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군주회귀록 195화
현 황제 아스폰의 말에 넙죽 엎드린 고흐는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치욕 때문이기도 하였다.
‘고흐 꼴이 많이 아니군.’
‘너무 심하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어린 소년을 자신이 상대하겠다니? 그런 미친 소리가 세상에 어딨어?’
고흐는 6클래스 마법사였다.
엄청난 힘을 가진 마법사 중 한 명.
그런 그가 어린아이를 상대하겠다니.
누가 들어도 다혈질적인 성격의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뱉어낸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부들부들 떠는 또 하나의 이유.
감히 황제 아스폰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였다.
황제 아스폰은 장난기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눈 밖에 나면 어떤 꼴이 날지 모른다.
그는 때론 강하고 때론 부드럽고 유연한 자였다.
그런 아스폰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아서가 있었다.
“전쟁에서 활약하는 어린 소년이 있다는 말은 내 익히 들었지, 얼마 전의 활약도 마찬가지고.”
“감사합니다. 전하.”
그리고 아스폰은 그를 보며 재밌다는 듯 빙긋 웃었다.
고흐가 앞으로 나섰을 때, 소년은 ‘이걸 어쩌지?’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귀찮게’라는 표정이었지.
감히 고흐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 소년이라.
“고개를 들라.”
아서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은빛 단발머리.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남이로다.
“솔직히 말하게.”
“예, 전하.”
“자네, 고흐를 상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
“……!”
“……!”
“……!”
그 말 한마디가 주는 파장은 컸다.
마법사들이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움찔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고흐를!’
‘말도 안 돼!’
하지만 그와 다르게 아서는 태연하게 답했다.
“못 이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호라!”
아서의 말에 고흐의 안색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쳐 죽을 새끼!’
당장 6클래스 마법을 소환하여 저 소년을 불에 태워 소멸시켜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서 쉬이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아서는 더욱더 시원스럽게 나왔다.
“나이 많은 마법사쯤이야.”
“…….”
고흐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황제 아스폰이었다.
“하하하하하하! 정말 재밌는 소년이구나!”
그 웃음에 장내의 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이 소년을 초대한 이는 누구지?”
아스폰도 이 파티에 마법사를 제외하곤 초대한 이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은 것이었다.
그에 오르웬이 슬며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이옵니다. 전하.”
“호오, 마검사 아이리스. 자네였군.”
아스폰은 그 두 사람을 재밌다는 듯 바라봤다.
검과 마법을 천재적으로 다루는 마검사 아이리스!
그리고 전장을 누비며 적들을 베어내는 전장의 귀신이라!
“그대들과 다과를 즐기고 싶군.”
그에 아서는 생각했다.
‘이거 크록의 일이 생각보다 쉬이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스폰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서와 오르웬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들이 일어서고.
“…….”
고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창피하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발이 걸려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빌어먹을!”
결국, 그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 * *
아스폰은 앞서 걸으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정말 저렇게 나올 줄이야.’
사실 아스폰은 저 건방진 고흐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그래야 재밌지 않겠는가.
높은 직위와 뛰어난 마법사라는 점을 이용해 남들을 짓밟으려는 고흐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으니!
그리고 아서는 딱 상황에 맞게 말을 해줬다.
“자네, 재치 있어서 아주 좋아.”
“재치라니요?”
“고흐가 뭐 별거 아니다는 식의 재치.”
“……?”
그에 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폰은 앞서가다 문득 멈칫했다.
“한 방 먹인 거 아니었나?”
“진심이었습니다.”
“…….”
아스폰은 그를 보며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조롱에 가세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닌 듯싶었다.
소년은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아스폰은 몸을 돌렸다.
‘물건이로다.’
실력 있는 자는 이 정도 자신감과 포부를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들어가 앉아 있자 서둘러 다과가 차려졌다.
“드시게.”
현 황제 아스폰.
그는 아서와 오르웬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서는 정중히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시골 변방 기사의 아들이라고 했지.’
그러던 중, 아서가 말했다.
“예전에 저희 아버지께서 전하를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호오?”
기사의 아들.
그의 아버지가 바로 자신을 모셨었다.
그에 아스폰은 흥미를 느끼고 그를 보았다.
“자네 아버지의 이름이 어찌 되나?”
“아커스 더 프레스라고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아스폰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아서도 궁금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아커스는 황궁에 계셨다.
그리고 황궁 기사단의 일원 중 하나였다.
그런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좌천되셨다.
‘아버지가 정말 좌천될 일을 하시지 않았겠지.’
하지만 ‘누명.’이란 글자는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아서는 ‘누명’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아커스. 자네 아커스의 아들이었나?”
