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재벌도 공범이다, 동의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동문서답하지 마시고 국민들이 외치는 재벌도 공범이다, 동의하십니까?
-국민들의 여론을 아주 준엄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공범임을 인정한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것입니까?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민들에게 사과 한 말씀 하시죠.
-이번 사태로 많은 걸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번 불미스러운 일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경솔했던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를 되돌아보면…….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겠냐고 물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압력과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철저히 좋은 회사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겁니까?
-예, 끊도록 하겠습니다.
멋있다.
더럽게 멋있다.
한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WG그룹의 총수가 고작 저 남자에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벌벌 기고 있다.
옷깃에 달려 있는 금배지.
저 배지 하나가 남자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저게 힘이다.
동네 양아치나 일진이 휘두르는 주먹이나 돈 따위로 절대 이길 수 없는 게 바로 권력이다.
저게 현대사회를 담고 있는 것이다.
갑 위의 갑.
갑 오브 갑.
그게 바로 권력이다.
진짜 힘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다.
돈은 그저 돈을 부르지만, 권력은 자연스레 돈을 부르게 된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권력을 쥘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하고 싶다.
제대로 사람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
그러나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아직 나에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다.
뭘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게 있을까.
지방에서 시의원, 시장 정도로 만족하고 싶진 않다.
더 높은 판으로 올라가야 한다.
경찰?
아니, 검찰에 꼼짝도 못 하잖아.
검찰.
그래, 검찰.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 중에서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그 권력을 계속해서 쥐고 있기 위해 검사들에게 벌벌 기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먼지를 털어 내 감옥에 처넣을 테니까.
권력을 손에 넣은 이들까지 잡고 흔들 수 있는 검사.
청문회를 하는 국회의원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 검사.
그게 진정한 권력이다.
그래서 나는 검사가 되었다.
정체불명의 문자 (1)
챙!
공중에서 잔이 부딪치며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축하한다!”
“고마워.”
맞은편에 앉아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잔을 기울이고 있는 남자는 신용호.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이면서 사법연수원 동기까지 지낸 친구다.
불알친구를 넘어 가족과 같은 수준.
그가 이번에 서울중앙지검으로 새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같이 술을 한잔 기울이러 왔다.
나랑 광주지검에서 평생 같이 썩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끝까지 올라갈 줄이야.
부럽긴 하지만, 시기하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고, 실제로도 내 일처럼 기쁘다.
“언제 올라가?”
“정식 발령은 2주 뒤인데, 집도 구해야 하고 이것저것 할 게 있어서 다음 주부터 1주일 정도 휴직계 내고 바로 올라가.”
“자식, 진짜 출세했네. 잘됐다.”
“운이 좋았지. 나중에 기회 되면 내가 너 끌어 줄게.”
“하하하, 그건 됐고, 오늘 술값이나 내라.”
“당연하지, 인마. 2차는 물론이고 3차에 끝까지 책임진다.”
“좋지!”
앞에 있는 꽃등심을 소금장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보들보들하면서도 육즙이 터져 나오는 게,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이미 사르르 녹아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맨날 삼겹살만 먹다가 친구가 출세하니까 이렇게 한우 꽃등심까지 먹어 보는구나.
출세(出世).
단어의 뜻 그대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되는 일.
여느 검사든 그렇겠지만, 나도 입신양명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사법 고시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합격했다.
합격 당시엔 마을에서 잔치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출신 중, 고등학교와 동네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나 역시 대한민국 권력의 한 축에 올라섰다고 생각했고.
그러나 실상은 별거 없었다, 특히나 지방으로 발령이 난 검사는 더욱더.
절도, 음주 운전, 성매매, 사기 등 잡다한 사건들을 맡아 처리하는데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15분에 사건을 하나씩 처리해야 한달까.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공무원 월급이라 박봉인 것도 모자라, 가끔씩은 법대로 처리했는데도 피해자들로부터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욕까지 얻어먹어야 하니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하다.
처음엔 검사만 되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나같이 돈 없고 백 없는 검사들의 실상은 이렇다.
이렇게 살다가 부장검사로 승진은커녕, 나이가 차서 승진을 못 하면 변호사 개업을 하고 법률 서비스나 하는 거지.
정말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다니까.
지방으로 발령 난 검사들은 가슴속에 출세에 대한 꿈을 갖고는 있지만, 현실이란 벽에 가로막혀 열망을 잊고 산다.
나 또한 첫 발령을 받은 이 광주지검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뛰었고, 그러는 사이에 진정한 권력을 손에 넣고 싶다는 마음의 불씨는 점차 사그라졌으니까.
정확히는 사그라진 게 아니라, 내가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세를 위해 평생을 바라고 10년을 넘게 공부해서 검사의 자리에 올랐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검사들이 전부.
출세라는 것에 대한 열망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라도 이 마음을 완전히 잊고 없애 버리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나 또한 출세에 대한 야망을 여전히 떨쳐 내지 못하고 가슴 한곳에 품고 있긴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꿈꿔 왔던 출셋길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에 나만 괴로워질 테니까. 누구보다도 출세를 꿈꾸고 간절히 바랐기에 더욱더.
신용호는 나와 제일 친하면서도 가장 가까웠던 녀석이다.
평생 광주지검에서 동고동락하며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서울중앙지검으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가슴속에 억누르고 있던 출세에 대한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커져 버렸다, 이 감정과 야망을 외면하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크게.
아마도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다들 바라볼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꿈을 잊지 못해 애써 외면하는 검사들 사이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올라간 신용호, 이 녀석이 특이 케이스일 뿐이다.
“그나저나 너 대체 어쩌다가 발령이 난 거냐?”
