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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79화 (179/181)

< 179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9화

파스스스스 - - -!!

금방이라도 산 자를 집어삼킬 것 같은 언데드가 한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단말마와 함께 한낱 검은색 재가 되어 하늘로 흩어져 버렸다.

그놈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도, 또 그 옆에도 여파가 전해진다. 평원에 넘실거리던 언데드 군단은 거짓말처럼 소멸하며 진정한 안식인 죽음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놈들이 사라진다.”

한 병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한 것이라곤 그저 나약한 기도였을 뿐인데 오직 두려움과 절망뿐이던 세상은 환한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간다. 먹구름 사이로 희망의 해가 뜬다. 살아남은 이도, 죽을뻔한 이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음이 물러간 평원에는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어이! 여기다!”

“들 것 가져와! 빨리!”

우리만 살아남은 게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오염 침식에서 벗어난 연합군 병사들이 하나둘 평원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함성도 비명도 없는 전장은 그저 길고 길었던 종말의 종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리처드!”

정신을 차린 이들이 부상자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을 급히 찾던 헬레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남편인 동부왕 리처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탁! 탁! 탁!

헬레나는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쓰러진 리처드 앞으로 다가가 맥박을 짚었다. 두근두근, 미약한 박동이 느껴진다. 다행히도 그는 소중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 어서 약을······!”

불사왕이 목을 잡았었다. 막강한 권능을 생각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갑옷을 벗겨 오염 억제제를 뿌려야 했다. 헬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급히 치료사를 부르려고 했다.

“- - - - - - -?”

하지만 치료는 소용없었다. 아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피부를 검게 물들였던 불사왕의 오염 침식은 마치 씻겨 나가는 먹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억제와는 다른 완전한 소멸이다. 두 눈을 크게 뜬 헬레나는 무심코 자신의 상처도 살폈다. 녹슨 칼에 찔렸던 허벅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삐이이이이이 - - - -!!

부름이 들렸다. 그 부름은 고요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먹구름이 사라진 푸른 하늘에는 북방 수리 한 마리가 홀로 날고 있었다.

“아······.”

탄식을 터트렸다. 이제야 보인다. 먹구름보다 높은 창공 구름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도대체 어떤 검이었을까. 권능을 초월한 인간의 신념이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헬레나.”

오염 침식이 전부 소멸했다. 정신을 차린 리처드는 가장 먼저 헬레나를 알아봤고 이내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는 힘겹게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

꾹.

동부왕이 가장 먼저 잡은 것은 명예로운 검도, 영광스러운 깃발도 아닌 소중한 아내의 손이었다. 그렇게 헬레나와 손을 붙잡은 리처드는 힘겹게 한쪽 눈을 떴다.

해가 눈부시다. 오랜 고통이 지나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평화와 안식, 정수이자 정화를 눈물과 흘려낸 리처드는 입을 열었다.

“······가자.”

고개를 끄덕인 헬레나가 리처드를 부축했다. 그리고 크레이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저 아래에는 스승과 제자가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리처드와 헬레나는 침묵을 지켰다. 저 멀리 숨죽여 울던 화살도, 뒤늦게 달려와 주저앉은 재상도 모두 눈물을 삼켰다. 오직 먹먹한 고요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이다. 한 남자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런 계절이 드디어 찾아왔다. 눈이 너무나 시렸던 리처드는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래, 눈이 시려서 그런 것이다.

* * *

광휘가 번쩍였다. 목이 베인 불사왕은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소멸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는 오직 눈부신 한 아이만이 서 있었다.

“스승님!”

눈투성이는 검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왔다.

스승님, 스승님. 쉼 없이 부르는 목소리가 가라앉는 정신을 일깨운다.

나는 늘 그렇듯 대답해 주었다.

“그래.”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힘들었니. 그런데도 너는 참고 또 참아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잘했다. 훌륭하다. 희미한 웃음을 머금자 눈투성이가 엉엉 울며 나를 감싸 안았다.

“괜찮으세요?”

“그래, 편안하다.”

고행 끝에 삶이라는 산을 넘었다. 이제는 그 어떠한 동요도, 고통도 남아있지 않다. 운명이 바람이 되어 불어갈 때, 내게도 드디어 안식이라는 것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니 울지 마라.”

얼마나 울었는지 볼이 축축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인 눈투성이는 내 손을 꾹 잡으며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한번 터진 울음은 겨우내 기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돌아가요. 스승님.”

그래, 집으로 가자. 눈물을 삼킨 눈투성이는 움직일 수 없는 노구를 일으켜 등에 업었다. 그동안 어깨 위에 싣고 있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제자를 향해 전해졌다.

“무겁지 않니?”

“깃털처럼 가벼워요.”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던 작은 아이가 어느덧 스승을 업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이 어색하면서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작은 심장 박동과 함께 느린 걸음이 이어졌다.

“- - - - - - - -.”

세상은 조용했다. 불어오는 겨울바람도 오늘따라 따뜻하게 느껴진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걸친 황혼이 걸치자 세상은 어느새 주황빛 물감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스승님, 꽃이에요.”

“이쁘구나.”

“저기로 갈까요?”

“아니, 지켜보고 싶다.”

계절을 잊은 하얀색 들꽃은 바람과 함께 흔들렸고 걸음을 밟는 곳마다 지려밟은 풀 내음이 나지막이 맡아진다. 나는 문득 이와 반대되는 첫 번째 겨울을 떠올렸다.

