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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75화 (175/181)

< 175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5화

내게 있어 죽음은 그리 생소한 최후가 아니었다. 평생을 극복해야 했고 또 평생을 지켜봐야 했던 만큼 겸허하고 혹은 비장하게 마지막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운가?’

하지만 정작 눈앞에 다가온 죽음은 무척이나 현실적이었다. 이상도, 신념도, 윤회도 아닌 칙칙한 심연이 내게 묻는다. 두려운가? 이것이 끝일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나는 웅덩이 속으로 손은 넣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발, 다리, 하반신, 마지막으로는 상반신이 물에 잠겼다. 그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류가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다. 지금은 쥐고 있는 것이 검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되었다. 이를 악문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머리를 담갔다. 쉬어지지 않는 숨과 함께 세상이 어두워졌다.

첨벙!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조금만 늦어도 불사왕 놈이 눈치를 채거나 몸이 오염되어 죽고 말 것이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저 깊은 심연 아래로 헤엄쳐 들어갔다.

꾸르륵.

물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물은 아니다. 안개를 헤엄치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허공을 떠도는 것 같기도 했다. 유일한 방향성은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뿐이었다.

“- - - - - - - -.”

조금씩 내려간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나마 남아 있는 빛도 완전히 사라졌다. 짙은 어둠, 순도 높은 밀도. 웅덩이 내부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또 다른 공간이었다.

아아아아 - - - - -!!!

누군가가 절규하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불사왕이 사로잡은 수많은 영혼이 심연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억겁과 같은 시간 속에 끊임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부러지는 검! 나를 살려 다오!’

‘단장님! 단장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 아닌 그동안 지켜봤던 형제들의 죽음이었다. 그들은 살려 달라고, 이 고통에서 꺼내 달라고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너는 왜 살아 있지?’

동시에 나를 향한 증오가 느껴졌다. 죽음을 대가로 가져온 승리는 무슨 맛이더냐. 아무리 북방을 위한다고 외쳐도 결국 죽은 것은 자신이고 산 자는 이방인뿐이었다.

‘죽어!’

‘죽어!’

붉게 물든 증오가 목을 조른다. 숨이 막혀오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사과할 순간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깊은 심연을 헤엄친 나는 어느새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살아남는 순간이 고통이었다. 내 형제, 내 가족이 죽을 때마다 심장 한 점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뎌지는 고통 위로 날카로운 칼이 꽂히는 것을 느꼈다.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가야 한다. 후회도, 미련도, 슬픔도, 모두 남기고 가야 한다. 나는 손을 뻗어 증오를 파헤치고 주마등을 헤엄쳤다. 절규와 비명은 어느덧 저 멀리 사라져 갔다.

후욱.

이제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되지 않는다. 흐릿한 시야, 감각이 사라진 팔다리,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혹은 가라앉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꼬로록.

숨이 다했다. 가라앉은 의식은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갔다. 이제 마지막이다. 힘을 쥐어짠 나는 마치 막처럼 덮여있는 공간을 뚫고 들어가 두 눈을 힘겹게 떴다.

우우우우우우웅 - - - -!!!

보인다. 불사왕이 가지고 있는 더러운 욕심과 야욕이 말이다. 그것은 한 가지 형태를 이뤄 이 심연을 구성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봤다.

‘불사.’

문이 보인다. 지옥문은 환하게 열린 채 놈의 욕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은 권능, 끝을 모르는 악. 모든 참상은 저 지옥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츠즈즈즉.

그리고 욕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옥문 자체를 갉아 먹고 있었다. 자신을 옭아맬 수 있는 유일한 목줄을 자르고 이 대륙을 진정한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킥킥.

지옥문을 갉아먹던 오염 덩어리가 킥킥 웃는다. 자신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오만함이 웃음에 가득했다. 입밖에 없는 아귀(餓鬼) 나를 등진 채 한 점 한 점 욕망을 뜯었다.

가거라, 필멸자야. 이곳은 네가 넘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죽음은 오직 죽음으로 경고했다. 신념도, 이상도, 가치도 차가운 현실 앞에선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놈이 모르는 것이 있다.

나는 이미 죽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다.

꾸욱.

아득한 정신을 붙잡았다.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항상 그 자리를 지키던 검이 심장 박동과 공명하고 있었다. 오직 이 날붙이만이 내가 품은 용기를 대변해줬다.

우우우웅 - - - -!!!

단 한 번도 망설인 적 없다. 언제나 관철했고, 이행했고, 결심했다. 부러지는 검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품었을 때 나는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검을 뻗었다.

끽?

아귀가 뒤돌아본다. 검은 눈동자가 내 모습을 투영한다. 검성은 지금 이 순간 비겁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거면 됐다. 휘두른 검은 그 목을 노려 정확히 베었다.

서걱!

그렇게 의식이 사라졌다.

*       *       *

막강한 불사왕과 언데드 군단 앞에 연합군은 철저히 약세였다. 하지만 기사왕의 등장으로 상황이 역전되더니 어느덧 중앙 대륙을 넘어 대수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수도에서 보자.’

망설임은 없다. 검성이 살아있다는 소식과 함께 서신 내용이 전해지자 대륙 연합군 전원은 기사왕과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남은 것은 서부를 향한 마지막 진격뿐이었다.

뿌우우우우우우 - - - -!!

