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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76화 (176/181)

< 176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6화

“저기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뿔테 안경을 쓴 여성이 갈색 종이 가방을 건네고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가 무심히 말했다.

“떨어트리셨어요.”

“아······.”

내가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떨결에 종이 가방을 받아들자 뿔테 여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어폰을 다시 착용했다. 주변은 사람이 가득 찬 만실 지하철이었다.

덜컹, 덜컹.

[이번 역은 합정, 합정역입니다. 응암이나 봉화산 방면으로 가실 고객님은······.]

사람들이 타고 사람들이 내린다. 열차는 늘 그렇듯 정해진 길을 따라 달려갔다. 모든 게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고 아마 다가오는 내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텁텁한 넥타이, 은은한 땀 냄새, 꾹 잡은 손잡이가 오늘따라 어색하다. 나는 몇 번이고 옷깃과 목을 가다듬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리감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무언가를 놓고 온 기분이다. 분명 넋을 빼놓을 만큼 중요한 것인데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나는 피곤함 때문이지 먹먹한 눈을 비비며 열리는 열차 문을 지나쳤다.

타박, 타박, 타박.

밤이 찾아온 서울은 밝았다. 끝나지 않는 야경과 불이 들어온 간판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이 수많은 빛과 수많은 사람 한가운데 몸을 맡길 수 있는 내 집이 있었다.

덜컹, 끼익.

힘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거실을 밝힌다. 늘 그렇듯, 마치 버릇처럼, 몸이 알아서 움직여 불이 켜진 욕실로 들어선다.

조르륵.

겨우 손잡이만 돌렸을 뿐인데 알아서 따뜻한 물이 나온다. 물을 길어올 필요도, 일일이 장작을 집어넣을 필요도 없다.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왜 그래?’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오늘도 어제처럼 일하고 돌아와 쳇바퀴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불안한 듯 떨고 있는 심장은 왜 그러냐는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왜? 누구에게로? 분명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다. 이토록 사무치는 슬픔은 평생 느껴 본 적이 없는 격한 감정이었다.

끼익!

결국, 참을 수 없어 화장실을 나선다. 그리고 작은 냉장고를 열어 내용물 중 유일한 맥주캔을 급히 땄다. 김이 빠지는 허무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흘러넘친다.

칙!

“- - - - - - -.”

캔이 차갑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차가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드넓은 하늘과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람. 빌딩 숲이 아닌 나의 고향은 저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스승님!’

눈이 내리면 세상은 하얗게 변한다. 호오, 호오 내뱉는 하얀 입김이 청아한 하늘과 맞닿을 때 설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 곳곳에선 빵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소녀는 빵 냄새를 좋아했다. 난로 앞에 앉아 코를 킁킁거리고 있으면 나는 갓 구운 빵을 가져와 반을 나눠 먹었다. 오직 밀을 빻아 만든 빵 맛은 ‘따뜻함’이었다.

‘히히.’

눈투성이는 웃으면 나도 웃었다. 매번 찾아오는 겨울이 뭐가 좋다고 그리 웃었다. 지붕 아래 걸린 고드름도,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작은 연기도 전부 좋았던 모양이다.

뚝, 뚝.

시야가 먹먹해진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볼과 턱을 타고 흐른다. 그래,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눈이 내리는 북방과 때가 되면 찾아오는 순백색 겨울을 말이다.

나는 이방인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북방을 사랑했고 형제들을 위해 살았다. 그것이 비록 황혼을 지나 사라진다고 해도 이 뜻만큼은 돌아오는 계절처럼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

드디어 기억해냈다. 어머니 북방을 조용히 부르자 창밖 풍경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눈부신 야경과 빌딩도, 빠르게 지나치는 수많은 자동차도 전부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구나.”

야경이 가라앉은 거실에는 어머니 북방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마치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봐 왔다는 듯 투명한 창문 위로 손을 올렸다.

“전부 끝난 겁니까?”

“그래, 끝났단다.”

주름도 흉터도 전부 사라졌다. 억겁의 시간을 거슬러 온 나는 북방이 아닌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느새 다가온 어머니 북방이 볼을 조심히 어루만져주었다.

“약속이 늦어서 미안하다.”

“······어머니?”

마지막으로 휘두른 검이 기억난다. 분명 나는 오염 응축과 아귀를 벤 다음 커다란 폭발과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아직도 이리 생생한데 나는 왜 다른 세상에 있는 걸까.

“쉿.”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어머니 북방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신의 안배는 여기까지였으니 더 이상 묻지 마라. 어머니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제 내려놓으렴.”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을 감겼다. 마지막 책무가 드디어 끝이 났다고 생각하자 아픔도,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모든 힘이 풀려 버린 나는 손길에 이끌렸다.

“밤이 깊었구나.”

도착한 그곳에는 문이 있었다. 침대가 있는 안방은 마치 다른 통로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하나하나 가져갔다.

“내일이면 모두 잊을 거야.”

졸음이 몰려온다.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 몸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발자국. 내가 주저하자 어머니 북방이 있는 힘껏 등을 밀어주었다.