“아, 이거 이야기하기 조금 쪽팔린데…….”
“괜찮아. 우리 사이에 쪽팔리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어?”
신용호는 주변을 살피더니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서준이, 너 이거 정말 비밀로 해야 한다.”
“그래, 말해.”
“너 믿으니까 이야기하는 거야.”
“말해 보라니까.”
그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너 곽태원 알지?”
“우리 고등학교 동창? 걔 사업한다던데.”
“아니, 걔 말고 광주시장 곽태원.”
“아, 광주시장. 알지, 예전에 취임식 때 얼굴 한번 봤다. 그 인간이 왜?”
“내가 이번에 신입 수사관 하나 받았다고 했잖아.”
신용호는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9급인데 수사관으로 들어와서 의외였다고.”
“그렇지. 보통의 수사관들은 7급이니까.”
곽태원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웬 수사관 이야기인 건지 의문스러웠지만, 일단 더 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9급이 흔치 않다 뿐이지,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같이 일해 보니까 애가 영 아니더라고. 뭔가 이상해서 들어온 이력 확인해 보니까 특채더라?”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알고 보니까 얘가 곽태원 조카더라고. 애가 공무원 시험을 10년째 보는데 계속 낙방하니까 얘 부모님이 곽태원한테 부탁을 한 것 같더라.”
“그거 완전 비리 아니야?”
“당연히 비리지. 시청 쪽으로 데려가면 들킬까 봐 일부러 검찰 공무원으로 뺐던 것 같아. 그런데 비리만 문제가 아니야. 그대로 두면 특채인 건 둘째 치더라도 일을 너무 못해. 나보다 나이까지 많은 꼴통을 데리고 일할 생각을 하니까 너무 답답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비리로 까 버리려고 했거든?”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몰입되기 시작했다.
“너 서울의 임성진 부장검사 알지? 갑자기 그 사람한테 연락이 오더니 만나자고 하네? 이야기해 보니까 사법연수원 10기수 선배에다가 우리 대학 선배더라. 그리고 묻자고 하더라고.”
별것도 아닌 채용 비리에서 요새 서울에서 제일 잘나가는 부장검사의 이름까지 나오다니.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권력의 뒷모습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다.
“알고 보니까 곽태원이 그 사람이랑 또 무슨 커넥션이 있었나 봐.”
“그래서 묻은 거야?”
“묻으면 자기 라인으로 데려와 준다더라. 솔직히 말해서 이 기회를 어떻게 버리겠냐? 요즘 실적도 안 좋아서 잘못하다가는 여기서 옷 벗게 생겼는데. 올라가야지.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출세 한번 해 봐야 되지 않겠냐? 우리 다 그러려고 검사 된 건데.”
맞는 말이다.
나 또한 정의감에 불타거나 올바른 세계를 만든다는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고 검사가 된 게 아니라, 그저 권력을 선망하고 내 손으로 그것을 맛보기 위해 검사가 된 거니까.
나라도 신용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저 나에겐 아직 저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
그는 다시 한번 내게 신신당부했다.
“이거 밖으로 새어 나가면 나 진짜 바로 모가지야. 나뿐만이 아니라, 임성진 라인까지 전부 몰살이다.”
“걱정 마. 내가 미쳤다고 밖으로 정보 새어 나가게 하겠냐? 너 죽는 꼴은 나도 보기 싫다.”
“고맙다.”
신용호는 씨익 웃으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사실, 입이 근질거려서 누구한테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도 없었거든. 너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래, 인마. 우리가 서로 믿어야지, 안 그러면 누굴 믿겠냐?”
“그렇지.”
그는 후련한 얼굴로 빈 잔을 채웠다.
“제수씨는 뭐라고 안 해? 서울 간다고 하면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
“좋아서 날뛰지. 이야기하자마자 와이프가 바로 본가에 전화했는데, 장인어른이 고민도 하지 않고 아파트 하나 사 주신다더라. 그간 검사 사위, 검사 사위 했지만 까고 보니 지방에 박혀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야 좀 눈에 찬 모양이야.”
“잘됐다.”
연신 차오르는 그에 대한 부러운 감정을 애써 삼키고 술잔을 부딪쳤다.
부러움이 질투가 되어 친구를 시기하는 소인배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
신용호는 서울로 올라갔다.
가끔 전화로 연락하는데, 그곳은 아주 신세계란다.
예전처럼 잔챙이 사건이나 건드는 게 아니라 굵직한 건만 골라서 해결하는데, 가끔씩은 인터넷 기사와 신문에도 실리는 수준.
얼마 전에는 마약 밀수 조직을 검거해 기자회견까지 한 걸 보면, 확실히 잘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며 자신이 자리만 잡으면 꼭 나를 끌어올려 준다고 이야기했다.
고맙다고는 말하지만, 그것을 기대하진 않는다.
요행을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바라고 싶지도 않다.
기대감을 품으면 더 힘들어진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삶에 치여 살아가는 게 전부였다.
신용호가 특별 케이스지, 대부분의 대한민국 검사는 나처럼 티도 나지 않게 서류만 딥다 들여다보며 생활하니까.
다만, 그가 내 마음에 던진 출세에 대한 불씨가 아직 꺼지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 조금 답답하고 힘들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신용호와의 연락은 차츰 줄어들다가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겼다.
신용호는 검사 일하랴, 가장 노릇 하랴 바쁠 테고, 나는 평소처럼 일에 치여 살고 있으니까.
원래 친구라는 게 그렇다.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만나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신용호가 서울로 올라가고 약 2년이 흘렀을 때쯤, 업무 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신원 불명의 사람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보낸 이 : 29
-신용호에게 연락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