닳고 닳은 뿔 나팔이 울렸다. 대열을 정비한 연합군은 오염된 대수림을 향해 진격해 불을 질러 길을 텄다. 기세가 오른 연합군은 서서히 수도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도리어 조급해진 것은 불사왕이었다. 언데드와 사념체도 무용지물이고 회심의 카드였던 리치 여왕마저 사멸해 버려 연합군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전부 떨어진 것이다.

불사왕은 어쩔 수 없이 같은 총력전으로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퍼트렸던 권능을 거둬들인 불사왕은 남은 언데드와 사념체 전력을 수도 앞으로 집결했다.

끼이이이익!

끽! 끼긱!

총력이란 모든 힘을 의미한다. 수도 앞과 하늘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데드 군단과 검은 사념체로 가득했다. 검은 먹구름은 놈들이 진정한 죽음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 - - -!!

척, 척, 척, 척!

하지만 대륙 연합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전력을 수도 앞으로 집결한 그들은 드넓은 평원 앞에 늘어섰다. 양측 군대는 전장을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다각! 다각! 다각!

각 부대를 정지시킨 지휘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선두로 달려왔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기사왕 눈투성이가 저 멀리 수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북방군 전원이 모였습니다!”

“동부군도 명령을 기다립니다!”

“저희 엘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크 부대도 준비했다!”

수많은 깃발이 모여들었다. 북방인, 동부인, 엘프, 오크 종족 모두가 기사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눈투성이가 북방 깃발을 쥐며 대답했다.

“신호를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엄청난 숫자인 만큼 각 지휘관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이를 상기한 그들은 모여있던 깃발과 함께 각 부대로 돌아갔다. 눈투성이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쿠르르르릉 - - - -!!!!

그 순간 전운이 감돌던 먹구름 사이로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동시에 미친 듯이 불어오던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언데드 군단 사이로 한 줄기 회오리를 만들어 내었다.

치지직, 칙!

피부가 저릿하다. 다리가 떨려온다.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전장으로 강림한 존재는 다름이 아닌 죽지 않는 자 불사왕이었다.

푸르륵! 푸륵!

히히히힝!

가장 먼저 예민한 동물이 반응했다. 불사왕이 겨우 존재감만을 드러냈을 뿐인데 본능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깜짝 놀란 기병들은 서둘러 안장과 고삐를 쥐었다.

콰르르르르릉 - - - -!!

또 한 번 벼락이 내리쳤다. 이번에는 불사왕의 존재감이 일렁이는 먹구름과 섞여 거대한 형체를 만들었다. 놈은 동요하고 있는 연합군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떨고 있구나.]

[두려움이 두려운 것이지.]

악마가 속삭인다. 하지만 그 악마는 밖에 있는지 속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귀를 기울일수록 속삭임은 메아리가 되었다. 이제야 잊고 있던 공포가 피부로 느껴졌다.

[너희들의 신은 어디 있지?]

두려움은 외면이 되고 외면은 정당화가 될 것이다. 불사왕은 나타나지 않는 어머니 북방을 두둔하며 불신을 심었다.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은······.

[도망쳐라.]

“아아······!”

[내 마지막 자비다.]

그것만이 조금이라도 더 살 방법이다. 악신이 내뱉은 속삭임 앞에 연합군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들은 용기라는 불을 꺼트린 채 서서히 뒤로 밀려나기 직전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하지만 그 순간 하얀 바람을 몰고 나온 기사왕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마치 두꺼운 커튼을 치기라도 한 듯 불사왕의 속삭임이 거짓말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한 인간이 있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는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대열을 가로질렀다.

“견디기 힘든 온갖 조롱과 핍박을 겪고 끝내는 무거운 숙명까지 짊어 지었지.”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모두가 그 뜻을 모르니 고독했다. 하루 수백 번씩 쓰러져 포기하고 싶었겠지.”

눈투성이는 자리에 멈춰 섰다.

“외면해도 됐을 거다. 비겁하게 도망쳐도 그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슴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하지만 이방인은 그러지 않았다.”

남자는 꿋꿋했다. 기사왕의 후계라고 생각한 소녀를 보호하고 가르치며 온갖 역경을 이겨내었다. 짙은 흉터, 거친 주름, 딱딱한 굳은살, 이 모든 게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 인간이 시작했고 한 인간이 이룩했다. 그 숭고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인간들 눈앞에는 환한 등불이 보였다. 검성(星)은 북방을 이끄는 유일한 별이었다.

“그가 또 홀로 있구나.”

스르릉!

눈투성이는 왕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 손잡이에 이마를 맞대며 암흑을 몰아낼 광휘를 내뿜었다.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던 시대는 그 빛 앞에 힘없이 물러났다.

“이젠 우리 차례다.”

푸르륵!

기분 좋게 투레질한 하얀 바람이 앞발을 들어 올린다. 기사왕 눈투성이는 힘차게 검을 들어 올렸고 이내 앞으로 나아갔다. 전장에는 마지막 뿔 나팔이 길게 울려 퍼진다.

뿌우우우우우우우 - - - - -!!!

와아아아아아아!!

연합군이 검은 머리 기사왕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갔다. 전진은 서서히 진격이 되었고 그 기세는 마치 거대한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기사왕 눈투성이가 크게 외쳤다.

“아버지 검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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