“예, 전하.”
황제는 수백 명 이상의 기사단원을 밑으로 둔다.
한데, 아스폰이 아커스를 기억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의외의 일이었다.
“그랬군, 그는 요새 어떤가?”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
아스폰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한 번 하지 못했어.”
“……고맙다는 인사 말입니까?”
“그래, 그 친구는 나를 도왔기 때문에 좌천되었지.”
“예?”
“전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황궁에서 몇몇 신하가 4황자를 왕위로 올리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네, 또한 그로 인해 나를 암살하려는 무리가 있었지. 그때 침실 안으로 놈들이 나타났을 때, 나를 지키고 싸웠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자네의 아버지였네.”
아서는 그 말에 작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고향에서도, 이곳에서도 지키기 위해서만 사셨구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대륙 전체를 아서는 지키고 싶었다.
“나는 그때 살아남아 무사히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 그리고 그때 나를 지켰던 이들 대부분이 죽었고 자네의 아버지 아커스는 내가 일부러 좌천시켰네, 그때 당시의 잔당들이 자네 아버지가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도, 그의 가족조차도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지금은 상관없는 일일세. 현재는 그 극악무도한 자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았으니까.”
“그렇군요.”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폰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를 잠시 응시했다.
“아버지를 꼭 빼다 박았군.”
“감사합니다.”
“과거 영웅의 아들이 커서 또 다른 영웅이 된다니, 재밌는 일이야.”
아서는 빙긋 웃기만 했다.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서는 본론을 꺼내기로 결정했다.
“전하.”
“그래.”
“전하는 저라는 사람을 믿으십니까?”
그 말 한마디에 아스폰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믿다니, 무엇을 말인가?
아커스의 아들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말인가, 아니면 전장의 귀신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인가?
“고흐 그 작자보다는 믿을 수 있을 것 같군.”
아스폰은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역시나 능통한 자다.
“크록이라는 마법사를 아십니까?”
“크록? 알다마다. 그 또한 충직한 신하이기 때문에 내 기억하고 있다네.”
아스폰은 그것을 왜 묻는가 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그와 원한 관계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그는 적국의 마법사입니다.”
“……!”
그리고 이어진 말에 아스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 말, 생각보다 위험한 발언이었다.
“신중하게 해야 하는 말일세.”
당연한 일이었다.
크록이 없는 이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가 적국의 사람이라 말하고 있지 않던가.
심지어 크록은 아주 뛰어난 마법사이며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가 기대되기도 했다.
심지어 인품이 고흐와는 정반대의 인물이기도 하지 않은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서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그 말에 아스폰은 미간을 구겼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크록은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였고 또 믿을만한 자였다.
“그를 증명할 수 있나?”
그 물음에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내일. 크록이 올르비스 사람과 접촉할 겁니다.”
“올르비스 사람과?”
“예.”
“자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지?”
그 말에 대신 답한 것은 바로 오르웬. 즉 이곳에선 아이리스였다.
“아서에게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라.”
하지만 그 말에 아스폰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대마법사 조차도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심지어 지상 최강의 존재라고 불리는 드래곤 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개 소년이 앞을 내다본다라?
아스폰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자, 아서가 작게 웃었다.
“사실입니다.”
“……사실이라면 앞으로의 대륙의 역사는 어떨 것 같나.”
아스폰도 그의 진지한 표정에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끔찍하죠.”
“…….”
황제로써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자네, 참 거짓말도 잘하는군. 실망일세.”
아스폰은 맥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막 나서기 위해 문고리를 잡으려던 때에 아서가 말했다.
“저는 제가 한 말에 이 목도 걸 수 있습니다.”
목도 걸 수 있다?
그 말에 아스폰의 고개가 돌아갔다.
“전하는 뭘 거실 수 있습니까?”
“……그 말의 의미 알고 있느냐?”
감히 황제인 자신과 내기를 하겠다?
포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그 도를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는 뜻을 굽히지 않는 표정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무엇을 거실 수 있습니까, 전 제 목을 겁니다.”
“……정말로 자네의 말처럼 앞으로의 대륙의 역사가 처참함에 물들고 크록이 올르비스의 사람이라면.”
아스폰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네의 그 앞날을 보는 능력에 대륙의 미래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아서는 피식 웃었다.
대륙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바로 황제의 입이다.
황제의 입에 따라 병사는 움직인다.
때론 산을 만들라면 만들고, 하늘을 가르라면 가르는 게 바로 황제의 입.
그 입을, 이번 내기로 얻을 기회가 아서에게 생긴 셈이었다.
“확인은 내일 시켜드리면 되겠군요.”
아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