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7화
끼이이이이익 - - - -!
챙!
사념체 수십 마리가 오직 한 표적을 죽이기 위해 공격을 가해 온다. 하지만 그 표적이 된 눈투성이는 오직 검날 하나로 모든 궤적을 바꾸고 자신의 몸을 지켜냈다.
번쩍!
눈이 뜨이자 빛이 번쩍인다. 백색 오러와 눈부신 광휘 앞에 노출된 사념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형체인 놈들조차 신의 딸인 아이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너는 이미 모든 것을 배웠다.’
눈을 감은 눈투성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자신이 휘두르는 모든 움직임에 녹아내린 경지를 기억하라. 눈은 고요하게 내려 북방 전체를 뒤덮는 법이었다.
‘춤을 추자꾸나.’
검성의 형상이 보인다. 눈이 내리는 연무장 위 아름다운 검무를 추는 그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고 기꺼이 적용했을 때 눈투성이는 확신했다.
서걱!
끼이이이익!
검은 휘두르자 무언가가 베였다. 눈을 뜬 그곳에는 팔이 잘린 사념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드디어 눈투성이의 오러와 검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꾹.
서걱, 서걱!
더욱더 강하게 쥔다. 더욱더 가속한다. 눈투성이는 일렁이는 사념체 속으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날은 어김없이 영혼을 잘라 사념체를 소멸시켰다.
끼이이이이익!
위기를 느낀 놈들은 검은색 안개가 되어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쫓아갈 수 없다. 추격을 멈춘 눈투성이는 숨을 몰아쉬며 한참 진행 중인 전장 상황을 살펴보았다.
끄아아악! 챙! 서걱!
끼기기기긱, 퓽!
어디가 아군 진영인지, 적 진영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한참 절정으로 치달은 난전이 모든 것을 뒤섞어 놓은 탓이다.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가장 먼저 지휘부를 찾으려 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기사왕 폐하!”
하지만 그 순간 저 멀리 연합군이 기사단이 언데드 군단을 짓밟으며 달려왔다. 선두에는 온몸이 피로 물든 리처드 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눈투성이를 부르고 있었다.
“상황은 어떻죠?”
“버티고 있습니다!”
버티고 있다. 긍정적인 답변은 아니다. 지치지 않는 언데드 특성상 결국 우리가 연합군이 후퇴하는 미래가 그려졌다.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찢어지는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그러자 주변에서 언데드를 학살하던 하얀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안장 위에 올라타자 시야가 넓어진다. 움직임을 멈춘 눈투성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언데드 군단과 연합군 전력은 동수다. 하지만 불사왕과 권능이 만든 사념체가 있는 이상 피해는 계속해서 가중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고민은 짧고 판단은 빨랐다.
“리처드 왕! 공세 지휘를 부탁합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기회는 더 이상 없어요!”
불사왕은 연합군이 약해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자신이 사념체를 상대해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스승님이 올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모두가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다. 차마 기사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리처드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자리에 모였던 기사단은 다시 연합군과 합류하려 했다.
“놈들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순간 사념체를 묶어놓던 포병대원 중 하나가 목이 찢어지라 외쳤다. 한참 연합군을 학살하던 사념체 무리가 하나둘 검은색 안개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 - -!!!
드디어 놈들에게서 벗어난 연합군은 함성을 내질렀다. 포병대는 기다렸다는 듯 몰려오는 언데드 군단을 향해 포구를 돌렸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화선을 당겼다.
콰아아앙! 쾅!
“돌격하라!”
일제 사격으로 기세가 넘어왔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리처드는 기사단과 함께 돌격하며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렇게 연합군은 불리하던 전세를 뒤집는 듯했다.
찌릿!
하지만 눈투성이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본능이 지금 당장 물러나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전장을 바라보던 시선이 빠르게 수도 하늘로 향했다.
쿠르르르릉 - - - -!!
“아, 아아······!!”
세상이 격변한다. 하늘과 이어지던 회오리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불사왕이 분노 어린 고함을 내질렀다. 거대한 것이 온다. 응축되어 있던 기운이 전장을 향해 날아왔다.
“엎드려 - - -!!!!”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 - - -!!!
