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새우 배 불린다 (4)
“후우.”
가슴을 가라앉힌 뒤 정보를 하나씩 정리했다.
우선 나와 한지유가 몸을 섞는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영상이 조작된 것이라면, 이 동영상을 보여 줬을 때 내가 강현수에게 반박을 하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이게 서른 살, 올해에 벌어질 일이다.
문자에 나온 동영상만으로는 한지유와 내가 눈이 맞아서 몸을 섞은 건지 성 접대를 받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성 접대를 받았다면 그 자체로 협박 무기가 되지만, 만약 한지유와 내가 눈이 맞아서 몸을 섞었고 실제로 연인 사이라면 영상을 퍼뜨려 그녀의 이미지에 타격을 준다는 것으로 협박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후자의 가능성이 현저히 적더라도, 일이 벌어지기 전엔 쉽사리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추측과 수사에서는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게 핵심이니까.
그다음은 문자에서의 일이 벌어지는 시기인 서른네 살.
무려 4년 뒤다.
대화를 들어 보면 나는 부부장검사에 올라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감찰부의 부부장검사가 아니라 특수부의 부부장검사라는 것.
그것도 서른 살에 들어간 이후로 쭉 특수부에 있는 상태고.
올해 내가 특수부로 들어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면 저 문자의 내용은 완전히 엎어지겠지만, 일단은 특수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가정을 해야 한다.
이적한 특수부에서 부부장을 달고 4년 동안 근무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내가 쫓겨나야 하는 상황.
저렇게 뒷거래를 하는 걸 보면, 합리적인 건 아니고 아마 꼬리 자르기나 강현수를 대신해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무언가가 있을 터.
그리고 하나 더.
이 모든 게 엎어지더라도 불변할 하나의 정보도 있다.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4년 뒤에 벌어질 커다란 소용돌이에서 내 향방이 정해질지도 모른다.
엄청난 정보들이다.
고작 하나의 문자였지만, 값을 형용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의 내용이 담겨 있다.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아주 유익하게.
***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의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윤설하가 실내등도 끈 채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고 있을 때, 한 대의 차가 좁고 어두운 공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윤설하는 먹던 샌드위치도 내려놓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SUV. 차량 번호는 35다 3741.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사진을 찍어 최서준에게 전송했다.
-받는 이 : 최서준
-남우현 도착했습니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보낸 이 : 최서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세요.
든든한 답장을 받고 다시 차량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외제 차 한 대가 추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며칠 전 윤설하가 보았던 차량. 95로에 4106.
특수부 강현수 부장검사의 자동차다.
SUV 옆에 그의 차량이 정차했고 이내 시동이 꺼졌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량에서 내려 마주 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거리가 멀어 어떤 대화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용은 뻔했다.
이번에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무마시킬지. 그도 아니면 주옥그룹의 돌아가는 정황.
이 중 하나일 터.
윤설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 댔다.
그렇게 약 5분쯤 지났을까, 강현수 부장검사가 차량 뒤편으로 가서 트렁크를 열더니 검은색 가방 하나를 꺼냈다.
윤설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였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반신반의였다.
최서준을 100% 믿었기에 그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걱정하는 건 그가 아니라, 정보였으니까.
이런 완벽한 정보를 대체 누가 흘렸는지, 최서준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광경을 찍는다면 저 두 검사를 완전히 박살 낼 수 있다.
보통 검사도 아니고 무려 서울중앙지검의 핵심 부서인 금융범죄전담부와 특수부의 부장검사들을!
‘이걸 기자에게 건넨다면…….’
엄청난 액수로 보답을 할 것이다.
일개 검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벌어들이는 연봉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금액으로.
물론 윤설하는 자신을 구원해 준 최서준의 뒤통수를 치거나 배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임성진에게서 해방시켜 주고 수사관으로 받아들여 준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사진이 그만큼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되새기는 것뿐.
역시나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윤설하는 완벽하게 사진으로 캐치했다.
돈 가방을 건네받은 남우현은 묵직함을 느끼고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더러운 녀석.’
그의 더러운 미소까지 렌즈에 담겼다.
남우현 부장검사는 가방을 몇 번 들었다가 내리며 무게감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야 SUV의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이 장면까지 완벽하게 찍은 순간.
팟!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고, 그 탓에 휴대폰 화면에 빛이 밝혀졌다.
무음 모드로 해 놓았기에 진동이나 벨 소리가 울리진 않았지만, 화면의 불빛은 숨길 수 없었다.
곧바로 통화를 거절했지만, 이미 새어 나간 빛은 되돌릴 수 없는 일.
그 빛을 목격했는지, 강현수 부장이 남우현 부장에게 무언가를 말한 뒤 조심스레 윤설하의 차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윤설하는 의자를 뒤로 넘겨 최대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강현수 부장은 윤설하가 있는 주변의 차를 전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두 손을 눈 옆으로 모아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의 창문을 하나씩 살피던 강현수 부장이 마침내 윤설하의 차에 다가왔다.
