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군주회귀록 044화
“군주님, 안녕하십니까!”
“아, 랜이로군.”
아서는 뒷짐을 지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랜은 커다란 돼지를 밧줄로 묶어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꾸이이익!
돼지가 요란한 비명을 토한다.
“웬 돼지가…….”
아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심술맞지?”
생김새도 심술맞은데, 랜이 밧줄을 당기면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말도 마십시오. 저희 집에서 키우는 돼지인데, 어찌나 힘이 센지 우리를 부수고 탈출했습니다. 또 말은 얼마나 안 듣는지. 이 돼지 새끼, 자꾸 그러면 오늘 밤에 통구이를 해버리겠어!”
꾸이이이익!
돼지가 어차피 언젠간 통구이가 될 것 아니냐는 듯 울었다.
랜이 멋쩍게 웃었다.
민망한 거다.
현재 랜은 병사들을 이끄는 핵심이었다. 그런 그가 돼지 한 마리에 애를 먹고 있으니.
한데 그 우스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아서는 괜스레 잡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즐겁다고 해야 할까?
띠링!
그때 아서의 앞으로 중요 정보 열람이 떠올랐다.
1,000캐시로 비싼 편은 아니었기에 단숨에 구매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론은 오늘 당신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영지로 나가 마음껏 그림을 그려보라고. 당신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강해지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일 알론이 내준 숙제에서 60점 미만을 맞을 확률이 다분하다.
‘흠…….’
중요 정보 열람이 훈계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아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난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 전략 전술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영지에 나와서도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게, 가장 나은 그림을 그려 성장할까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이 중요 정보 열람의 꾸짖음이 아서에게 와 닿았다.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거.’
그런 걸 그려보는 건 어떨까.
저걸 그리면 더 많은 숙련도가 오를 것 같은데? 저걸 그리면 더 나은 능력치가 붙을 것 같은데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나를 위해 그리고 싶은 거.
그런 걸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라, 이 돼지 놈아!”
랜이 낑낑거리며 돼지를 끌고 갔다.
아서는 자연스레 이끌리듯 그를 쫓아 걸었다.
어느덧 랜은 돼지를 수리한 울타리 안에 집어넣고는 손을 훌훌 털었다.
“이 돼지 새끼. 이젠 못 나올 거다.”
손을 훌훌 턴 그는 멋쩍은 웃음으로 아서를 보며 웃었다.
아서도 빙그레 웃어 주었다.
그 순간.
콰지익!
돼지가 울타리의 허술한 부위를 정확히 짚어내 몸으로 들이박았다.
허무하게 부서져서 아서와 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고.
꾸이이이익!
신이 난 돼지는 탈출을 시도했다.
“야 이 돼지 새끼야, 거기 서라! 저놈은 돼지가 아닌 게 분명합니다!”
돼지를 쫓아 달리는 랜을 보면서 아서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돼지와 그를 쫓는 사내라니.
“푸흐흐흐!”
한참을 웃던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그리고 싶은 거.
이걸 그려보자.
아서는 돼지를 쫓는 랜과 신이 나서 도망치는 돼지를 그렸다.
30분에 걸쳐 그려낸 아서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 그림을 손으로 쓰윽 쓰다듬었다.
“우울할 때마다 보면 좋겠는데?”
즐겁다.
처음인 것 같다.
그림을 그리면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건.
‘그래, 오늘은 나를 위해 시간을 쓰자.’
그동안은 매일 앞만 보고 달리는 일상이었다.
아서는 영지를 둘러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손을 붙잡고 옆에 앉아 꾸벅 잠이 든 어린 소녀. 노부인은 부드럽게 소녀의 머리를 끌어와 자신의 팔에 기대게 하고 토닥였다.
아서는 그 둘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고된 일이 끝나고 흑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하하하, 내가 왕년에 말이야’ 하면서 웃는 술집의 사내들.
그들의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
어린 소녀와 소년이었다.
“널 좋아해, 자베스!”
열두 살 정도 되는 소년이 예쁜 금발 머리 소녀에게 붉은빛 장미를 건넸다.
그 장미를 보던 소녀가 팔짱을 끼고 귀엽게 콧방귀를 끼었다.
“고작 한 송이? 나는 나에게 열 송이 장미를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해!”
아서로서는 그 모습이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다.
소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꽃을 내미는 장면을 그려보면 되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아서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구, 군주님……! 윽, 실연을 들켜 버렸어요!”
“실연이라.”
이 어린 나이에 실연이란 말도 알고. 소년은 그렇게 말하지만 무척 시무룩해 보였다.
“저 소녀도 널 좋아하는 것 같아.”
“네에?”
아서가 소년의 옆에 붙어 말했다.
“볼이 발그스레해지는 걸 못 봤니? 부끄러워서 그런단다.”
“정말이요?”
“그럼 정말이지. 내일은 꽃 두 송이를 들고 찾아가 보거라.”
소년이 큰 눈을 똘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사라지고 아서는 빙그레 웃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라. 잘되었으면 좋겠군.’
그림을 완성한 아서가 쫙 펼쳐 보이며 웃었다.
띠링!
그때 군주 육성기가 황금빛을 흩뿌렸다.
[창조주 군주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진짜 즐거움에 대해 깨우칩니다.]
[창조의 그림, 가속 그리기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창조의 그림이 3레벨에서 5레벨로 상승합니다. 그릴 수 있는 범위가 커집니다.]