전장 한가운데로 유성이 연상시키는 어둠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 근방은 적, 아군 할 것 없이 모조리 폭사했고 그나마 운 좋은 이들은 사방으로 날아가 힘없이 떨어졌다.
다각, 다각!
털썩!
중심을 잡으려던 하얀 바람이 넘어졌다. 덩달아 낙마한 눈투성이는 시체와 오염 물질이 나뒹구는 진창에 떨어졌다. 투구 사이로 매캐한 연기와 구정물이 들어왔다.
푸르륵!
정신 차려! 서둘러 일어난 하얀 바람이 주인을 일으켜 세운다. 덕분에 빠르게 정신을 차린 눈투성이는 먹먹한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쓰고 있던 투구를 힘겹게 벗었다.
하아, 하아.
전장 한가운데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져있다. 수많은 연합군이 휘말린 것은 물론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는 오염 침식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아아아악! 엄마!
억, 억제제! 억제제를 가져와!
아비규환, 지옥도, 그 어떤 말도 부족한 광경이다. 온몸이 구정물로 더럽혀진 눈투성이는 한순간 넋이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어둠은 여전히 전장을 감싸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웅 - - - !!
먼지가 휘날린다. 시야가 확보된 크레이터 한가운데는 검은색 갑옷을 입은 불사왕이 리처드의 목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오러도, 힘도 모두 통하지 않았다.
끄르륵.
“리처드! 안 돼!”
리처드는 버둥거렸다. 하지만 목을 검게 물들인 오염 침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경악한 눈투성이는 불사왕을 향해 재빨리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챙! 콰아앙!
빛과 어둠이 격돌한다. 단순히 검이 닿는 것만으로 대지를 울리는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를 까드득 문 불사왕은 리처드를 허공을 던진 뒤 권능을 폭발시켰다.
콰아앙!
[벌레 같은 인간 놈드으으을!!!!]
먹구름이 휘몰아친다. 축축한 절망을 머금은 붉은 적운은 기꺼이 권능에 응했다. 감히 악신에게 도전하는가. 수많은 벼락이 기사왕을 향해 모두 쏟아져 내렸다.
콰르르르르릉- - - -!
기사왕 눈투성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광휘 오러를 최대로 전개한 뒤 무방비하게 놓인 리처드 앞을 가로막았다. 파멸의 힘을 담은 붉은 번개가 미친 듯이 쇄도했다.
쾅! 쾅! 쾅!
쾅! 콰아앙! 파지직!
더 이상 경지의 수준이 아니다. 신의 권능이 몰아치는 싸움은 필멸자가 항거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섰다. 하지만 한낱 인간인 눈투성이는 이 모든 것을 버텨내고 있었다.
번쩍!
검성의 예언은 적중했다. 신의 딸로서 권능을 행사한 눈투성이는 빛나는 오러를 앞으로 겨누었다. 불사왕은 그 광경을 믿기 힘들다는 듯 한쪽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어, 어째서······!]
어머니 북방이 남긴 안배는 일찍이 알고 있던 불사왕은 끝을 보기 위해 힘을 드러냈다. 하지만 설마 겨우 대리를 행사하는 인간이 권능을 정면으로 막을 줄은 몰랐다.
처음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것은 악신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도망칠 지옥문이 사라진 마당에 놈들의 마지막 희망인 기사왕조차 쉽게 죽일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아- - - !!!!]
콰르르르르릉!
쾅! 쾅! 쾅!
부정과 분노가 휘몰아친다. 결국, 이성을 잃은 불사왕은 붉은 벼락을 던지고 또 던졌다. 검은색 안개와 먼지로 휩싸인 전장은 당연히 기사왕이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꾸욱.
하지만 눈투성이는 상황을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불사왕의 권능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스승님이 성공했다.’
검성이 지옥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 놈은 물길이 끊긴 웅덩이처럼 서서히 증발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눈투성이는 침착하게 상황과 행동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쾅! 치지직!
버터야 한다. 스승님은 분명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눈투성이는 금이 가기 시작한 오러를 재빨리 보안하고 자세를 잡았다. 무거운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스르릉!
번개를 내리치던 불사왕이 기어코 검을 뽑았다. 하늘로 높이 뻗은 검은색 오러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쇄도한다. 이를 악문 눈투성이는 힘겹게 악의 권능을 막아냈다.