‘제발!’
윤설하는 숨까지 참으며 기척을 내지 않으려 했다.
밤에다가 선팅까지 되어 있는 자동차라 희망을 가졌으나, 언제나처럼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예감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쾅!
강현수 부장이 주먹으로 운전석의 창문을 세게 내리쳤다.
“너 누구야!”
걸렸다.
‘X 됐다.’
윤설하는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여기 있어 봤자 버티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녀는 서둘러 운전석의 등받이를 세우고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시동 소리에 강현수 부장이 다시 한번 창문을 내리치며 살벌하게 소리쳤다.
“너 누가 보냈어, 이 개X끼야!”
윤설하는 곧바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백미러를 통해, 강현수 부장이 주저앉았다가 바로 일어나 자신의 차량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쫓아올 것이다.
그것도 남우현 검사와 함께.
윤설하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전부 최서준에게 보냈다.
그리고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님, 걸렸어요.”
-걸렸다고요?
최서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디예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급하게 집에서 나오려는 모양.
“도망가고 있어요. 일단 사진 보냈으니까 다 저장하세요.”
-어딘데요? 지금 갈게요!
“오지 마세요. 오지 마시고, 혹시 모르니까 사진 다 노트북으로 옮겨 두세요.”
그녀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괜히 왔다가 걸리면 검사님이 시키신 거 들통나요. 무조건 내빼세요. 저는 걸려도 제가 혼자 조사한 거라고 말할 테니까, 검사님은 모르시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 둘 다 살 수 있어요.”
-자동차 본인 차 아니죠?
“친구 이름으로 렌트했어요. 공적으로는 저와 연관성이 전혀 없는 친구라 차량 번호 추적해서는 못 잡을 거예요.”
-따돌리기만 한다면…….
반짝!
백미러에 비친 강한 빛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향등이다.
뒤에서 상향등을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시야에 방해를 주고 있다.
백미러에 보이는 차량은 외제 차.
어느 정도 거리는 있지만, 미친 듯이 밟고 있는 걸 보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
“아니요. 따돌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일단 도망쳐보기는 할 테지만 확신은 없어요.”
계속해서 뒤에서 점멸해 대는 상향등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다.
“검사님, 제가 다시 연락할게요.”
-수사관님, 수사관님! 설하 씨!
윤설하는 애타게 부르는 최서준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전화를 끊었다.
외제 차가 점점 더 가까이 따라붙고 있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차로 렌트할걸.’
후회해도 이미 지난 일이다.
잡힐 가능성이 커져 버렸다.
그럴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증거를 남겨선 안 된다.
사진이 전송되었다는 증거부터 삭제하는 게 급선무.
윤설하는 운전대를 잡은 반대 손으로 최서준에게 사진을 전송한 문자 내역 및 오늘 통화한 목록을 모두 삭제했다.
찍은 사진도 삭제.
그래야 잡히더라도 변명의 여지가 생긴다.
윤설하는 오른발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지만, 렌트한 국산 차로는 외제 차의 속도를 이길 수 없었다.
마침내 바로 옆까지 따라온 강현수가 조수석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차 세워!”
이를 악물었다.
너 같으면 세우겠냐고 소리치고 싶지만, 운전석 창문을 열 수는 없었다.
“야, 안 세워?”
이미 속도는 140km를 넘어가고 있다.
차체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게 느껴졌기에 더 이상 가속할 수가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윤설하는 깊게 호흡을 내뱉었다.
“후우.”
그때, 저 멀리 차량 분기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서 따돌려야 해.’
여기서 쭉 가는 척하다가 우측으로 빠지려고 했으나, 그걸 알아챘는지 외제 차는 오히려 속도를 늦춰서 뒤로 따라붙었다.
‘운전 실력을 믿는 수밖에.’
강현수만 따돌리면, 빠져나갈 가능성은 있다.
그가 윤설하의 뒤로 따라붙었다는 건, 우측으로 빠지면 따라오겠다는 의미.
최선의 방법은 하나뿐.
우측으로 가는 척하다가 다시 핸들을 꺾어 좌측으로 오는 것이다.
만약 강현수의 반응속도가 느리면 그를 우측 분기 차로로 따돌려 보낼 수 있다.
윤설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분기점 직전에 살짝 차머리를 우측으로 꺾었다.
단 한 번의 기회.
강현수의 차량 또한 같은 움직임을 보였고, 윤설하는 자신의 차량이 차선규제봉에 부딪히기 직전에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그 순간, 강현수는 오히려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좌측으로 꺾는 윤설하의 차와 달리 외제 차는 그대로 직진했고, 그 결과.
강현수의 외제 차는 윤설하의 자동차 옆면을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가드레일을 향해 완전히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