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군주회귀록 097화
33장 귀신부대
그 말에 랜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어붙은 입술을 핥았다.
당장 자신의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제 한 몸 챙기기에도 힘든 상황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서가 말했다.
“이 산을 오르면서 무수히 많은 시체를 보았을 거다.”
꽁꽁 얼어붙어 부패되지도 않는 시체들.
분명히 동료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군주들이 기껏 유닛 따위를 챙기겠느냐마는, 시체들이 그대로 나뒹구는 네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죽음의 산맥에선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들다는 거다. 그 때문에 모두 버리고 간 거다. 동료가 쓰러지면 버리고 가야 한다. 그게 바로 이 베레스트 산맥이다.”
아서는 병사들을 돌아봤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병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아서는 생각했다.
‘딱 400m. 그 정도만 가면 또다시 베이스캠프 지점이 나타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서는 말했다.
“보아라, 란돌프. 너 때문에 추위에 발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에 있는 네 전우들이 지체하고 있다.”
“끄흐읍…….”
란돌프의 입가에서 흐르던 피가 어느덧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서가 후려친 뺨이 나태한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이곳에선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선 안 된다.
자신의 힘으로, 의지로 나아가야 한다.
“란돌프, 조금만 더 힘내라.”
“함께 돌아가자. 더 강해져서! 네 딸아이를 생각해야지.”
란돌프는 얼어붙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끄으윽!”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서 빨리 가시죠.”
아서는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400m 지점에 베이스캠프가 있다. 속도를 올린다.”
란돌프의 의지를 불태우는 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눈 덮인 베레스트 산맥.
그곳에서 아서와 병사들이 나아가고 있었다.
* * *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병사들은 난로에 언 몸을 녹였다.
이 정도 높이에 베이스캠프가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아마 아스간 대륙에 있는 이 베레스트 산맥과 비슷한 높이의 산맥이었다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시스템상의 편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스간 대륙에 있는 이만한 크기의 산보다 오르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아스간 대륙의 산맥이라면 이 정도 높이에선 몬스터가 나타나 습격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삐이이이-!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지막 8,000m를 남겨둔 이 베이스캠프에는 각종 마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철제 컵에 아서가 가져온 루핀 커피 원두를 타서 양손으로 컵을 쥐고 마시고 있었다.
“크흐, 살 것 같다!”
“크하아, 내가 이 맛에 베레스트 산맥에 오르지!”
“미친놈, 누가 보면 한 100번 올라본 줄 알겠네.”
“하하하!”
웃음소리 속에서도 아서는 여전히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는 베레스트 산맥의 꼭대기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 지점. 죽음의 산맥이라 불리는 베레스트 산맥의 또 다른 죽음의 구역.’
가장 위험하다.
이제 방대한 크기의 빙벽이 나타난다.
또한 시시때때로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실상 또 다른 죽음의 구역이라 불리는 곳은 미지의 영역과 같다.
‘제멋대로지.’
순전히 자기 멋대로 돌아가는 영역.
아주 간혹, 정말 간혹 잘못 발을 들인 자들은 안 좋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안 좋은 상황보다도 더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
정확하게 풀린 정보는 없었다.
그러한 최악 위의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군주 중 살아 돌아온 자가 없었기에 정보가 전무했다.
“군주님.”
귀 끝이 빨간 병사.
란돌프였다.
그가 루핀 커피를 타서 아서에게 내밀었다.
아서는 그의 터진 입술이 녹아 핏방울이 맺힌 걸 볼 수 있었다.
“아픈가?”
“아뇨.”
“거짓말도 잘 치는군. 맞아놓고 안 아프다니.”
아서는 부드럽게 웃었다.
란돌프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만 더 힘내자.”
아서가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예!”
힘차게 대답한 란돌프가 돌아갔다.
아서는 루핀 커피로 언 몸을 녹이며 훈련도를 떠올려 봤다.
‘이제 고작 56%다. 사실상 나머지 44%는 위에서 얻는 게 맞지.’
라스 군주도 7,000m 베이스캠프 지점에서 8,000m로 가면서 거의 모든 훈련도를 채웠을 정도라고 하니까.
띠링!
[재료 탐색이 발동됩니다.]
[S급 재료 유리 고드름이 탐색됩니다.]
[S급 재료 천설꽃이 탐색됩니다.]
“음?”
갑작스러운 알림.
그리고 인피니티의 반응에 커피를 마시던 아서가 우뚝 멈췄다.
“S급 재료?”
그 재료가 자그마치 두 개나 이 근방에 있다고 한다.
인피니티는 재료가 있으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탐색해 내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아서가 인피니티를 움직였다.
웅웅웅!
인피니티가 재료가 있는 위치 쪽을 향해 더욱더 밝은 빛을 머금었다.
올라오면서 아서는 A급 재료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이 A급 재료를 정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려 했더니.’
아서는 정말 만족스러운 작품은 7,000m를 넘어가면서 나타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병사들은 정말 자신들과의 고된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아서로서도 녹록지 않을 테니까.
그 뒤에 그려내는 그림이 정말 좋은 작품이 탄생할 거라 생각했다.
한데 S급 재료가 있단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아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모두 여기에서 대기하도록.”
“예? 어딜 가시는 겁니까.”
“급히 갈 데가 있다. 반나절 안에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아서는 밑 쪽에서 추격하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스가 마지막에 남긴 말을 듣고 질주의 매를 띄워 아래쪽을 살폈었다.
하지만 아서와 반대로 자신들을 쫓는 무리는 매와 같은 걸 띄우지 못했다.
질주의 매니까 이 베레스트 산맥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일반 매라면 날다가 죽어버리고 말 게 분명했다.