후우우우웅! 챙!
쿨럭!
하지만 아무리 힘이 깃들었다고 한들 결국 신의 대리다. 힘겹게 검을 막은 눈투성이는 검은색 피를 토해내며 밀려났다. 빛을 뿜던 광휘는 어느덧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발악은 여기까지다.]
여유가 없는 것은 불사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적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던 오만함이 사라졌을 때 놈의 머리에는 오직 기사왕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콰아앙-!
쨍그랑!
어둠이 짙은 날, 빛은 떠오르지 않는다. 불사왕이 권능이 휩싸인 검을 휘두르자, 막아선 광휘가 결국 깨져 버렸다. 놈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붉은 벼락은 내던졌다.
콰르르릉! 콰르릉!
쾅! 치지지직!
“- - - - - - - -!!”
순식간이었다. 무언가를 해 볼 겨를도 없이 붉은 번개가 온몸을 강타했다. 백색 갑옷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눈투성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트렸다.
끄르륵.
숨을 쉴 수가 없다. 내부가 상했는지 입 밖으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한쪽 무릎을 꿇고 버티던 기사왕 눈투성이는 결국, 힘이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삐이이이이이이 - - - -!!
몸이 망가졌다. 시야가 흐릿하다. 하지만 이명 밖에 들려오지 않는 어두운 세상에서 눈투성이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왕의 검······. 떨어진 검이 저기 있었다.
‘넌 내 자랑이다.’
움직여야 한다. 다시 싸워야 한다. 힘겹게 몸을 돌린 눈투성이는 시궁창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스승님이 선왕에게 받아 주었던 왕의 검을 다시 쥐려고 했다.
쾅!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불사왕은 기어가는 눈투성이는 발로 걷어찼다. 단순 화풀이 같은 그 행동에 몸은 저 뒤로 날아갔고 마지막으로 남은 힘마저 전부 소진되었다.
쿨럭!
[네놈들 신을 불러와라.]
불사왕은 이를 갈았다. 현 세상으로 내려오지도 못하는 신을 신이라고 믿다니 어머니 북방이 남긴 안배조차 자신을 막지 못했다. 인간은 왜 이토록 어리석단 말인가.
콰직! 쾅!
걷어차고 부신다. 온몸이 피로 물든 눈투성이는 시궁창과 함께 더럽혀졌다. 그리고 더 이상 광휘가 빛을 발하지 못할 때 불사왕은 무력한 기사왕의 가슴팍을 밟았다.
스릉!
[끝이다.]
이제 끝낼 차례다. 지겨운 전쟁을 끝내고 남은 생명체를 모조리 죽일 것이다. 불사왕은 검은색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눈투성이 심장으로 겨눠 찍어내려 했다.
“······.”
그 순간 눈투성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한쪽밖에 뜨지 못한 깨끗한 눈동자는 자신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사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읊조림에 귀를 기울였다.
“별·········.”
먹구름이 자욱하다. 이런 하늘에 별이 뜰 리가 없다. 기사왕은 지금 헛것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불사왕은 자신도 모르게 검 끝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뭐?]
전장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마치 무언가를 내포한 하늘이 고요해지는 광경과 같았다. 순간 두 눈을 크게 뜬 불사왕은 수도 방향을 향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네게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천년을 사는 엘프도, 강철을 지배한 오크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다.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불사왕은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권능을 일으켰다. 그리고 달려오는 무언가를 향해 붉은 벼락을 쏘아냈다.
‘왕께서는 얻으셨습니까?’
‘아니,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았다. 하지만 보았음에도 얻지 못했느니라.’
콰르르르릉
치직!
하지만 그 형체는 너무나도 가볍게 벼락을 피해냈다. 300m, 200m,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목이 잘린다. 불사왕은 결국 양쪽 손을 앞으로 뻗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훗날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이끄는 소중한 등불이 될 테니까.’
서걱!
검이 그림처럼 움직인다. 불사왕이 쏘아낸 붉은 벼락은 반으로 갈라졌다. 귀기가 어린 눈동자, 흩날리는 검은 머리. 기사왕의 종자 부러지는 검이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쾅!
신념이 드디어 그 끝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