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4화
“물러나지 마라!”
언데드가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들이민다. 하지만 방패와 창을 든 병사는 용감하게 달려들어 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죽음도, 두려움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발사!”
이를 악문 궁수가 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수천 개 불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검은 파도처럼 몰려오던 놈들은 비명과 함께 사멸했다.
두두두두두두두 - - - -!!
연합군 방진이 버티는 사이 우회한 기병대가 평원을 가로지른다. 마치 하얀 바람처럼 달려든 그들은 철퇴를 높게 들어 올려 역겨운 언데드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콰직!
용기는 맹렬했고 정의는 고귀하다. 연합군이 진군하는 길에는 오직 놈들이 사라지면 남긴 재와 더러운 시궁창뿐이었다. 이는 단 한 번으로 멈추지 않는 엄청난 기세였다.
뿌우우우우우우 - - - -!!
“적을 섬멸하라!”
돌격하고 또 돌격한다. 방어선을 제 발로 빠져나온 연합군은 첫날은 적의 선봉, 둘째 날은 적의 본진, 그리고 셋째 날은 남아있는 적을 쫓아가며 언데드를 밀어내었다.
콰앙! 쾅!
구우우우웅, 쿵!
놈들이 자랑하는 거대 언데드는 포병대가 발사한 포탄을 맞고 쓰러진다. 하늘을 나는 부유 언데드가 유격대가 발사한 오러 화살을 피해 후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막아낼 수 없다. 항상 산 자를 죽이기만 했던 언데드 군단은 처음으로 패색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불쾌함은 불사왕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였다.
콰르르릉!
후우우우우우우 - - - -!!
어쩔 수 없다. 위기감을 느낀 불사왕은 수도를 지키던 사념체를 다시 불러냈다. 형체가 없는 악몽이자 수많은 연합군을 학살한 존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끼이이이이익!
벌레 같은 인간 놈들! 불사왕의 분노를 읽은 수십 마리 사념체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지겨운 전쟁을 이제 끝내겠다는 듯 연합군 본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념체다!”
사념체를 막지 못하면 전쟁의 판도가 바뀐다. 한 백부장이 경악하며 외치자 병사들은 황급히 불과 기름을 가지고 왔다. 방패를 쥔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륵!
하지만 그 각오가 쓰이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찍이 사념체를 발견한 기사왕과 북방 기사단이 바람처럼 달려왔기 때문이다. 눈투성이는 왕의 검을 뽑았다.
번쩍!
오러를 뿜었다. 동시에 눈을 뜰 수 없는 밝은 광휘가 언데드 군단을 가로막았다. 사념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진군을 멈췄고 이내 검은색 형체가 흐릿해졌다.
서걱!
눈투성이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형체가 없었던 사념체는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소멸한 놈이 내뿜은 검은 안개 사이를 북방 기사단이 뚫고 나왔다.
두두두두두두두 - - - -!!
잠에서 깬 딸이 뜻을 대리하니 어머니 북방은 기꺼이 권능을 주셨다. 그 빛은 모든 자를 이끄는 등불이었으며 항거할 수 없는 죽음을 몰아내고자 한 신의 뜻이었다.
“어머니 북방을 위하여!”
이제 침묵하는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 북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있었다. 전장 아래 뜬 광휘는 세상을 밝혔고 연합군은 거대한 함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 - - - -!!!!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권능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동요한 불사왕은 재빨리 사념체를 불러들였다. 악몽 같았던 검은색 연기는 오늘따라 무척이나 무력해 보였다.
후우우우웅!
이미 연합군은 언데드 군단을 포위한 지 오래다. 사념체가 사라진 이상 놈들은 포병대가 발사하는 포화에 노출되어 있었다. 리처드가 검을 내리자 포구가 불을 뿜었다.
쾅! 콰앙!
언데드가 쓸려나간다. 기세가 오른 연합군은 기사왕을 따라 돌격했고 마치 썩은 고기를 치우듯 무기를 휘둘렀다. 그렇게 연합군은 대수림 바로 앞까지 진군했다.
“폐하!”
“고마워요.”
얼마나 많은 사념체와 언데드를 죽였는지 온몸이 썩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보다 못한 기사 중 하나가 깨끗한 수건과 물을 가져왔고 눈투성이는 이를 얼굴을 닦았다.
슥슥.
물과 수건으로 피를 닦아내자 흥분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다. 머리를 차갑게 식힌 눈투성이는 안장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전장은 어느새 정리되어가는 분위기였다.
