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군주회귀록 020화
“음, 만약 자네가 도전 군주라고 생각을 하고 인류의 운명이 자네 앞에 달려 있어. 그리고 인류를 위협하는 놈들은 대적할 수 없는 종족들이지. 뭐 이 위에 세상 가면 몇 있거든, 마족이나 천족들. 그런 자들과 싸워야 해. 병사들과 군주들은 겁을 집어먹었지. 왜냐,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거든! 말 그대로 자살행위라는 건데. 그 안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거지. 그 상황에 맞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 보도록.”
총교관 발로크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브록은 장난 반 진심 반이었다.
또 너무 암담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아서는 되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최후의 전쟁 전에 자신이 남아 있는 모든 인류를 이끌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아서의 대군주 도전은 말만 도전이었다.
학살을 당하다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먼저 기습해 총공격을 가했으니까.
그때 퀘스트 알림이 울렸다.
띠링!
(브록 군주 만족시키기)
등급: A
지급 캐시: 4,000
보상: 힘+3 매력+5 카리스마+5
승낙 후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시: 힘-3 매력-5 카리스마-5
설명: 깐깐하기로 소문난 자. 브록 군주가 제시한 상황을 연출하며 그를 충분히 만족시켜라.
퀘스트창이 빠르게 사라졌다.
아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겁먹은 그들의 숨소리가.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겁먹은 그들의 표정이.
누군가가 말했다.
‘우, 우린 이제 죽는 거라고. 우린 끝이야!’
또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그리고 누군가는 울었다.
‘레, 레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으면…….’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은 없었다.
방어전선이 뚫리고 적군은 막강한 힘으로 인류를 학살하며 진격해 오고 있었다.
4만 명이 지키는 코르튼 방어전선이 뚫려 전멸했다.
5만 명이 지키는 카넬 방어전선이 뚫려 전멸했다.
시체조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반대로 적의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다.
이것이 아서가 받았던 보고다.
아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겁먹은 병사들, 군주들, 살고 싶어 하는 그들.
그들을 둘러봤다.
아서는 천천히 입을 뗐다.
“12시간 전 코르튼 방어전선이 뚫렸다. 그리고 4시간 전에는 카넬 방어전선이 뚫려 적군들이 이곳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다.”
아서의 말을 들은 모두가 절망했다.
우리는 이제 끝이라고.
우리 인류는 모두 학살을 당하게 될 거라고 울부짖었다.
“하룻밤 사이에 9만 명이 죽었다. 모두 우리가 아끼던 전우들이고 가족들이었다. 빌립, 라네토, 프레인, 카젤, 로우디, 라마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웃고 울며 싸웠던 전우들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
아서는 씁쓸한 표정으로 병사와 군주들을 둘러보았다.
“적들은 말한다. 인류는 한낱 개미와 같다고. 애초에 자신들에게 대항한 것이 코웃음이 날 정도라고. 그래, 그들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지.”
아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셨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내가 아는 인간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지금 전우들을 돌아보아라. 모두가 두렵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버티고 있지 않은가. 울며불며 절망해도 이곳에 굳건히 서 있지 않은가.”
아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지킬 것을 아는 자들이다. 내 앞에 선 젠은 얼마 전 아주 건강한 아드님을 낳았지. 또 칼론은 집에 홀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모두는 그자들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이 얼마나 용감한가.”
아서의 목소리에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가. 한데 저깟 마족, 천족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했던 전우들의 시체 위에 서서 우리를 조롱하고 있다.”
아서는 굳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당장 우리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 지키기 위해 싸우러 온 그대들을 한낱 그들이 비웃고 있다. 싸우자, 죽는 한이 있어도. 인류가 결코 약하지 않음을 보여주자!”
아서가 그들을 향해 한마디 한마디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를 비웃은 저들의 심장에 검을 꽂아라! 두려워 말라, 그대의 옆에 있는 전우가 끌어주고 지켜줄 것이다. 물러서지 말라! 우리가 물러서면 우리의 가족이 죽게 될 것이다. 검이 부러지면 쓰러진 전우를 기억하며 그의 검을 들고 싸워라! 가슴에 검이 꽂힌다 한들, 그들의 목을 베어라!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고. 저들은 우리의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서는 마지막 숨을 삼키고 그들을 둘러봤다.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아서! 아서! 아서! 아서!
아서! 아서! 아서! 아서!
들렸다.
그들의 목소리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들이.
두려움이 용맹함이 되고 무력함이 강함이 되었던 자들.
그들은 결국 모두가 죽었다.
하지만 후회 없던 싸움이리라.
사아아아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있던 모든 것이 스르르 사라졌다.
아서의 눈에 보이는 건 경직되어 아서를 바라보다 펜을 책상 위에 툭 떨어트리는 교관과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브록이었다.
‘이, 이 새끼. 뭐야?’
브록은 다소 믿기 힘들었다.
터무니없는 제시.
하지만 아서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해냈다.
아니, 훌륭하게를 넘어섰다는 표현이 맞을까?
브록은 순간 그에게서 도전 군주의 모습을 보았다.
힘 있는 목소리, 절대적인 카리스마까지.
‘가, 가지고 싶다.’
