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군주회귀록 045화
15장 감히
그를 따라 뒤의 다른 이들도 로브를 걷어내고는 양손을 들어 올려 적의가 없음을 드러냈다.
“취익, 아르한 영지의 대리인 벤이라고 합니다. 토벌 작전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었다. 병사들은 곧이어 통신기를 들고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여인을 보면서 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여인은……?’
인간 같기도 한 것이 피부가 너무나도 하얀 편이었고 천족 같기도 한 것이 귀가 달랐다.
실제로 마족을 본 적은 없는 벤이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아르한 영지는 어떤 곳이죠?”
그레모리는 차분하게 물었다.
애초에 아서의 영지는 군주보호기간에 걸려 있는 영지다.
때문에 다른 영지에서는 결코 쉬이 대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듯 정보를 묻는 이유는 그들이 적의가 없음을 확실히 하는 절차이기도 하였다.
“아르한 영지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30㎞ 정도만 가도 나타납니다. 군주님의 성 뒤론 바르가노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 있고 병력은 약 200. 또한 현재 군주님께선 군주보호기간 11개월 차이시며 저희 아르한 영지는 트롤 소연맹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영지 현황표입니다.”
군주보호기간에 걸려 있는 영지.
군주보호기간에 걸린 영지끼리는 대결이 가능하다.
그레모리는 잠시 갈등했다.
‘11개월 차? 만약 우리 발카스 영지와 충돌을 일으키면…….’
실제로 그레모리가 모시는 아서 군주님은 대단하신 분이다.
하지만 11개월 차면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은 잡혔다는 거다.
실제로 아서의 ‘영지전’을 본 적은 없는 그레모리였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단은 보고를 올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모리는 서둘러 성으로 돌아와 현실로 돌아갔던 아서를 깨웠다.
돌아온 아서는 벤이라는 자가 건넨 영지 현황표를 둘러봤다.
군주의 이름은 카샤스. 현재 영지 총레벨은 5. 병력도 꽤 훌륭하다.
꽤 빠르게 총레벨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보통 이렇듯 도움을 요청할 때에 영지 현황표를 보여주는 건 자신들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과 같으며 적의가 없음을 명명백백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병력이나 자원, 다른 것도 확인 가능하니까.
하지만 도움을 주는 측에선 영지 현황표를 줄 필요는 없다.
“길을 잃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비가 많이 오는군.”
아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거기에 트롤 소연맹이면 실권자는 바로 브록 군주다.
‘나 염탐하라고 보냈나? 아니, 브록은 그럴 녀석은 아니지.’
아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왔으면 자신이 직접 왔을 것이다.
옹졸하게 부하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그것보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문제, 받아들여도 문제랄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르한 영지의 군주는 아서를 적으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포르데일 땅은 그만큼 미친놈들 천지니까.
그러면 받아들였을 시?
특별한 문제를 그들이 일으켰을 때에만 충돌이 있을 거다.
‘놈들이 안에서 충돌을 일으킨다고 무서운 건 없지. 오히려 명분이랄까?’
현재 아서는 혼자서 깨부술 수 있는 영지를 물색 중에 있는 때였다.
고민하던 아서는 결단을 내렸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하루 잘 수 있는 공간과 주린 배를 채우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럼 들여보내.”
“예.”
어차피 그 정도라면 영지에서 어려운 일도 아니다.
또 아서가 아무리 혼자 독보적으로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닥쳐, 나 혼자 한다. 내가 최고다’할 생각은 없었다.
또 따뜻한 밥 한 끼와 숙소 제공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들은 고작해야 열의 병력이다.
몸을 돌리려던 그레모리를 보며 아서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에게 조건을 걸지.”
만약은 무조건 생각해야 하니까.
“영지 이동하는 동안 안대를 착용하고 움직일 것, 식당이나 숙소에서만 벗을 것, 그리고 그들에게 소량의 골드를 받을 것.”
아서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염탐하러 왔을 가능성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 * *
벤과 오크들은 그레모리가 안내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우악스럽게 고기를 뜯고 흑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익, 군주님께선 안 오시는 건가요?”
“네, 군주님은 침소에 드셨습니다.”
그레모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벤이 거칠게 입가를 쓰윽 닦아냈다. 다른 오크들도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자신들은 다른 영지에서 온 손님들이다.
더군다나 벤이 알기로.
‘이 영지는 만들어진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어.’
정말 초보자에 불과한 영지의 군주가 바로 이 땅의 주인.
그런 자가 자신들을 안대를 쓰게 하고 또 마중 나와 보지도 않다니.
‘간덩이가 처부었군.’
하지만 벤은 그 말을 속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취익, 고기맛이 좋습니다.”
그 말에 그레모리는 덧붙이진 않았다.
그때였다.
탱그랑!
물이 담긴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레모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 * *
아서는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그레모리에게 보고를 받았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예, 모두 식사를 끝낸 후에 내준 여관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골드도 받았고요.”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점심에 영지를 나서기 전에 군주님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럼 대사관에서 보는 걸로 하고.”
보고를 받았던 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침 일찍 성을 나섰다.
아침마다 영지를 둘러보는 것이 이젠 거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거닐던 중 아서는 소년 로우를 볼 수 있었다.
소년 로우는 엊그제 자베스라는 소녀에게 고백을 했던 그 소년이다.
아서는 문득 과연 둘 사이가 어찌 되었을지 궁금했다.
어제 꽃 두 송이를 들고 찾아가 보라고 자신이 귀띔해 줬으니까.
“로우야.”
“구, 군주님.”
로우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도 숨이 꽤 거칠다. 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그 물음에 로우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 영지에 방문한 오크 중 하나가 음식을 나르던 자베스가 병을 깨트려 물이 튀었다고 험악한 욕을 하고 자베스의 이마에 빵을 던졌대요.”