놈들과의 격차는 아직 크게 벌어져 있었다.
반나절 정도는 충분했다.
“걱정하지 마라. 꼭 돌아올 테니.”
“알겠습니다.”
랜과 병사들은 믿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남아 있는 루핀 커피를 모두 들이켠 아서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베레스트 산맥을 지키는 문지기.
반거족 라베는 베레스트 산맥의 보이지 않는 정상을 바라봤다.
‘은빛 머리 소년…….’
바스 군주와 소년이 동행할 때 낌새를 눈치챘다.
‘결코 호락호락한 소년이 아니었지.’
반거족 라베는 A급 군주 세 명이 동시에 덤벼도 어쩔 수 없는 강자였다.
그 때문에 그 소년의 강함이 바스를 압도적으로 능가한다는 걸 알았다.
소년이 순순히 4만 골드를 건넸을 때 그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낌새 역시도 알아챘다.
‘만약 소년과 병사들이 정상에 도착한다 해도…….’
라베는 자신의 턱에 맺힌 수북한 털을 어루만졌다.
‘베레스트 산맥의 ‘그분’께서 깨어난다.’
100일에 한 번.
그날이 온다.
베레스트 산맥의 지배자가 강림하는 그날.
이제까지 단 한 명만이 그와 마주하고 살아남아 내려왔다.
하지만 반거족 라베는 알았다.
‘그녀는 그를 이기지 못했다. 단지 운이 좋아 그의 힘을 나눠 갖는 것에 성공했을 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슬슬 가봐야지.”
그분이 강림하는 날.
라베는 항상 베레스트 산맥에 오르곤 했다.
타타탓!
라베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매서운 눈보라.
그리고 수북하게 쌓여 있는 눈을 파낸 아서는 힘겹게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동굴로 들어간 아서는 그곳에서 첫 번째 S급 재료인 유리 고드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유리 고드름이었다.
실제로 손을 뻗어 만져보자 차가운 느낌이 풍기긴 했으나 유리로 되어 있었다.
‘이건 아티팩트나 연금술 재료로도 쓰이는 녀석이 분명해.’
인피니티는 특별하게도 그릴 수 있는 재료들을 중점으로 두고 찾아낸다.
물론 이 유리 고드름도 그림에 도움이 되는 재료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림 재료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이 유리 고드름은 아티팩트 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이템 확인.”
(유리 고드름)
수량: 1
특수 능력
•절대 녹지 않음
•???
이렇게 아이템 확인 자체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림 재료 외에도 쓸 수 있다는 데 확신이 생긴다.
모든 재료, 풀잎, 나무껍질, 흙, 다양한 것들이 확인하면 이런 식으로 표기됐다.
보통 조잡한 재료들은 ‘?’가 아니라 어떠어떠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뜬다.
물론 그런 효과를 찾아내기 위해 다른 것들과 조합해 보는 건 당사자의 몫이다.
이러한 ‘?’가 떴다는 것 자체는 두 가지로 나뉜다.
쓰레기거나, 정말 좋은 재료거나.
아서가 알기로 피닉스의 깃털 또한 이러한 ‘?’로 표기되었다.
“으으…….”
아서는 꽝꽝 얼어붙은 손을 내려다봤다.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아서는 멈추지 않고 빠르게 동굴을 벗어났다.
이제 그다음 재료를 찾을 때였다.
아서는 인피니티가 빛을 밝게 뿌리는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있었다.
‘유리 고드름은 다소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거였군.’
입 안이 썼다.
아서는 죽음의 산맥을 백 번도 더 넘게 올랐지만 이러한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절벽의 끝에 서 있었다.
그 밑은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였다.
‘질주의 매를 쓸까?’
곧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거인화는 이제 고작 두 번 사용할 수 있으니까.
아서는 문지기를 통해 받은 상자에서 쇠 핀을 꺼냈다.
그다음 인피니티를 해머 모양으로 변화시켰다.
태엥!
태엥!
태엥!
단단히 핀을 박아 넣고 발로 힘껏 차본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로프를 몸에 묶었다.
그다음 절벽의 끝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서는 빠르게 내려가면서도 소지하기 편하게 단검 모양으로 축소시킨 인피니티로 방향을 찾았다.
여전히 인피니티는 계속 내려가라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쯤 내려가던 아서의 눈에 상당히 놀라운 장관이 나타났다.
떨어지던 폭포수가 얼어붙은 모양의 계곡.
하지만 감탄은 나오지 않았다.
‘빨리 얻고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그의 스탯이 높아도 추위 앞에서 버텨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러다간 동상에 걸릴 터.
아서는 절벽을 내려가다가 얼어붙은 폭포가 있는 지점에서 인피니티가 반응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가 식인 범고래의 작살을 꺼냈다.
그다음 얼어붙은 폭포 벽을 향해 힘껏 쏘았다.
태레렝!
폭포 벽을 뚫고 날아가 벽에 박힌 작살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르르륵!
불이 붙은 작살이 얼음을 녹여냈다.
곧이어 아서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크기로 녹았다.
아서가 로프를 몸에서 분리하고 손으로는 꽉 잡은 상태에서 중얼거렸다.
“회수.”
촤아아악!
아서의 몸이 끌어당겨졌다.
곧이어 폭포 벽 안으로 파고 들어간 그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눈을 떨었다.
분명히 녹은 얼음 틈으로 봤을 때엔 동굴이었다.
하지만 들어오는 순간 주변이 변했다.
이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거대한 신전이었다.
띠링!
[미지의 영역. 얼음 신전을 찾아내셨습니다.]
[2만 골드를 얻었습니다.]
[영지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