도 두 개나 있다.
한 100평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괜히 1박에 2천만 원이 아닌 듯, 입이 떡 벌어질 만한 크기다. 인테리어도 화려하고.
100억이 넘는 비현실적인 액수부터 시작해서, 1박에 2천만 원짜리 방.
게다가 한지유까지.
내가 30년간 살아온 한국, 늘 봐 온 서울이라지만, 같은 곳이 아니다.
신세계.
‘그들이 사는 세상’에 한 발자국을 내디딘 느낌.
방 구경을 다 끝내기도 전에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모자를 푹 눌러쓴 한지유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들어와요.”
그녀는 여전히 지레 겁을 먹은 눈을 하고 있었다.
침실에서 미리 꺼내 놓은 가운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쪽에서 갈아입고 나와요. 가방도 저쪽에 두고.”
다시 한지유의 눈에 절망이 나타났다.
침실로 들어간 그녀를 뒤로하고 주방에서 따끈한 차 두 잔을 준비했다.
고급스럽게 포장이 된 꽃 차인데, 프랑스어로 적혀 있어 읽지는 못했다.
체크아웃 할 때 다 포함될 금액이지만, 2천만 원에 티끌 하나 더한다고 티가 나겠는가?
차를 끓여 거실로 가져가자, 이미 가운으로 갈아입은 한지유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의문스러운 눈빛을 띠는 그녀의 앞에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차 한 잔 마셔요. 이상한 거 타지 않았으니까 걱정 말고.”
먼저 차를 한 모금 들이마시자,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조용히 차를 마셨다.
“침실 문 닫고 나왔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편하게 말했다.
“오늘 그쪽 몸에 손댈 생각 전혀 없으니까 경계심 좀 풀어요.”
“네?”
한지유는 놀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청아하게 빛나는 동그란 눈에 오뚝한 코, 앵두 빛깔의 작은 입술과 웨이브 컬이 들어간 갈색 머리. 그리고 주먹만 한 달걀형 얼굴.
말 그대로 한국의 미를 갖춘 정석적인 미인이다.
확실히 톱 배우의 아우라가 느껴진달까.
만약 미래 문자로 몸을 섞는 영상을 미리 보지 않았으면 아마도 그녀를 안았을 테지.
얼굴뿐만이 아니라, 가운을 꽉 조여 맨 탓에 몸매의 굴곡이 다 드러나는지라 더욱 충동이 일었을 테고.
사실, 옷 위로 굴곡이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가운 사이로 새하얀 속살이 은밀하게 살짝살짝 드러나고 있을 정도니 시선을 두기가 민망했다.
테이블 밑에 있던 담요를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그거라도 덮어요. 시선 두기 민망하니까.”
“……네.”
그녀가 담요를 덮고 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방에 몰래카메라가 있어서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그녀는 놀란 듯이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이에요?”
“네. 아마도 100%. 혹시나 그쪽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의 옷이나 가방에 몰래카메라나 도청기가 달려 있을 수도 있어서 갈아입고 오라고 한 거고요.”
몰래카메라.
생돈 2천만 원까지 들여서 이 방으로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미래 문자에서 나와 한지유가 뒹굴었던 영상.
조금 전의 객실을 슬쩍 훑어봤을 때, 그 침실이 미래 문자에서 보았던 장소라는 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이 객실을 빌린 것이다.
그곳에 있다간, 실제로 한지유와 잠을 자지는 않더라도 몇 마디 나눈 대화 내용까지 전부 녹음되어 강현수에게 들어갈 테니까.
양아치 새끼.
선물이라고 해 놓고 약점이나 잡으려고 하는 비겁한 짓이라니.
부장검사라는 직위가 쪽팔리지 않나 모르겠다.
“여긴 보는 눈도 없고 듣는 사람도 저밖에 없으니까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저 검사예요. 지켜 드릴 테니까 믿어 줘요.”
한지유를 설득해야 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과정을 알게 되면, 최소한 강현수의 어디가 구린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절 여기로 데려온 사람도 검사잖아요.”
한지유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 인간, 부장검사예요. 직위도 더 낮으실 테고…….”
“저는 감찰부예요. 검사들이 잘못한 걸 바로잡는 사람입니다.”
“…….”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강현수 부장은 저도 싫습니다. 말씀해 주셔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
긴 설득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녹음을 하는 것도 허용했다.
