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새우 배 불린다 (1)
임성진은 무너졌다.
패잔병 정도가 아니라, 망국의 포로로 잡힌 장수와 같았다.
이미 사표까지 수리된 마당에 사법 고시 건까지 터지자, 그는 더 이상 버텨 낼 힘이 없었는지 백기를 들고 본인의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조원형은 3개월 정직 및 지방 좌천 명령을 받았지만, 반발하지 않았다.
본인은 경제범죄조사부에 남을 것을 기대했으나, 이러한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는 잘려 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덕지인 입장이라 그런지 불만을 갖진 않았다.
나 또한 경제범죄조사부의 사건만 터뜨리고 임성진을 몰아내는 정도로 끝났으면 그저 반짝 떴다가 금방 묻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임성진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해 사법 고시 비리로 다시 언론에 얼굴을 들이민 덕분에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사법 고시 비리가 꽤나 길어진 덕분에 언론에 얼굴을 비칠 기회가 늘었고, 관심 많은 네티즌들이 나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내가 지방에서 이번 건을 잡고 서울고검의 감찰부로 올라온 게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된 탓이 컸다.
지방에서 힘을 숨기고 있다가 친구의 복수를 위해 비리 부장검사를 잡으며 서울로 올라온 검사.
기삿거리 만들기에는 아주 최적화된 소재니까.
제일 신이 난 건 다름 아닌 부모님이었다.
서울고검으로 올라온 것도 모자라 얼굴까지 알려진 덕분인지, 뜸해졌던 선 자리가 다시금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그것도 처음 사법 고시에 패스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막상 서울에 올라오고 보니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검사들이 빵빵한 집안의 배우자를 가지고 있던 탓에 나도 조급함이 들어 선을 볼까 여러 번 고민했지만, 뒤로 미루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를 잡고 결혼하는 것보다는 서울고검에서 자리를 잡는 게 먼저다.
그러려면 여자에 눈 돌릴 시간도 아까우니까.
물론, 출세하려면 좋은 배우자를 둬야 하는 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당장 며칠 전에 형사부에서 지방으로 쫓겨나냐 마냐 하며 간당간당하게 살아남던 검사가 하나 있었는데, 장인어른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막판 뒤집기를 통해 서울시장에 당선되자마자 서울중앙지검의 3대 요직 부서라는 공안부로 옮겨 간 걸 직접 눈으로 봤으니까.
***
6개월.
감찰부에 들어온 지 벌써 6개월이나 지났다.
올해 초, 김석원 차장검사는 검사장으로 올라갔다.
보통 검사장도 아니고 무려 고검장이다. 서울고등검찰청장.
부산이나 대구 등 지방의 고검장을 지내지도 않고 차장검사에서 바로 고검장에 오른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 덕분에 김석원의 위엄은 하늘을 찔렀다.
그 덕분에 그의 라인을 타고 있는 나 또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나는 경제범죄조사부와 사법 고시 이후로도 커다란 두 개의 사건을 더 처리한 덕분에 검사장에게 완전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올해 말에 박승수 부부장이 부장검사로 올라갈 때 그 빈자리에 내가 올라설 수 있다는 희망도 들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지만.
하나 변한 점이 있다면, 그 뒤로는 미래에 관한 문자가 오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
문자 없이도 충분히 감찰부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터라 딱히 문자에 대한 아쉬움이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달까.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신용호에 대한 건을 해결하라고 초자연적인 힘이 도와준 게 아닐까 싶다.
“검사님, 잠깐 괜찮으세요?”
윤설하가 서류 두 장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이 사무실에 들어온 지도 6개월이나 지났다.
임성진 건이 끝난 직후에 내가 바로 수사관으로 데려왔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일 처리 실력은 엄청 났다.
다른 수사관들은 도저히 못하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든 것도 윤설하는 구해 오곤 했으니까.
어떻게 구해 왔냐고 물어보면 늘 ‘영업 비밀’이라고 해서 약 오르긴 하지만, 굳이 관여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알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일할 때 가장 좋은 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말해요.”
“저번에 말씀해 주셨던 금융범죄전담부와 경제범죄조사부의 공통 조사 내용을 파악했는데, 예상했던 바와 같이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못하고 묻혔습니다. 두 사건 모두요.”
최근에는 기업 하나를 파고 있다.
주옥그룹.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력을 갖고 있는 그룹.
소위 말하는 재벌이다.
돈으로 VIP 그 이상의 권한을 누린다는 재벌.
평소 같으면 일개 검사인 내 입장에서는 건드려 봤자 묻힐 게 당연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형제간의 권력 다툼.
주옥그룹의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자식끼리 서로 그룹의 지분을 뺏으려고 다툼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언론전으로 번지진 않았지만, 누구든 그건 시간문제라고 본다.
서로의 약점을 하나라도 캐내기 위해 검찰에게 자료와 함께 금품까지 건네고, 반대편에선 더 많은 돈으로 덮기를 반복하는 상황.
둘 사이에 있는 검사가 제일 득을 보는 것이다.
거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건 금융범죄전담부.
이들은 대한민국에 있는 그 누구의 계좌라도 까발릴 수 있으니까.
아마도 지금쯤이면 평검사라도 최소 몇천씩은 챙기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주옥그룹과 관련된 부서를 파는 건 돈 때문이 아니다.
아주 명백하게 출세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
이렇게 급하게 출혈 싸움을 하다 보면, 분명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간땡이가 붓지 않고서는 그걸 파는 미친놈은 없겠지만, 나는 출세에 미친 놈이다.
