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2)
“저를 돕는다고요?”
“예.”
“왜죠?”
확인해야 했다.
그저 이번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말을 던지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이걸 덮는 게 평생을 약속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건, 그쪽이나 저나 잘 알 텐데요.”
“평생이라고 약속드린 적은 없습니다.”
그도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다.
“이해관계가 맞고 서로의 능력이 되면 함께 가는 거죠. 물론, 한쪽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말입니다.”
재벌이라는 절대 갑.
대한민국에서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재벌은 재벌인가.
물론 쫄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 상황은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한 입장.
적어도 이 테이블에서는 갑과 을의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나 또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
“저는 고꾸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주옥그룹만 건재하다면 평생 함께 가겠군요.”
“그러셔야죠.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아무한테나 이런 제안을 하지는 않아요.”
그는 강현수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나라 검사계는 썩었습니다. 저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제 주머니만 보고 굽실대거든요. 어떻게 하면 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자신의 배를 채울까, 무엇을 해야 제 기쁨을 살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제 측근이 될까, 이런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는 강현수의 빈자리로 향했던 한심한 시선을 거둔 뒤, 나를 보며 고백하는 투로 말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검사님을 조사했습니다. 미행도 붙였고요.”
미행을 붙인 건 알았지만 조사까지 했을 줄이야.
그러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철용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조사해서 뭔가 나왔나요?”
“예. 다른 검사들이랑 다르시더군요. 대다수의 검사들은 사소한 것에 목을 맵니다. 기업 하나를 박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고작 명품 시계, 핸드백, 푼돈에 아주 좋아라 하며 스스로 목줄을 채우죠. 그런데 최 검사님은 그러시지 않더군요.”
강현수가 제안했던 2억을 거절했던 게 임팩트가 있었던 모양.
“가장 결정적으로 그들과 다르게, 최 검사님은 야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군가에게 굽실대고 떡고물을 얻어 보려는 게 아니라, 본인의 능력으로 그 야망을 이루려고 하시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능력이 야망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출중하신 게 더욱 메리트고요.”
마음에 든다라.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다.
본인이 나를 평가한다는 뜻이니까.
“제 사람이 되어 주시죠. 그러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제 사람이라니요. 저는 누구 밑에 들어가는 걸 못 합니다. 다른 이의 평가를 받는 건 더욱 지양하고요.”
딱 잘라 말하자, 그는 아차 싶었는지 바로 말을 바꿨다.
“아, 불쾌하게 들리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정하지요. 저와 손을 잡아 주십시오.”
물론 그가 실제로 손을 뻗진 않았다.
대신 다른 하나를 물었다.
“철기 쪽에서는 얼마나 건네주던가요?”
어떤 정보를 줬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받았느냐를 물어보다니.
몸 쪽 꽉 찬 직구를 맞은 듯한 느낌이다.
이철용 배포에 감탄이 나오는 걸 숨기느라 혼났다.
이게 진정한 재벌의 면모지.
이러기 위해서 비서실장을 보내는 대신 직접 나온 것이었나.
어쨌거나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니 주옥그룹이 장남 쪽으로 기울 수밖에.
“영업 비밀입니다.”
“얼마가 되었건 간에 다섯 배를 드리겠습니다.”
이철기 부회장에게 받은 돈은 12억.
그 다섯 배면 무려 60억이다.
로또 1등이 되어도 10억을 받을까 말까 한 세상인데 고작 줄 서는 것으로 60억이라.
노는 물이 달라지니 주변에 있는 물고기도 달라진다.
“다섯 배라.”
큰 액수에 놀라 홀로 되뇌어 말한 것이지만, 이철용의 입장에서는 적다고 한 것으로 착각해서 받아들인 모양인지 다시 금액을 올렸다.
“열 배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비현실적인 액수에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돈을 밝히지 않는 인물로 본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밝히는 것과 그저 받는 건 다르지요. 주머니가 빵빵해지는 걸 꺼려 할 사람이 지구에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그의 입가엔 능글거리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40대 후반의 연륜.
