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검은머리 기사왕 180화
불사왕 소멸과 함께 모든 언데드 군단은 영원한 영면을 맞이했다. 그리고 악신의 권능이었던 어둠과 오염 침식 또한 서부와 중앙 대륙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꽃이 다시 피기 시작했다. 섬으로 떠난 어린 철새가 돌아왔다. 갈색 들판은 어느덧 초록색으로 물들었고 푸른 바다와 드넓은 하늘 또한 옛 모습을 되찾아갔다.
자(自)멸하는 불멸보다 위대한 자(自)연. 살아있는 대륙은 악신이 앗아간 것을 천천히 복구해 나갔다. 그것은 환희이자 정화며 전쟁의 끝을 알리는 진정한 종식이었다.
그리고 산 자들이 돌아갈 차례가 왔다. 위대한 기사왕 눈투성이는 모든 종족이 모인 자리에서 종전을 선언했고 이내 지키기 위해 집결했던 연합군을 빠르게 해산시켰다.
중앙 대륙에서 이탈한 북방 군대는 곧바로 수도로 복귀했다. 큰 활약을 동부군 또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연합군에 가담했던 엘프와 오크 종족뿐이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모두가 우려했다. 불사왕을 소멸시킨 막강한 인간 종족이 엘프와 오크를 노예로 삼고 점령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비로운 기사왕은 그리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수복한 서부와 중앙 영토는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종말을 막기 위해 흘렸던 피를 인정하고 앞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할 대륙을 위해 선택한 것이다.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무르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명예로웠으며 우습게보기에는 너무나 위대했다. 종말로부터 대륙을 지켜낸 기사왕은 그러할 자격이 있는 자였다.
많은 엘프와 오크들이 귀향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종족이 북방에 남아 형제가 되기를 선택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닌 같은 피를 흘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 대륙과 종족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남은 것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데려와 영원한 평화와 숭고한 안식을 주는 일뿐이었다.
‘어머니 북방의 품으로.’
북방으로 향하는 운구 행렬이 줄을 이었다. 무장한 북방군은 그 행렬을 지켰고 유가족은 울면서 길을 배웅했다. 백색 관, 흰 백 밀, 겨울과 어울리는 하얀색이었다.
‘무사히 돌아가기를.’
누군가의 아빠, 아들, 엄마, 딸, 형제와 이웃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그리고 또 안녕.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란 걸 알기에 눈물 젖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륙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인간들은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모여들었다. 목적지는 북방으로 향하는 가장 멀고도 가까운 길이었다.
척! 척! 척! 척!
북방군이 길을 걸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펑펑 내리는 함박눈에도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그 발걸음은 전쟁이 아닌 한 오직 남자를 위함이었다.
‘검성.’
모든 영웅이 도망칠 때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모한 시도라고 외칠 때마다 그는 검을 쥐고 또 일어섰다.
왕의 후계를 가르치고, 흩어진 영웅들을 모아, 작은 영지에서부터 북방까지, 그리고 끝내 유훈을 받들어 기사왕을 세웠던 남자.
왜 우리는 알지 못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모든 투쟁에는 그 남자가 항상 앞에 있었다.
가장 위대했고, 가장 명예로웠으며 그 누구보다 인간다웠던 그 남자는 부러지는 검, 그리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었다.
툭, 툭.
작은 인간이 큰 족적을 남겼다. 누군가는 그를 기사라고 기억했고 또 누군가는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관이 지나가는 길에는 배웅을 위한 꽃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날만큼은 웃음도 소음도 없었다. 시간이 멈춘 북방은 드디어 돌아온 이방인을 수도 스노우가든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이미 검성이 생전 준비해 놓은 자리가 있었다.
깡! 깡!
연무장 벽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위도, 아래도 아닌 수많은 형제 한가운데 이름이 새겨졌다. 기사 부러지는 검. 평범하게 태어나 위대한 영웅으로 죽었다.
사르륵.
기사왕은 떨리는 손으로 스승의 검을 내려놓았다. 세계수는 그 검을 소중히 감싸 안아 묘비를 만들었다. 그는 백 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스승님.’
이제 작별이다. 환하게 웃은 눈투성이는 울지 않았다. 먼저 떠난 스승이 소중한 것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또 다른 시대를 열 기사왕의 이야기였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빛이 드리우고 연무장 문이 닫혔다. 빛의 주인이 된 눈투성이 곁에는 수많은 북방인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닌.
‘아버지 검성을 위하여.’
눈부신 등불이었다.
* * *
꿀꺽.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수도 한가운데 앳된 청년이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시선은 이미 한 곳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펄럭!
척!
드디어 수도 한가운데 위치한 북방 왕실에 깃발이 펄럭였다. 조각상처럼 서 있던 북방군이 일제히 군례를 올리자 굳게 닫혀 있던 왕실 문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왕실을 걸어 나온 기사들이 도열했다. 수도 시민들은 환호 대신 극진한 예를 표했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신들의 왕을 반겼다. 기다렸다는 듯 세계수 성소에서 종이 울린다.
댕 - - - - - -.
어느덧 수도 스노우가든을 덮은 커다란 세계수가 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눈부신 햇살과 함께 광휘가 비치고 기사왕 눈투성이는 만민을 향한 웃음을 지었다.