“기억이 난다.”

“네?”

“네가 처음 검을 잡던 날 말이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

벅찬 얼굴, 떨리는 입술, 휘날리는 검은 머리는 눈보라를 타 놀았고 검을 움켜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게 꿈이라는 것을 말했다.

“내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약조했지.”

“······네, 스승님.”

“끝내 이뤘구나.”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투성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또 누구보다 앞서 투쟁했다. 마치 내가 묵묵히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오듯이 말이다.

가끔은 묻고 싶었다. 답답하지 않았냐고, 혹은 스승이 미련해 보이지 않았냐고 말이다. 내게는 과분한 아이였던 만큼 좋은 가르침과 행복한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히히.”

눈투성이가 울다가 웃었다. 그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또 문득 안심되었다. 걸음은 걷고 또 걷는다. 흐릿하던 시야가 마치 눈이 오는 북방처럼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눈이 오니?”

“네, 눈이 와요.”

이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투성이는 그를 아는지 거짓말을 했다. 소리 없이 우는 눈물이 느껴진다. 나를 등에 업은 녀석은 그 어느 때보다 서럽게 울고 있었다.

먼 줄 알았더니 벌써 도착했다. 눈이 멀고 나서야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이다. 곧 돌아갈 아름다운 북방, 그리고 내 형제들과 가족이 이리 오라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올해 겨울은 따뜻하구나. 북방으로 돌아가면 흰 눈산을 올라야겠어.”

“왜요, 스승님?”

“네가 겨울 사과를 좋아하잖니. 해가 잘 드는 곳에 괜찮은 사과나무를 보았다. 그 질긴 녀석이 벌써 두 개나 꽃을 피웠지.”

“제 거는 스승님이 드세요.”

“아니, 하나는 네가 몰래 먹고 나머지 하나는 달콤한 잼으로 만들자.”

“나눠 먹을 수 있게요?”

“그래, 그래. 갓 구운 빵이면 다들 좋아할 거야. 햇볕이 잘 드는 정원에서······. 빵 굽는 냄새와·········. 꽃과 하늘·········.”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형제들이 모여있는 풍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을 들어 들꽃이 춤추고 있는 북쪽으로 뻗어 보았다.

팔락.

손끝에 하얀 나비가 날아와 앉았다. 겨울에 꿈을 꿔 겨울에 닿았던 나비가 살며시 날개를 편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야속한 녀석은 대답 없이 날아올랐다.

“아·········.”

그 순간 바람이 불어온다.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미련을 떠나보내자 세상이 온통 하얀 나비로 물들었다. 나는 날아가는 것이 아닌 앞서 불어온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눈투성이.’

고개를 돌렸다. 눈투성이가 연신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너를 만나 행복했다.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희미한 웃음이 천천히 멎는다.

‘내 아들아.’

따뜻한 손이 잡아주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난 나는 어머니 북방과 함께 들꽃이 핀 언덕을 내려갔다. 앞으로 쭉 걸어가자 눈투성이는 어느덧 홀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단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들리지 않아도 들리고 있다. 형제들은 단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손을 흔드는 수많은 나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니?’

울고, 웃고, 쓰러지고 일어나는 바보 같은 남자는 있었다. 돌아갈 줄 모르는 그는 미련한 삶을 살았으며 무엇 하나 쉽게 이뤄본 적 없는 불쌍한 기사왕의 종자였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으며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뎠다. 그리고 끝내 이 손으로 마지막 장을 덮는다.

펄럭.

종자 부러지는 검은 막을 내리고,

다음은 기사왕 눈투성이의 이야기다.

“스승님, 졸리세요? 지금 잠드시면 안 돼요. 저번에도 훌쩍 떠나 버리셔서 재상님이 혼자 고생하셨단 말이에요, 헤헤.”

“······.”

“그래서 잼은 어떻게 만들 거예요? 설탕을 넣을까요? 꿀을 넣어도 괜찮아요. 겨울 사과는 무얼 해 먹어도 맛있거든요.”

“······.”

“돌아가면 연회를 여는 게 어때요? 앗, 축제가 좋겠다. 저번에는 5일 동안 열었으니까, 이번에는 일주일 내내 열어요!”

최대한 늦게 걸었다. 귀가 아프도록 떠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승님이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었다.

탁.

함께 올라온 언덕이 끝이 났다. 드넓은 평원에는 모든 이들이 집결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마지막까지 참고 또 참았던 눈투성이가 눈물을 글썽였다.

“스승님, 주무세요?”

다들 검성을 기다렸다. 오직 그 남자만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직 그 남자만이 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목소리를 떤 눈투성이는 앞으로 계속 걸어가려고 했다.

“다, 다들 모이셨어요.”

그토록 원하던 재회다. 당신이 가르쳤던 왕도, 위기 끝에 구해낸 친우도, 함께한 동료도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 보아도 스승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털썩.

걸음이 끝내 멈춰 섰다.

“아, 아아······.”

울음이 터졌다. 기사왕이 서럽게 울었다. 부모가 죽어도, 살이 찢어져도, 꿋꿋했게 버텨오던 눈투성이는 스승이 죽었다는 것을 알자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너를 만나 행복했다.’

지붕이자 기둥이었고, 하나뿐인 스승이자 부모였다.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준 그는 이제 이별이란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눈투성이는 마지막 목소리에 답하고 싶었다.

당신을 만나 행복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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