그 긴 세월 동안 재벌가에서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며 생존해 온 투지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박스 열 개를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넌지시 액수를 던졌지만,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돈놀이하는 사람한테 돈 말고 가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계약금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쓰십시오. 오늘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의 얼굴에선 아까운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금 100억을, 아니, 120억을 쓴 인물이라는 태가 전혀 나지 않을 정도.
문득 그의 비자금이 얼마인지 조사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피어오르는 걸 힘겹게 눌렀다.
나는 긍정의 대답을 하는 대신,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오늘, 김영란법으로 목이 달아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한우 송아지를 쓴 듯,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맛이다.
그걸 삼키고 나서 포크를 내려놓자, 이철용 부회장이 손을 뻗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그와 악수를 했다.
“집에 가시는 길에 차가 묵직할 겁니다.”
그의 표정엔 여유와 만족이 동시에 피어났다.
악수를 마친 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제가 야간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일어나지요.”
“아닙니다. 강현수 부장이 들어올 테니 편히 식사하시지요. 강 부장 말로는 최 검사님께 드릴 선물도 따로 준비해 놨다고 하니, 받고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요?”
“예. 저도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강 부장이 비밀을 좋아하는 친구라.”
그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선물이 뭔지는 모르는 모양.
혹시 윤설하와 관련된 것이려나.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예.”
서로 고개를 꾸벅이고 떠나가기 직전, 다시 그를 붙잡았다.
“부회장님.”
“예, 검사님.”
“이틀 뒤에 뉴스 보십시오. 저도 선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선물요?”
“예, 기대하십시오. 뉴스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의 얼굴에 흥미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선물은 기대감이 클수록 받았을 때의 기쁨도 큰 법이지요.”
“들어가십시오.”
“예.”
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강현수 부장이 활짝 웃는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야, 역시 최 검사 아주 현명해. 상황에 따라 판단을 바꾸는 게 진정한 지식인이니까.”
멍청한 자식.
나는 상황에 따라 판단을 바꾼 게 아니라, 애초에 이쪽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되도록 판의 흐름을 바꾼 것이고.
이런 녀석이 부장검사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박승수 부부장이 아니라 이 녀석이 내 위에 있었다면, 기수를 뛰어넘어서 3년 안에 부장 자리를 꿰찰 수 있을 텐데.
그저 아쉬울 따름.
감정을 숨기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식사하시죠.”
“그래. 여기 음식 맛이 아주 일품이라고. 가끔 올 때마다 감탄이 멈추질 않는다니까.”
가끔이라.
이 녀석이 사비를 들여서 오는 건지, 접대를 받으러 오는지, 아니면 오늘처럼 은밀한 거래를 하러 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워낙 더럽게 돈을 받아 처먹고 사는 인간이라 알 수가 있나.
“자네도 줄 잘 선 거야. 내 밑으로 오면 알겠지만, 우리 라인이 아주…….”
강현수의 말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 내가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
“부장님.”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저는 이철용 부회장과 손을 잡았지, 부장님과 손을 잡은 게 아닙니다.”
“뭐?”
강현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넘어가기 전에 언제든지 사진 뿌릴 수 있습니다.”
“너, 내가 가만히 죽을 것 같아? 너랑 같이 엮여서 물귀신으로 죽을 수도 있어!”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부장님이 할 수 있으실 것 같습니까?”
“…….”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못 한다.
절대 못 한다.
물귀신으로 나를 죽인다면, 부회장을 무조건적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 외에도 그는 이철용으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받아먹었을 게 틀림없으니 이철용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
방금 이철용과 손을 잡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내 배경까지 생겨난 것과 다름없다.
“상황 파악부터 하십시오. 아직도 제가 당신 밑에 있는 것 같습니까?”
강현수의 가슴 끝에서 화가 차오르는 게 보였지만, 그는 그걸 꾹 참아 내고 진정했다.
