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판 (2)
임성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는지 부들부들 떨어 댔지만,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은 상황을 지켜보던 송현성이 다가와서 직접 수거해 갔다.
이를 지켜보던 백성탁 부장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지 애써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불똥이 튈까 싶어 애꿎은 검사들에게 서류를 잘 챙기라고 독촉하며 자리를 떴다.
송현성이 서류를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걸 확인하고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쩍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임성진의 시선이 따갑게 꽂히고 있는 상황.
감찰부 검사들이 파란색 박스에 수많은 서류들을 챙기며 압수 수색을 한창 진행하고 있을 즈음, 임성진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깊게 숨을 내뱉고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에 박승수 부부장검사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지만, 임성진에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용호는 잘 지내죠?”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비꼬듯 말했다.
“내가 아끼던 후배였는데 가 버린 게 너무 아쉬워서.”
대놓고 시비를 걸러 왔다는 게 눈에 보인다.
무시할까 했지만, 이런 녀석에게는 알량한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생각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지방에서 푹 요양하고 있네요. 서울 생각은 하나도 안 하면서.”
“여기가 별로 그립지는 않나 보네요. 잘 간 것 같네.”
“부장님도 곧 공기 좋은 곳으로 가실 것 같은데,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생겨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 담벼락이 높은 집은 서울에도 있었지.”
임성진은 덤덤한 척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용호한테 안부 인사라도 전해 줘요.”
“그러지 말고 직접 하시죠. 조만간 증인으로 나올 테니 얼굴 뵙고 하시면 되겠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가 거의 맞닿을 수준.
“야.”
임성진은 목소리를 낮춰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끔, 그러나 독기가 느껴지도록 말했다.
“죽이려면 확실하게 죽여.”
대놓고 살기가 드러났지만, 절대 쫄지는 않았다.
“내가 안 죽고 살아나면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임성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제대로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같았으면 분명 겁을 먹었겠지만, 요 며칠 사이 김석원 차장검사와 몇 번이나 독대를 하다 보니 담력이 늘었는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저는 죽일 생각 없는데요.”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섰다.
“살려는 드릴게. 발버둥 쳐 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고 싶거든.”
뒤돌아선 그는 주먹을 꽉 쥔 뒤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도발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자극을 넘어 모멸감까지 느꼈다는 게 걸음걸이에서 보일 정도.
임성진은 수족이 다 잘려 나간다고 해도 겁먹고 내뺄 녀석이 아니다.
이 정도 수모를 당했다면, 이번 상황이 끝나면 어떻게든 갚아 주기 위해서라도 재기하려고 발버둥 칠 터.
사태가 정리되면 분명 검사장과 접촉할 것이다.
검사장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올라오려고 할 때, 그 동아줄로 연결된 둘을 동시에 잡아 버리면 된다.
임성진이 떠난 뒤, 송현성이 슬쩍 내게 다가왔다.
“뭐래? 신용호 이야기 나오는 것 같던데.”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죽이려면 제대로 죽이라네.”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송현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죽일 생각 없다고 했지.”
방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다고 만족할 게 아니라, 그걸 미끼로 상어를 낚는 게 진짜 월척이니까.”
임성진에 이어 송현성과도 붙어 있다 보니 경제범죄조사부의 모든 이목이 이쪽으로 쏠려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검사들은 전부 내가 송현성과 함께 준비해서 저들을 쳤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바람이나 좀 쐬어야겠다. 일 끝내고 보자.”
“그래.”
송현성을 뒤로하고 문으로 향할 때, 문득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흘긋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원형 부부장검사.
임성진의 오른팔이자, 차기 부장검사에 오를 인간.
아니, 오를 예정이었던 인간.
저 녀석도 꽤나 많이 해 처먹었지.
조원형은 임성진에 못지않을 정도의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잉지잉.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문자가 도착했을 때 울리는 특유의 진동.
경제범죄조사부 사무실의 밖으로 나가, 창문 앞에 서서 문자를 확인했다.
-보낸 이 : 29
-사진
이번엔 사진.
대체 저 29라는 숫자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커다란 글자로 헤드라인이 적혀 있고 밑에 작은 글씨가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사진의 내용은 인터넷 뉴스일 터.
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손은 이미 사진을 확대하고 있었다.
-뇌물 수수를 포함한 검사 비리의 주축이었던 조원형 부부장검사, 모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
-최근 여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속칭 ‘임성진 라인의 비리’ 사건이 벌어졌던 ‘경제범죄조사부의 비리 사건’에서 주범 격의 인물이었던 조원형 부부장검사가 모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검찰에서는 조원형 부부장검사가 최종 출석요구에도 응하지 않아 직접 그의 행적을 추적해 찾아가 본 결과, 일산의 한 모텔에서 일산화탄소중독으로 사망한 그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검찰과 대중이 그를 압박하는 상황을 차마 이겨 내지 못하고 남은 생을 뒤로하고 떠난다는 내용이 드러나 있었다. 또한 유서에는 이번 비리 사건에 대한 간단한 정리와 함께 모든 것을 자기가 짊어지고 떠난다는 내용과 더불어 많은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과 국민들과 가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까지 담겨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조원형 부부장검사는 이번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살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유서에는 감찰부의 압박 수사에 대한 심각한 고충과 표적 수사에 대한 의문도 드러나 있어, 그에 대한 사실 확인도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도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정치 1번지 철형우 기자
이런 미친!
