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8화
[검성 - - - - - -!!!!!]
불사왕이 분노가 섞인 고함을 내지른다. 그러자 안개처럼 자욱한 놈의 검이 붉은 벼락을 이어 휘둘러졌다. 전장을 가로지른 나는 그대로 날아와 놈과 검을 맞부딪쳤다.
챙! 치지지직!
챙! 챙! 채앵!
놈이 찔러오면 막고 내가 휘두르면 놈이 막는다. 짧은 찰나 수십 번이 넘는 검격을 나누었다. 그 단순한 과정은 구름이 넘실거리는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진동시켰다.
우우우우 - - -.
검이 공명한다. 붉게 달아오른 날은 가속한 속도를 체감하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경합도 승패를 결정짓지는 못했다. 악신인 불사왕과 나는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쾅!
콰르릉!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 황급히 검을 거둬들인 뒤 물러나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 붉은 벼락을 쏟아 냈다. 이를 앞서 예상했던 나는 360도로 돌아 공격을 피해내었다.
서걱!
[끄윽!]
공격 직후 빈틈이 보인다. 회전한 자세를 이용해 검을 휘두르자 불사왕은 어깨가 얇게 베이며 물러났다. 나는 자연스레 바닥에 쓰러진 눈투성이 앞을 가로막았다.
쿨럭!
상처와 출혈이 심각하다. 이대로 두면 멀지 않아 숨이 끊기고 말 것이다. 담담하게 숨을 몰아쉰 나는 왼쪽 손을 조용히 뻗어 심장이 흡수했던 세계수 파편을 일깨웠다.
‘어머니 북방이시여.’
심장 박동이 줄어든다. 동시에 농축된 세계수의 기운이 손끝을 타고 눈투성이를 향해 흘러내렸다. 몸에 깃든 청록색 기운이 드리웠던 죽음과 오염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당신의 안배입니다.’
파편은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그동안 내 몸을 보호해 주던 세계수 기운은 이제 눈투성이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드디어 신이 남긴 안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아.
숨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출혈은 어느덧 멎었고 희미하던 광휘 또한 빛을 되찾았다. 머리 위로 작은 헤일로가 떠오른다. 그것은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았다.
쾅! 콰르르릉!
[네노오오오옴 - - -!!!]
일이 틀어졌음을 느낀 불사왕이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나는 그 검을 가볍게 거둬냈고 눈투성이를 향해 쏟아지는 벼락마저 몸으로 막아냈다.
치지지직!
“여긴 못 지나간다.”
북방의 뒤를 이을 아이다. 후손을 위해 새 시대를 열 위대한 기사왕이다.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다. 온몸으로 앞을 가로막은 나는 불사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콰앙!
검과 검이 또 한 번 부딪친다. 날카로운 기운은 마치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수시로 날아오는 붉은 벼락과 오염 침식. 나는 모든 힘을 동원해 불사왕을 상대했다.
서걱!
서걱!
지옥문이 닫힌 놈은 조급하다. 나 또한 명백한 한계를 느끼고 있다. 서로가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에는 공격으로 대응하고 가하는 한 수는 반드시 상대를 베었다.
쾅! 치지지직!
“후우, 후우.”
서로가 상처를 남긴 뒤 뒤로 밀려났다. 불사왕은 미간을 찡그렸고 나는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윽······!]
예상대로 놈은 많이 쇠약한 상태였다. 그동안 힘의 원천이던 지옥문이 닫히자 더 이상 권능을 발휘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악신의 소멸은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꾸욱.
하지만 반대로 내게도 시간이 없었다. 너무나 오래 노출되어있던 몸은 이미 오염 침식이 시작되었고 최후의 보루였던 세계수 파편마저 치료를 위해 양도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눈투성이가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으니 곧 의표를 찌를 순간이 올 것이다. 검을 꾹 쥔 나는 검은색 권능을 일으키는 불사왕을 노려보았다.
[- - - - - - - -.]
이미 여러 수를 나누었다. 놈 또한 상대가 호각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속임수와 빈틈. 머리가 식은 불사왕은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오라!]
후우우우우웅 - - - -!!!
그 순간 불사왕이 손을 뻗어 권능을 발휘한다. 희생된 영혼은 검은 침식으로 물들었고 이내 안개 속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사념체를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끼이이이익!
돌풍이 몰아치며 안개가 형체를 이룬다. 불사왕이 마지막 권능을 쥐어짜 만든 사념체는 여덟 마리였다. 놈은 기다렸다는 듯 검은 안개를 사방으로 뿌리며 달려들었다.
후웅!
기세와 바람이 일직선으로 쏟아졌다. 겉으로 본다면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나를 노리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불사왕은 최우선 표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끼이이익!
검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동시에 한 사념체가 내 사각을 노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해낸 나는 놈을 검을 휘둘러 소멸시켰다. 이건 한 차례 눈속임이다.
끽!
제동을 걸고 급선회했다. 뒤쪽으로 몸을 날리자 역시나 사념체 하나와 불사왕이 눈투성이를 노리고 있었다. 이를 악문 나는 사념체와 불사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 - - - - -!!”
하지만 제대로 베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놈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하나라고 생각했던 사념체가 둘이다. 그렇다면 검은 안개로 몸을 숨긴 불사왕이 진짜로 노린 것은······.
[여전히 미련하구나.]