“음?”
아서는 미간을 구겼다.
그런 보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아서가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듯 그레모리를 돌아봤다.
그녀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자베스가 너무 무섭다고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요…….”
“그레모리.”
아서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그레모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예, 군주님.”
“사소한 거 하나라도 보고하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그레모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실 정말 그건 ‘사소한’일일 뿐이다.
아서는 천 명이 넘는 영지민을 다스리는 군주다. 또한 앞으로는 더 많은 영지민을 받아들이게 될 거다.
그러한 군주가 고작 영지민 한 명 때문에 다른 영지에서 온 손님들과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지 않은가.
또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도 없었다. 다시 언급하기로 고작 영지민 한 명이 오크에게 천대를 받았을 뿐.
“그레모리.”
“예.”
“넌 80점짜리 대리인으로 감점이다.”
“……!”
그레모리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나, 나의 군주님이. 날 미워하셔?
당장 눈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표정이 된 그레모리였지만 아서는 차가웠다.
‘어쩌면 쉬이 넘길 수 있는 일이지.’
그럴 수도 있다.
그레모리가 어떠한 생각인지도 안다.
자신을 생각해서, 또 영지를 생각해서 보고하지 않았겠지.
“날 위해서 말하지 않은 건 안다. 하지만 그레모리, 넌 지금 날 믿지 못한 거야.”
아서는 그 말을 남기고 자베스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몸을 돌렸다.
그레모리는 암담한 표정으로 서둘러 아서의 뒤를 쫓았다.
* * *
군주는 손님에게도 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사관이 필요한 거다.
대사관에 그레모리를 옆에 두고 앉은 아서의 뒤로 병력 30명이 나열해 서 있었다.
그리고 벤의 뒤로는 아홉 명의 오크가 있었다.
“취익,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아서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벤은 그 행동에 속으로 그를 욕했다.
‘취익, 건방진 초보 군주 놈 같으니. 어제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벤은 비릿하게 웃었다.
‘취익, 우연치 않게 이 영지에서 쉬게 되었지만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대리인 벤은 얄팍한 수를 품고 있었다.
“취익, 아시겠지만 포르데일 땅은 무척 위험한 땅입니다.”
역시 끄덕끄덕만 하는 아서다.
“알기로 이 영지가 주인을 찾은 지는 고작 2주가 채 되지 않았지요. 저희가 물심양면으로 보호해 드릴까 하는데. 이렇게 도움을 주신 것도 인연이고 하고요.”
이번엔 아서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요것 봐라?’라고 생각하며 다음 그가 꺼낼 말을 짐작해냈다.
“취익, 저희 아르한 영지 뒤로는 트롤 연맹과 더 위로는 발키리 총연맹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저희에게 도움을 주는 군주가 있습니다. 폭군 자칸이라고.”
“흐음.”
아서는 흥미 있다는 소리를 냈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군주보호기간이 끝난 지 고작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얼마 전엔 영지 두 개를 동시에 깨부수셨죠.”
벤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또 포르데일 땅에 연이 있는 군주도 많고 또 저희에게 일정의 ‘보호비’를 내는 군주도 많습니다. 저희가 특별히 군주님께는 매달 영지에서 나오는 8%의 골드만 받고 보호해 드리죠.”
아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찻잔에 든 차를 모두 들이켰다.
“취익, 무척 싼값에 해드리는 겁니다. 폭군 자칸은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아서는 모두 마신 찻잔을 들어 올려 손 위로 던졌다가 잡았다가 던졌다가 잡았다가를 반복하며 다리를 꼬곤 말했다.
“어제저녁 여관에서 오크 하나가 우리 영지민 머리에 빵을 던졌다고 들었다.”
“취익? 아, 그런 사소한 일이 있긴 했지만 어쩌시겠습니까. 저희에게 보호비를 받고…….”
아서는 벤이 제안하는 걸 알고 있었다.
흔히 군주들은 이걸 ‘군주 뜯기’라고 부른다.
군주보호기간 중에 개월 수가 좀 된 군주, 그러면서도 보호기간임에도 꽤 자리를 빨리 잡은 군주들이 하는 비매너 행위다.
보호를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아직 연맹에 들지 않은 어중간한 영지에 접근한다.
그리고 매달 곳곳에서 골드 10%에서 많게는 20%까지 뜯어내 자신들 영지를 부풀린다.
초보 군주들은 사실상 대항이 불가능하다.
만약 여기에서 거절하면 당장 그들은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해 온다.
‘웃음 뒤로 숨은 탐욕.’
딱 그 말이 어울린다.
아서는 방금 전 그가 뱉은 말을 곱씹어봤다.
“그런 사소한?”
아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벤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가 피식 웃었다.
“취익, 고작 영지민 한 명한테 빵을 던진 것 따위로 과민 반응이십니다. 이래서야 어찌 영지를 다스리…….”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아서는 들고 있던 찻잔을 있는 힘껏 벤의 이마에 정확히 던졌다.
수웅!
콰지익!
“헙!”
“헉!”
“……취익!”
순간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카자벤의 독창을 꺼냈다.
“그래, 사소한 일이지. 사소하게 발카스 영지의 군주 아서 더 프레스가 대리인의 머리에 컵을 던졌다.”
주르륵
벤의 이마에서 피가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얼굴을 구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취익, 지금 이게…….”
아서는 테이블을 발로 팍 차버렸다.
그 힘에 밀려나던 테이블을 벤이 발로 밟아버렸다.
우지직!
테이블이 부서졌다. 아서는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군주나 되어놓고 쪽팔리게 쫄따구한테 먹을 걸 던지진 않아. 컵을 대리인 이마에 꽂는 거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