탁.

이제 문 앞이다. 이 손잡이만 돌리면 드디어 쉴 수 있다. 죽음보다 나은, 또 다른 인생을 위해서 말이다. 나는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여 굳게 닫혀 있던 안방 문을 열었다.

덜컹.

걸어갈수록 기억이 지워진다. 행복했던 순간도, 슬펐던 순간도 재처럼 흩날려간다. 아아, 눈물이 흐른다. 이상하게도 기쁨이 아닌 지독한 상실이 내 심장을 찔렀다.

‘스승님!’

‘검성!’

‘부러지는 검!’

잊을 수 없다. 놓을 수 없다. 행복한 꿈이었는데 어찌 혼자 가란 말인가. 나는 흩어지려는 파편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앞으로 뻗은 손은 어느새 문을 닫고 있었다.

탁.

들어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자 분명 웃고 있던 어머니 북방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배하지 못하셨구나. 어머니는 아직 아들인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너를 살리고자 했다.”

알고 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포기하고 한 인간을 선택하는 일은 신이 하기에는 너무나 큰 원죄였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더냐?”

어머니 북방은 두 눈을 갈았다. 모든 여정을 함께 지켜보았던 그녀는 내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이 흐른다. 신이 흘리는 물방울은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마음 한쪽을 괴롭히던 이물감도 전부 사라졌다. 그래,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구나.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꼭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고행으로 산을 올라야 한다면 형제와 함께 꾸었던 곳이기를 원했다. 어머니 북방은 결국 다른 문을 가리켰다.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는구나. 추위에 벌벌 떨던 너는 내게 그리 물었지.”

저 멀리 문이 보인다. 안방과는 달리 반쯤 열려있는 문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려 북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왜 하필 저입니까?”

문을 힘껏 잡았다. 그 순간 젊었던 손에는 흉터와 굳은살이 생겼고 얼굴에는 거짓말처럼 주름이 돌아왔다. 검은색 머리는 어느덧 이겨낸 세월과 함께 하얗게 새어 버렸다.

“이제야 말해 줄 수 있겠어.”

나는 문을 열었다.

“저 하늘 수많은 별 중.”

나는 문을 닫았다.

“네가 가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단다.”

*       *       *

‘일어나라, 아들아.’

두 눈을 떴다. 폭발에 휘말렸던 나는 깊은 심연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살아남았구나.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온몸이 부상과 오염으로 물든 듯했다.

꾹.

하지만 그 어떠한 고통도 감히 정신을 흐리지 못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나는 웅덩이 속에서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난 방향으로 헤엄쳤다.

“- - - - - - - -!!”

웅덩이와 영혼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불사왕이 내뿜는 분노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놈도 수도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서둘러야 한다.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저어 웅덩이 중앙을 향해 헤엄쳤다. 그러자 저 멀리 둥둥 떠다니는 오염 잔재와 함께 지옥문이 보였다.

첨벙!

다행히 문을 파괴하던 아귀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문을 닫고 지옥문을 없애는 것뿐이다. 빠르게 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손을 뻗어 틀을 붙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 - - - - -!!!

문 너머 지옥이 보인다. 현 세상을 탐하려는 악한 존재가 통로가 완전히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실어 문을 밀었다.

치이이익!

뜨겁다. 지옥 불이 내 살점을 불태운다. 하지만 그럴수록 힘을 더 가해졌고 불사왕이 열었던 문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틈이 완전히 좁아졌다.

쿵!

지옥문이 닫혔다. 요동치던 웅덩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영혼들 또한 움직임을 멈춘다. 나는 여전히 오른손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검을 지옥문을 향해 겨누었다.

[안돼- - -!!!]

그 순간 저 멀리 연합군을 상대하고 있던 불사왕이 다급히 의식을 보내왔다. 설마 내가 귀환을 포기할 줄 몰랐던 놈이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사념체를 보낸 것이다.

[으아아아아!!! 검성! 끝까지! 끝까지 방해만 하는구나!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이다. 오직 영원한 삶만이 불멸이라 생각하던 놈은 끝내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 고리를 끊어 버리고자 놈의 사념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끼이익!

서걱, 콰직!

사념체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하나 같이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숫자 또한 빠르게 줄어들었다. 모든 사념체를 베어낸 나는 마지막으로 검을 뻗었다.

치지직!

잡히지 않았던 경지가 느껴진다. 내가 드디어 발현한 검의 권능이 모든 오염 침식을 밀어내었다. 이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사념이 끊긴 불사왕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 - - - - -!!!]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휘두름은 많은 깨달음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원점으로. 뻗어나간 검날이 지옥문을 갈랐다.

서걱!

반으로 잘렸다. 그렇게 대륙과 지옥을 이어주는 문을 완전히 닫힌 채 소멸해버렸다. 그 순간 놈에게 억압되어있던 수많은 영혼이 웅덩이 밖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불사왕이 도망칠 곳은 없다. 남을 것은 예언된 신의 딸과 함께 놈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뿐이다. 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올라 웅덩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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