푸욱!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심장을 노린 놈의 검이 어깨에 박혔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넘실거리는 오염 침식이 불사왕의 비열한 웃음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깨를 관통한 불사왕의 검이 내부를 찢어발긴다. 피를 토해낸 나는 어깨를 관통한 검날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압도적인 권능과 오염 앞에 손이 치지직 타오른다.
[네놈은 늘 같았지.]
판단이 간파당했다. 불사왕은 내가 대응이 아닌 보호를 우선한다는 것을 이용해 수를 비틀었다. 오른쪽 손을 발로 짓밟은 놈은 반대쪽 손끝에 검은색 오러를 발현했다.
[끝이다.]
순식간이었다. 막아낼 겨를도 기운도 없었다. 놈이 가한 공격은 내 심장을 향했고 죽음을 직감한 본능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어둠으로 물들기 직전이었다.
“검성!”
끼기기긱, 퓽!
하지만 그 순간 푸른색 오러 줄기가 날아와 놈의 오러를 꿰뚫었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얀 바람을 탄 검은 화살이 내게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상황을 타개할 변수가 등장했다. 검은 화살은 빠르게 시위를 걸었고 나는 동요한 불사왕을 밀쳐내고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기사왕을 죽여어어어어!!]
끼이이이이익!
사고가 가속한다. 세상은 마치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찰나의 순간, 누군가의 죽음과 교차하는 주마등. 명령을 받은 사념체가 눈투성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 - - - -.”
선택해야 한다. 놈들을 막아야 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위를 당긴 검은 화살을 바라보았다. 짧고도 긴 순간 나와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누구보다 슬피 울고 있었다.
‘부탁한다.’
그녀의 한 발이 운명을 결정한다. 부디 흔들리지 말고 나아갈 길을 걸어라. 검은 화살은 기꺼이 시위를 놓았고 한 줄기 오러는 내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쒜에에에엑, 쨍그랑!
눈투성이를 죽이려던 사념체의 가시가 오러를 맞고 흔들렸다.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이미 불사왕을 등지고 돌아 나머지 사념체 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걱!
푹!
검은 휘둘러 눈투성이를 구해냈다. 동시에 등판과 왼쪽 가슴이 뜨거워졌다. 불사왕이 나를 찔렀다는 것을 인지할 때쯤 무언가를 잇고 있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툭.
그리고 다른 끈이 이어졌다.
“아······.”
눈투성이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살며시 떠진 맑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을 때 드디어 신의 안배가 완성되었음을 느꼈다. 녀석의 손이 내 옷깃을 꾹 움켜잡았다.
“잘했다.”
그동안 감내한 모든 고통이 영혼 위로 녹아내렸다. 피로 젖은 얼굴 위로 작은 웃음이 그려진다. 이제 마지막이다. 네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마. 나는 두 눈을 감았다.
* * *
휘이이이이 - - - -.
시원한 바람과 함께 꽃눈이 내린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북방 언덕에는 그리운 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다. 기억 속 선왕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종자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야속함은 결국 눈물로 흘러내렸다. 선왕은 손을 뻗어 나의 주름진 눈가를 닦아 주었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
포기하지 않았다.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쓰러지지 않았고 온갖 고통과 역경에도 끝까지 인내했다. 나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인간 부러지는 검으로 살아왔다.
행복했다. 선왕과 함께했던 때, 눈투성이를 만났을 때, 소중한 일행과 일상, 웃음, 기쁨, 모든 것을 나누고 나아갔을 때, 이 모든 순간과 시간이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이어갈 이들을 찾았습니다.’
우리의 시대는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또 다른 영웅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또 다른 내일이 오고 있었다.
선왕이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마.’
눈물이 멈췄다. 온몸을 짓누르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양손을 펼쳐 그동안 쥐고 있던 모든 고뇌와 한계를 수많은 눈꽃에 흩날려 보냈다.
‘네 무명을 남기고 오거라.’
바람이 불어온다. 눈꽃이 시야를 가린다. 언덕이 흐릿해지고 밝은 빛이 찾아왔을 때 나는 검을 들고 있었다. 감고 있던 두 눈을 뜨자 어느덧 먹구름은 사라진 상태였다.
치지직, 칙!
드디어 보인다. 원망이었고 미련이었으며 또 나아갈 이유였던 마지막이 드디어 느껴졌다.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이마를 맞댄 검날에는 푸른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어머니 북방이시여.”
단단해진다. 뚜렷해진다. 내가 만든 오러는 검날을 타고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토록 꿈꾸던 글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어머니 북방을 부른 나는 조용히 물었다.
“제 무명은 무엇입니까?”
호수처럼 담담하던 운명이 요동친다. 모습을 감췄던 태양이 저 하늘 높이 떴다. 세상 모든 생명체가, 그를 굽어 살피는 어머니 북방이 내 무명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으아아아아- - - - !!!!]
경악한 불사왕이 달려든다. 나는 천천히 검을 쥐며 숨을 내뱉었다. 파멸적인 힘도, 종말 가하는 악신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작은 휘두름이었다.
서걱!
오러가 놈의 검을 잘랐다. 권능은 더 이상 재생하지 않았고 검은 안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벌거숭이가 된 불사왕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너는······.]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광휘만이 끝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암막으로 물드는 시야 사이로 마지막 광경을 기억에 담았다.
서걱!
기사왕 눈투성이가 불사왕의 목을 베었다. 그 검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두 눈을 감으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야만의 시대.
오직 명예를 아는 자를 기사라 불렀다.
‘검은 머리 기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