[가속 그리기가 3레벨에서 5레벨로 상승합니다. 더욱더 빠르게 그리실 수 있습니다.]
[손재주+5를 얻었습니다.]
아서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어쩌면 ‘고작’일지도 모르는 것에 창조의 그림이 2레벨 업을 했고 가속 그리기도 2레벨 업을 해냈다.
창조의 그림의 대폭적인 상승.
5레벨이 된 창조의 그림.
‘이 정도라면…….’
그릴 수 있는 폭이 대폭 늘어났다.
‘어쩌면 5레벨전까지는 단지 창조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의 레벨까지는 사실상 효율은 크게 없었으니까.
어쩌면 아칸은 아서가 진정으로 그림에 대해 깨우쳤을 때 진짜 창조의 그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아서는 경쾌한 걸음으로 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르게 알론은 밤중에 군주 아서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자 항상 앉아계시던 자리에 군주님은 없었고 그레모리만이 있었다.
알론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벽에 액자로 걸려 있는 다섯 점의 그림.
알론은 그 그림을 하나하나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군주님께서 그림을 벽에 걸어놓으라 하셨습니까?”
“계속해서 한 번씩 보더군요. 그러고는 흐뭇하게 웃으셨습니다.”
알론은 빙그레 웃었다.
‘내 제자라…….’
살아생전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가르쳐 본 적이 없는 알론이다.
한데 일취월장할수록 기쁘기 그지없다.
때마침 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론 선생, 숙제를 끝마쳤어.”
“그림을 그리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그 질문에 아서는 곰곰이 생각하며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기쁘기도, 안타깝기도, 또 재밌기도 했지. 마치…….”
알론은 그의 마지막 말에 집중했다.
“그림 한 점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담아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그렇군요.”
알론은 빙그레 웃었다.
아서는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전 아서 군주님께 90점을 드리겠습니다.”
90점이라. 얼마 전 아서가 그레모리에게도 90점이란 점수를 주었었다. 여기에서 자만하지 말고 더 나아가라는 의미.
그도 같은 뜻임을 알고 아서는 이를 드러내 웃었다.
띠링!
[퀘스트. 알론의 숙제 완료.]
[손재주+2 카리스마+1을 얻었습니다.]
[2,000골드를 얻었습니다.]
아서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던 중, 곧바로 다시 홀로그램이 떴다.
띠링!
중요 정보 열람.
아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중요 정보 열람은 아마도 알론에 대한 정보일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2,000캐시를 들여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매혹의 화가 알론)
한때 그림 한 점으로 대륙 전체를 휘두른 사내가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본 많은 자는 그 그림에 매혹되었고, 화가인 알론은 그를 통해 많은 일을 해내고 많은 죄도 저질렀다.
+퀘스트: 알론의 진정한 인정
아서는 곧바로 퀘스트도 클릭했다.
(알론의 진정한 인정)
등급: B
지급 골드: 5,000
보상: 알론의 매혹의 그림 그리기 세트 > 알론 지급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시: 알론이 당신을 떠납니다.
설명: 제자를 두지 않으려 했던 알론. 그가 당신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의 인정을 받아라.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그에게 인정받는 날이 오길 바란다.
“오늘은 영지민들을 위해 재미난 구경거리를 준비했어. 내가 알론 선생 덕분에 능력도 더 특별해졌기도 하고.”
“아, 그렇습니까?”
알론은 빙긋 웃었다.
아서는 알론과 그레모리를 이끌고 성 외곽으로 나갔다.
성 외곽으로 나온 아서는 머릿속으로 무엇을 그릴지 생각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는 창조의 그림을 발현시켰다.
스르르르!
스르르르!
그의 손이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수십여 발의 폭죽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파파파팡!
파파파팡!
후두두두!
후두두두두!
갑작스러운 폭음에 깜짝 놀랐던 영지민들이 곧이어 탄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군주들은 가끔 영지민들을 위해 이렇듯 실제로 골드 상점에서 폭죽을 구매해 터뜨리기도 하는데, 사실 사치였다.
하지만 아서는 그리면 되는 것이기에 사치와는 무관했다.
파파파팡!
영지민들은 하늘 위에서 터지는 폭죽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히야~”
“우리 군주님께서 오늘은 폭죽을 준비하셨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서의 손이 허공에 스윽스윽 움직였다.
그러자 천 마리가 넘는 환상형 새들이 날아가 영지민들 사이를 누볐다.
“와아아!”
“정말 대단한 능력입니다.”
알론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아서는 빙긋 웃으며 멋쩍게 웃었다.
[영지민들의 활력이 상승합니다.]
활력이 상승했다.
좋은 이야기다.
아서는 하늘에서 펑펑 터지는 폭죽을 내려다보며 영지민들의 환호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 *
발카스 영지의 영지민들이 폭죽놀이를 즐기고 잠이 든 늦은 시각.
포르데일 땅 전체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땅 위로 열 명의 무리가 로브를 두르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장선 이는 아르한 영지의 오크 대리인 벤이었다.
오크 대리인 벤은 앞에서 보이는 거대한 성벽과 문을 바라보며 입을 비틀어 웃었다.
“정지정지!”
그때 성벽 위에서 발카스 영지의 병사들의 경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쓰윽 성벽 위를 훑어보자 병사들이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병사들이 겨눈 활시위를 보며 벤은 가장 먼저 푹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걷어내었다.
발카스 영지의 병사들이 오크들의 등장에 서로 눈을 맞추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