와아아아아아아 - - - -!!
드디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뒤늦은 축제를 벌이듯 하늘에는 꽃가루가 날아다녔고 사람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날이었다.
댕 - - - - - -.
다시 한번 종이 울렸다. 함성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고 격한 기쁨 또한 설레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린 왕궁에서 붉은 강철과 제자가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기사왕, 폐하.”
이제는 백발노인이 된 붉은 강철은 흐뭇하게 웃으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제자와 함께 2년을 걸쳐 복원한 왕관 3개를 마찬가지로 3개인 왕좌 앞에 공손히 섰다.
댕 - - - - - - -.
마지막 종이 울렸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준비된 왕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먼저 왕관을 쓰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붉은 강철이 엄숙히 입을 열었다.
“어둠의 시대가 있었다.”
첫 번째 왕관은 1대 기사왕을 위한 왕좌 위에 놓였다. 어둠의 시대를 걸쳐 빛이 있게 한 그는 북방 왕국을 세운 선왕이었다. 영광이 함께하라, 모두가 경의를 표하였다.
“인간의 시대가 있었다.”
세 번째 왕관은 3대 기사왕을 위한 왕좌 위에 놓였다. 어둠이 찾아온 시대를 이겨내고 드디어 제국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남긴 위대한 기사왕은 바로 눈투성이였다.
“그리고.”
하지만 왕관은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눈가를 파르르 떤 붉은 강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드넓은 창공이 자신의 친우이자 ‘왕’을 기억하게 했다.
“두 시대를 이어 준 왕이 있었다.”
두 번째 왕관은 2대 기사왕을 위한 왕좌 위에 놓였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종자라고 믿어온 그 왕은 시대와 시대를 이어 신념을 전한 2대 기사왕 ‘부러지는 검’이었다.
3개의 왕좌가 완성되었다. 앞으로 수많은 왕좌와 왕관이 그 뒤를 이어올 것이다. 어머니 북방이시여, 먼저 떠나간 이를 감싸 안고 이제 걸어갈 이들을 살펴주소서.
스륵.
때가 되었다. 2대를 추대한 북방은 드디어 왕국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붉은 강철은 3대 기사왕의 왕관을 높이 올려 새로운 북방, 세워진 제국을 위해 또 한 번 외쳤다.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국가가 흥하고 망함과 성하고 쇠함은 흐르는 물처럼 당연하다. 노도와 같은 시간은 수명을 다해 언젠가는 북방도, 인간도, 정해진 필멸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가 생겨나고, 새로운 왕이 나오게 될 훗날 미래에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아름다웠던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와 전설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니까.
* * *
“배는 준비했어요.”
“고마워.”
북방 왕국이 제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어야 할 재상 기억하는 새와 검은 화살은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한 이름 없는 언덕에서 이별을 준비했다.
“정말로 떠나시나요?”
“응.”
일부러 수도가 시끄러울 때 빠져나왔다. 아마 축제가 끝날 때쯤이면 검은 화살은 이미 북방을 떠난 지 오래일 것이다. 그를 아는 재상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라니······.”
전쟁이 끝나고 벌써 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왕국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다양한 날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검은 화살의 시간은 아직 과거에 멈춰 있었다.
“아마 돌아올 거야.”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 북방을 향해 기도했다.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는 세계수를 통해 한 가지 답변으로 전해졌다. 그것만이 오직 검은 화살을 지탱하는 희망이었다.
“목적지라도 알려 주세요.”
“바다를 건널 거야.”
“바다요?”
“응, 검성이 그랬어. 세상은 둥그니까, 돌고 돌아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겠지.”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고 있다. 바다를 건너고 또 건너면 커다란 폭포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검성만큼은 이 세상이 원처럼 둥글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가 있을 것이고 또 닿지 못한 땅이 있을 것이다. 검은 화살은 긴 여정을 떠난 검성을 따라 나아가고, 또 나아가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검은 화살, 혹시.”
“나는 믿어. 그러니까 아무 말 마.”
검성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지만, 어머니 북방은 분명 그렇게 말해 주었다. 검은 화살은 고개를 돌려 끝이 보이지 않는 북방을 보았다.
“수십 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어.”
엘프의 피가 섞인 자신은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 수명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검성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검은 화살은 재상 기억하는 새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이제 가야겠다.”
만남은 길고 이별을 짧을수록 좋다. 미련 없이 인사한 검은 화살은 가벼운 짐을 챙겨 걸음을 돌렸다. 마침 저 멀리 하늘에서는 떠나기 좋은 순풍이 불고 있었다.
“아, 아! 잠깐만요! 여기요!”
하지만 그 순간 깜짝 놀란 재상이 작은 비명과 함께 황급히 뛰어왔다. 그녀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듯 품속에서 익숙한 깃털 장식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북방 수리의 깃털로 만든 검성의 검집 장식이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그 물건은 기사왕 눈투성이가 떠나는 검은 화살을 위해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북방 수리는 먼 하늘을 날아 다른 대륙으로 떠난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그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찬바람이 불면 반드시 북방 고산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검은 화살은 깃털을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감촉을 느끼며 환하게 웃었다. 창공에는 마침 그리운 수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