조원형 부부장이 자살을 한다고?
조금 전에 독기를 품은 채 나를 노려보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한데 자살이라니.
기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정말로 조원형이 모든 걸 책임지고 떠나는 분위기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이런 수사의 전형적인 패턴상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삶을 등진다면 거기서 사건이 종결되는 건 시간문제.
이게 임성진의 탈출구였나?
기껏 그린 그림이 충직한 오른팔을 먹이로 던져 주고 혼자 살아남는 시나리오라니.
조원형이 충직한 마음으로 죽음을 택한 건지,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임성진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수족을 쳐냈다는 사실.
임성진이 모른 채 조원형이 죽었을 리는 절대 없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종결이 된다면 임성진의 목숨 줄을 쥐기는커녕, 지금까지 저질렀던 비리를 단번에 싹 털어 내 버리는 셈이 될 테니까.
만약에 모르고 당했다면 모를까, 이미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걸 알았는데 그대로 당하는 건 병신이다.
나는 절대 그런 병신이 되지 않을 테고.
아쉽게도 사진 속에는 기사의 업로드 시간이 나와 있지 않아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최종 출석요구까지 간 걸 보면 당장 며칠 내에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그동안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조원형을 설득하고 임성진의 목줄을 잡아끌 방법을.
***
“자료 분석한 건 언제 나와?”
“어떤 거?”
“임성진이 마지막에 몰래 빼내려던 가방에 있던 서류들.”
“아, 그거 분석 끝났어.”
송현성은 책상에 있던 파일철 하나를 내게 건넸다.
뇌물 수수에 대해 적은 장부.
그것도 경제범죄수사부가 수수한 뇌물의 90% 이상이 적혀 있는 파일이었다.
아마도 작성자는 임성진.
어디서 언제 무엇을 위해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세세히 기록해 두었다.
“미친놈들이지. 그냥 먹어도 무서울 판에 그걸 다 적어 놨어.”
보통 뇌물을 준 사람은 장부를 적더라도 받은 녀석들은 흔적 없이 삼키는 걸 우선시하기 마련인데 참으로 대단할 따름.
“얼마나 처먹었으면 그걸 다 깜빡할까 봐 적어 놨겠냐?”
이 정도면 기억으로 쓴 게 아니다.
받을 때마다 정확히 기록해 둔 게 틀림없을 터.
송현성이 정리한 파일철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감이 딱 왔다.
“이 새끼들 신용호한테 완전히 뒤집어씌우려고 했구나.”
가방에 있는 서류는 두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실제로 뇌물을 수수한 내용.
다른 하나는 신용호를 비롯해 지방으로 좌천된 세 명의 검사들의 휴대폰 통신 내역.
딱 봐도 각이 나온다.
휴대폰 통신 내역에 기록된 전파국 이동 기록에, 뇌물 수수 장소와 시간을 끼워 맞추려고 했던 정황.
만약 이걸 이용한 장부가 완성되었다면, 뇌물 수수 혐의는 경제범죄조사부가 아니라 그 세 명의 검사가 모두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상상은 하지만 실천을 할 수 없는 계획을 이 녀석들은 행동에 옮기려고 했었다.
만약 영장 발부가 하루만 늦었어도 아마 녀석들의 생각대로 됐겠지.
조사할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녀석들이다.
“아쉬운 건 실제로 뇌물 수수한 내용도 한 번 컴퓨터로 옮겨서 작성한 파일의 사본이라는 거야. 실제 장부가 있으면 알 수 있겠지만 프린트물이라서 필체 감정도 안 돼.”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보통 녀석도 아니고 임성진이 그런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으니까.
경제범죄조사부에서 뇌물을 먹었지만, 임성진이 먹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것을 빌미로 임성진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게 될 터.
처음에 김석원 차장검사가 우려한 것도 이것이고, 나 또한 충분히 파악해 놓은 사실이다.
다만, 신용호를 비롯한 좌천된 검사들에게 뇌물 수수를 덮어씌우려고 하던 언론 플레이가 거짓이었다는 걸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이것만으로도 임성진의 입지를 좁아지게 만들기엔 충분할 터.
“일단 용호랑 나머지 검사들한테 연락할게. 용호는 몰라도 나머지 두 명은 불똥 튈까 봐 걱정하고 있을 거 아니야?”
송현성은 말하며 휴대폰을 꺼냈지만,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왜? 그 사람들 엄청 똥줄 타고 있을 텐데. 미리 말해 주면 좀 낫지 않겠어?”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잖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호, 한희주. 이 두 명이, 자기들이 살 수 있다는 게 확실해지면 증언하려고 하겠어?”
“아!”
그제야 송현성도 이해한 모습을 보였다.
두 검사는 목숨이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되면 지방에서라도 검사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이쪽에도 저쪽에도 붙지 않을 것이다.
괜히 임성진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그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본인들은 이미 좌천된 것도 모자라 검사라는 직함을 떼어 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들은 임성진이 자신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는 생각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붙을 터.
그렇게 되면 임성진을 범죄자로 몰 수 있는 두 명의 추가 증언을 받는 게 가능해진다.
임성진이 먼저 언플을 시작했던 것을 자충수로 만들어 버리는 셈.
송현성은 감탄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새끼, 역시 머리 회전 장난 아니네.”
“당연하지, 인마. 내가 누군데.”
바로 이 세계의 왕이 될 사람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