단, 외부에 절대 유출되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하고.
과거, 한지유의 부모님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되어 몇 가지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사이비 종교에서 빠져나오며 당사자들과는 원활하게 합의를 하여 잘 해결했지만, 형사법으로 엮이는 게 있어서 부모님을 볼모로 삼아 성 접대를 하기로 강현수로부터 협박당한 상황.
총 다섯 번의 접대를 하면 부모님 건을 묻어 주기로 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오늘이라고 한다.
국민을 지켜 줘야 할 검찰들이 도리어 법을 이용해 시민을 협박하고 있다니.
나라 꼴 아주 잘 돌아가고 있네.
아마도 강현수 부장은 한지유라는 카드를 이용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협상하는 데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까지 채울 게 뻔했다.
진짜 이 쓰레기 같은 자식.
듣다가 몇 번이고 욕설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어렵게 입을 열고 있는 한지유를 생각해 꾹 참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뒤 녹음을 종료했고, 그제야 한지유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말없이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제가 한번 힘써 볼게요.”
“……정말요?”
한지유는 한 줄기 희망이 내린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요?”
그녀의 눈에 잠깐이나마 불안함이 스쳤다.
“나중에 저를 도와주셔야 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법정까지 가는 상황이 되거나 언론에 노출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꼭 도와주세요.”
“도움이라면 어떤…….”
“협박받은 사실이 있다, 그래서 성 접대를 강요받았다. 이 정도 증언이면 됩니다. 아니면, 방금 녹음 파일이 진실이라고 답해 주시는 것으로도 괜찮고요.”
걱정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나머지 성 접대 네 번 모두 없애 드리겠습니다. 강현수를 빠른 시일 내에 처벌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이런 자리에 오는 건 막도록 할게요.”
한지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시고 믿으세요.”
됐다.
그녀는 내 편에 섰다.
이미 녹음까지 한 이상, 그녀가 나의 뒤통수를 치는 건 불가능해진 상황.
만약 내가 녹음 파일에 한지유가 몸을 판다는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워 언론에 흘리기라도 하면, 한지유가 앞으로 연예계에서 매장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그와 동시에 강현수의 목줄도 쥐었다.
한지유에게 성 접대를 하도록 강요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협박죄는 물론이고 그녀의 팬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그저 나에게 달려 있다.
내가 어떤 프레임을 중심으로 이 사실을 보도할지에.
한지유가 성 접대를 한 의혹이 있다는 것에 집중할지, 그녀에게 성 접대를 강요한 부장검사가 있다는 것에 집중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 강요로부터 감찰부의 스타 검사가 구해 냈다는 것에 집중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언론과 여론을 이끌어 갈 수 있다.
물론 최선은 이 녹음 파일을 공개하지 않는 선에서 강현수를 쥐고 협박하는 것이겠지만,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법.
지금 당장 녹음 파일을 공개하거나 이걸 이용해 협박할 생각은 없다.
쥐고 있다가 적절한 때에 터뜨리는 것.
그게 진정한 언론 플레이니까.
“감사합니다.”
한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탓에 덮고 있던 담요가 스르르 떨어지며 다시금 그녀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이마를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갈아입고 나와요. 이제 체크아웃 할 테니까.”
“아, 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객실을 다시 한번 주욱 둘러보았다.
2천만 원짜리 방을 빌려 놓고 하루를 자기는커녕, 1시간 만에 간다니.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잠시 후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함께 VIP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로비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직전, 한지유는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기, 검사님.”
“네?”
“명함 하나만…….”
“명함요?”
“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세 져서 죄송해서요. 나중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연예인이 사 주는 밥이라면 마다할 필요는 없을 터.
한지유에게 명함을 건넸다.
“조심히 가세요.”
“들어가세요.”
그녀를 보낸 뒤 체크아웃을 끝내고 차로 향했다.
발레파킹을 맡겨 놓은 차에 탑승하자, 한숨부터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뒷좌석까지 사과 박스가 가득 차 있다.
조수석 바닥에도 박스 하나가 놓인 상태.
슬쩍 확인하자, 노란색 돈뭉치가 가득했다.
120억.
이 돈만 아니었어도 저 비싼 방에서 하루는 묵고 오는 건데, 주차장에 이 큰돈을 재워 두기엔 불안해서 잘 수가 있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운전대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