브록은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모든 성적이 최우수라고 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귀찮은 일을 하게 되었다고 투정 부렸다.
하지만 아서를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오늘 여기에 오길 참 잘했다.
아서라는 보물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아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브록은 몸을 일으켰다.
“총교관.”
“예.”
“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발로크는 역시나 했다.
방금 전에는 자신도 무척이나 놀랐다.
어찌 저런 어린 소년에게서 저러한 면모가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발로크의 대답이 떨어지자 브록은 아서가 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 * *
아서는 교관 한 명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총교관의 집무실 앞에서 멈추어 섰다.
“들어가지.”
“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브록이 있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다.
브록이 있는 트롤 연맹.
그리고 트롤 소연맹을 비롯해 도전 군주 카일의 휘하에 있는 총연맹인 발키리.
발키리 총연맹은 여러 훈련소에 지원을 하고 있었다.
남들은 쓸데없는 데 돈을 쓴다고 말하지만 그런 지원 덕분에 발키리 총연맹은 매 수료마다 2명 정도의 견습 군주를 스카웃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앉게.”
“예.”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들었나?”
브록은 당찼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01명의 군주라고 한다면 인간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군주다.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으며 그들 각 개인의 병력으로도 어지간한 영지 열댓 개는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뇨.”
“나는 101명의 군주 중 테이머 군주라고 불리는 브록이다. 또한 내 위로는 카일이라는 도전 군주님이 계시지. 도전 군주에 대해서는 알 거야. 거의 절대적인 존재들이지. 그리고 나 역시도 테이머 군주라고 이름만 대면 알아줄 정도로…….”
중얼중얼중얼.
아서는 자신의 자랑과 연맹 자랑을 늘어놓는 브록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말 많은 건 여전하다고.
물론 그것이 브록 군주의 매력이긴 하지만.
“이제 알겠나?”
“대~ 단하신 군주님이시라는 거군요.”
“그렇지!”
따악!
브록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연맹과 자신에 대한 피력은 충분히 했다.
벌써 브록은 머릿속으로 파란만장한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20여 개의 소연맹을 이끄는 브록에게는 가장 큰 힘을 발휘해 줄 결정적인 타격대가 필요했다.
아서를 그 타격대로 열심히 키워볼 생각이다.
만약 그게 불가능할지라도 아서는 승승장구 잘 커줄 것이다.
“영지전을 시작하고 1년 동안은 군주보호기간이라는 건 알 거야. 그 기간이 끝나면 연맹이 없는 군주들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해. 군주들은 부족한 자원을 다른 영지를 습격해 빼앗고 정말 또라이들은 그저 재미 삼아 이제 막 군주보호기간이 끝난 영지를 집어삼키지.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그 뒤에 서줄 막강한 연맹이라는 말이지.”
군주보호기간 1년.
그 1년 동안 기존에 아스가르드 대륙에 있던 군주들은 보호기간에 걸린 군주들을 공격할 수 없다.
단, 군주보호기간에 속해 있는 군주들끼리는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을까 하네. 우리 연맹으로 오게.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하고 발 빠른 성장을 시켜줄 의향이 있어. 물론 자네의 노력 여하에 따라…….”
“거절하죠.”
“오오, 역시 자네는 거절…… 응?”
어라, 뭔가 이상한데?
웃으며 찻잔을 들던 브록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순간 잘못 들었나 싶은 거다.
바보가 아니라면 군주보호기간이 끝나면 연맹의 도움은 절실히 필요해진다.
하지만 아서의 대답은?
“잠깐, 자네 뭐라고?”
그는 다시 물었다.
그에 아서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거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서는 단호했다.
이유를 꼽자면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연맹에 들면 행동 범위에 제한이 생긴다.
예를 들어 발키리 총연맹과 동맹을 맺은 연맹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해를 끼치는 즉시 강제 추방당하며 해를 끼친 연맹과 발키리 연맹까지 아서에게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또한 외교관이 파견되어 아서의 영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것이 분명하다.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
아서에겐 사실상 필요 없는 것들이다.
외교관보다 아서가 훨씬 우수하고 만약 그들이 그런 아서를 본다면 의문을 품을 게 분명했으니까.
“자네, 이해를 못 한 것 같은데, 대부분의 견습 군주는 영지전을 시작하면 군주보호기간이 끝나기 전에 연맹 하나씩은 들어가게 마련이라고.”
연맹의 종류는 도전 군주들이 운영하는 총연맹 다섯 개도 있지만 그 외에 힘이 부족해서 그 연맹에 들어가지 못해 자잘한 자들을 받은 연맹도 무수히 많았다.
그런 연맹에라도 군주들은 들어간다.
그래야 성장에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아서에게는 걸림돌일 뿐.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혼자가 좋습니다.”
혼자여야 한다.
연맹에 드는 건 나중도 상관없다.
또 오히려 아서가 부렸으면 부렸지 남의 밑에서 일하는 건 썩 내키지도 않고.
“허어…….”
브록의 상상의 나래가 와장창창 깨졌다.
양손을 깍지 끼어 뒤통수를 받친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말 끝나셨으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기 할 말만 딱 끝내고 나가는 아서를 보면서 브록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