여기서 만약 한쪽의 정보를 캐내기라도 한다면 반대쪽에서 무조건적으로 밀어줄 것이기에, 묻히기는커녕 완전히 대서특필이 될 기회를 잡게 될 테지.
확실치 않은 박승수 부부장의 뒷자리 1순위로 나를 굳힐 수 있는 기회.
그리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은밀하게 조사한 끝에 며칠 전, 그 단서를 하나 잡아냈다.
“아마도 두 부서를 컨트롤할 수 있는 누군가가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검사님께서 주신 자료들을 살펴보면, 전부 주옥메디컬을 찔렀을 때만 엄청난 속도로 반응해서 덮고 있었어요.”
경제범죄조사부는 임성진 사건 이후로 완전히 물갈이가 된 탓에 지검장의 직속 라인이 되었다.
그러나 임주영 검사장은 내년에 퇴직을 하는 대검찰청 차장검사의 빈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재벌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을 테니 패스.
물론, 자신의 밑에서 벌어지는 개싸움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게 틀림없다.
혹시나 형제간의 권력 다툼에서 누구든 간에 손을 들어 주기라도 하면 분명 반대쪽에서 임주영이 대검찰청의 자리를 꿰차는 걸 순순히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경제범죄조사부를 실질적으로 컨트롤하는 임주영 검사장이 논외가 되었으니, 경제범죄조사부는 금융범죄전담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 터.
핵심은 금융범죄전담부다.
그러나 문제는 두 개 부서를 컨트롤하는 실세에 대해서 아직까지 확실한 정보가 없다는 것.
기껏해야 제1차장검사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무언가 연결 고리가 있는 게 틀림없다.
“주옥메디컬이라…….”
고민하는 내 표정을 보고 윤설하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실, 저도 딱 떠오르는 게 없어서 며칠간 주옥메디컬의 핵심 인사를 미행했는데요.”
그녀는 갤러리에 찍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어젯밤에 이런 사진이 나왔습니다.”
으슥한 지하 주차장. 그곳에서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검은 차의 트렁크에 007 가방 세 개를 넣는 장면.
차량 번호가 보일 듯 말 듯 하다.
“저 차 번호 땄어요?”
“예.”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95로 4106. 특수부의 강현수 부장검사 차량입니다.”
지잉지잉.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지만, 미뤄 두고 윤설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 찍힌 장면 있어요?”
“아쉽게도 그건 없습니다. 이걸 찍은 뒤로 가드들이 눈치채는 바람에 바로 튀었거든요.”
“강현수 부장, 재산 내역이나 계좌 내역 털면 좀 나올까요?”
“아마 나오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윤설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파 보면 티끌 정도는 묻어 있을 가능성은 있고요.”
먼저 물러나기보다는 하나라도 더 파 보려는 이 자세가 좋다.
윤설하의 최대 장점이랄까.
“영장 없이는 힘들죠?”
“예. 영장이 없으면 대놓고는 구하기 힘듭니다.”
“은밀하게는요?”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틀만 주십시오.”
“고생해 줘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설하는 곧장 가방을 챙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보낸 이 : 30
-사진
문자다.
미래 문자.
한동안 오지 않아서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했건만, 결국 다시 찾아올 줄이야.
보낸 이가 처음으로 바뀐 것도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는 전부 29였지만 오늘은 30이다.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걸까.
아니지.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문자의 내용부터 생각해야 한다.
곧바로 사진을 확대했다.
주차장?
아니, 놀이터다.
꽤나 후미진 장소.
근처에 너덜너덜한 간판이 몇 개 보이는 걸로 보아 재개발 단지거나 후미진 달동네 중 하나일 게 틀림없다.
혹시 모르니 눈에 보이는 간판들을 전부 메모해 두고 다시금 사진에 집중했다.
두 대의 차가 보인다.
검은색 SUV 한 대와 외제 승용차 한 대.
SUV의 차량 번호는 35다 3741. 외제 차의 번호판은 95로 4106.
잠깐만, 95로 4106라면 조금 전에 윤설하가 따 놓은 차 번호일 텐데.
외제 차의 차주는 틀림없이 특별수사부의 강현수 부장검사.
워낙 화면이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두 남자가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대충 모양새는 네모난 가방 같은데. 설마 007 가방인가?
보아하니 강현수 부장검사가 SUV의 차주에게 가방을 넘기는 듯한 그림이다.
서서히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맞춰져 간다.
혹시나 사진에서 놓친 게 있는지 다시 한번 샅샅이 훑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를 끝내고, 곧바로 수화기를 들어 알고 지내는 경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검사님.
“차량 번호 하나 신원 조회해 봐.”
-말씀하세요.
“35다에 3741.”
-잠시만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뒤,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유주가 이은영입니다.
“여자야?”
-예. 39세로 강남구 살고 있네요.
헛발을 짚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남편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시 한번 키보드 소리가 들린 뒤에 그가 수화기를 들었다.
-남우현입니다. 마흔한 살이고요.
빙고!
금융범죄전담부의 부장검사가 바로 남우현이다.
“그래, 고맙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조만간 술 한잔 살게.”
-예!
됐다.
단번에 정리가 끝났다.
어떻게 연결 고리가 맞물려 돌아가는지, 주옥메디컬에서 왜 강현수 부장에게 007 가방을 세 개나 주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모두 퍼즐이 맞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