아무리 라인을 잘 타서 올라왔다고 한들, 무려 특수부의 부장검사다.
그저 라인을 타는 것만으로 올라올 자리가 아니란 걸 증명하듯이 그는 곧바로 판단을 내리고는 내게 물었다.
“원하는 게 있나?”
“글쎄요.”
“…….”
짧은 정적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특수부의 부부장 자리가 공석이야.”
잠깐만.
미래 문자에서 내가 특수부의 부부장검사로 옮긴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오늘이라는 건가?
문자의 보낸 이가 34였고, 현재 나이는 서른.
부부장검사로 4년 동안 재직을 했으니 시기상으로는 딱 적절하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4년 뒤에 팽을 당한다는 건데.
이렇게 속 보이는 강현수 부장검사에게 당했을 리는 없다.
윗선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던 걸까.
문자에서 보았던 것처럼 약점을 잡혔을 확률도 적지 않을 테지.
주옥그룹과 이어져 있는 라인에서는 나보다 그가 더 탄탄한 입지를 보유했을 테니까.
강현수 부장은 인심 쓰듯 말했다.
“자네가 온 뒤에 내가 차장검사 자리로 올라가면, 부장 자리는 고스란히 자네에게 넘기고 간다고 약속하지.”
특수부의 부부장검사 자리라.
서울중앙지검의 3대 요직 중 하나이면서 지금보다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것이다.
감찰부에 남는다고 한들, 부부장검사 자리는 확실하지 않다.
그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해야 하는 형국.
내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가 달콤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네도 고검장 라인이라는 건 알아. 그런데 알잖아, 고검장 자리는 은퇴 코스라는 거. 고검장 그 양반, 강직하고 굳세서 윗선에 로비하는 것도 아니잖아. 2년 뒤에 정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은퇴라고. 그러면 자네 줄이 누가 있어?”
강현수 부장의 말은 직설적이면서도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맞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부부장검사 자리에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2년이 지나고 고검장이 퇴직을 하게 되면, 기껏해야 내 라인은 부장검사를 달 예정인 박승수가 전부.
이철용 부회장과 손을 잡았다고 한들, 내가 더 올라가지 못하면 힘을 쓸 수가 없다.
무너지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라인까지 잡아야 한다.
“이번에 검사장님이 대검으로 들어가시면, 서울중앙지검은 물론이고 대검까지 우리 라인이 차지하는 거야. 승진하는 건 시간문제라니까?”
특수부의 부부장검사라.
“혹시나 임성진이 녀석 때문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어. 이 바닥에서 떨어져 나간 놈은 아무도 취급하지 않으니까.”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임성진의 직속 라인이었던 임주영 검사장이 직접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영입하려고 했으니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제야 강현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너무 늦지 마. 부부장검사 자리가 언제까지고 공석은 아닐 테니까.”
미래 문자에서는 내가 그에게 책잡힐 일을 하고 약점을 잡히는 걸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걸 미리 알고 가서 주의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알고도 당하는 건 병신이니까.
오히려 특수부에 들어가 자료를 모은다면 반격의 여지가 생길 터.
위기에서 강현수를 몰아내고 특수부의 부장검사 자리에 오르는 게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식사를 끝마칠 무렵, 나이프를 놓으며 물었다.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지. 열변을 토하느라 깜빡할 뻔했어.”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것을 내 가슴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좋은 시간 보내라고.”
그러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먼저 떠나갔다.
뭐지?
그가 나간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켓을 확인하자, 다름 아닌 카드 키가 등장했다.
그것도 이 도비호텔의 카드 키.
36층이면, 최상층 펜트하우스의 바로 밑층.
아마도 최고급 룸일 텐데.
좋은 시간이라고 한 것까지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것일 테지.
피하면 결국은 쫓기게 되어 있다.
먼저 약점을 잡고 흔들어야 한다.
올라가야 한다.
즐기러 가는 게 아니라, 강현수의 목줄을 쥐기 위해서 가야 한다.
분명 빈틈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