“부상병을 서둘러 후송하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오염 억제제와 세계수의 가호를 받은 붕대가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이제는 아무리 침식이 진행된 부상자라고 할지라도 적당한 치료만 받으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수림.’
저 멀리 검은색으로 물든 거대한 숲이 보인다. 마치 심연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저 대수림만 지나면 불사왕이 본거지로 삼은 서부와 수도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스승님.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낸 눈투성이는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검성을 떠올렸다. 그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또 움직여야 할 때였다.
다각, 다각, 다각!
“폐하!”
그 순간 정찰을 나갔던 기병 중 하나가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 뒤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북방인 여성 한 명이 타고 있었는데 견장을 보아 백부장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죠? 갑옷과 무기는······.”
“포로로 잡혀 있던 자입니다! 포로수용소는 이미 점거되었고 모두 합류 중입니다!”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포로가 모여있는 수용소를 점거했다. 눈투성이는 그 용기에 감탄하며 공적을 치하하려 했다. 하지만 백부장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사슴뿔이라고 하옵니다, 폐하! 급히 전달할 서신이 있어 달려왔습니다!”
서신? 무슨 서신이길래 이리 급히 달려왔을까. 공적을 치하하려던 눈투성이는 얼떨결에 서신을 받았다. 봉투 그 어디에도 자신이 아는 직인은 찍혀 있지 않았다.
“검성 각하가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
스승이 보낸 서신이란 말에 눈투성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다급히 봉투를 뜯고 종이를 꺼내자 익숙한 필체로 쓰인 서신이 보였다. 정말 검성이 보낸 것이 맞았다.
‘수도에서 만나자.’
내용은 간결하고 정확했다. 지옥문, 불사왕, 경로, 이 모든 것이 적혀 있어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알려주었다. 희미했던 실마리가 서신 한 통으로 뒤바뀌었다.
“이 서신을 지휘부로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눈투성이는 즉각 서신을 넘겼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슴뿔 앞으로 다가가 양쪽 어깨를 꾹 잡았다. 그녀는 얼굴이 수척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정말 큰 공을 세워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폐하!”
“스승님은 어떠시던가요.”
“강인하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게 너무 죄송해서·········.”
그래, 역시 스승님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물 한 모금조차 나눌 줄 알기에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모이게 했다. 눈투성이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눈을 감았다.
* * *
수도는 오염되고 황폐해져 길이 어디고 건물이 어디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첨탑 위에 맴돌고 있는 먹구름 덕분에 길을 잃어버리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사박, 사박, 사박.
역시 불사왕의 본거지는 본거지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벌레 같은 오염 침식은 내 몸을 노리고 있었다. 물론 역설적으로 존재감을 지우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
달칵, 달칵.
그어어어어어······.
조심스럽게 걷는다. 중간중간 보이는 언데드는 피하고 만약 순찰 중이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인내를 가져야 한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첨탑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불사왕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지옥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텐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장애물을 훌쩍 넘었다.
“으아아아아아 - - - -!!”
“싫어! 싫어어어어!”
하지만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인간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고 이내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재빨리 기어갔다.
이미 상당수 포로가 수도로 후송되었을 것이다. 소재를 알수없었던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언제든 검을 뽑을수있도록 허리춤에 오른손을 올려두었다.
끼이이익. 끽.
“살, 살려줘! 살려줘!”
보인다. 첨탑과 이어지는 대로 옆에는 이상한 검은 뿌리들로 만들어진 감옥이 포로를 가둬두고 있었다. 그리고 해골 사제는 포로를 수확하듯 어딘가로 끌고 갔다.
젠장, 포로 숫자가 너무 많다. 설상가상 포로를 끌고 간 해골 사제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결국 감옥 근처를 빠져나와 해골 사제를 따라갔다.
사박, 사박, 사박.
놈들이 처형이나 협상을 위해 포로를 잡을 리가 없다. 아마 사념체와 리치 여왕 때처럼 새로운 언데드를 만드는 수단으로 쓰거나 무언가를 이끌기 위한 제물이 분명했다.
만약 최악의 경우 불사왕 놈이 무고한 영혼을 이용해 권능을 강화하려 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뒤를 밟았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고 도착한 그곳은 먹구름이 회오리치고 있는 첨탑과 그리 멀지 않은 웅덩이였다. 아니 웅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그곳은 검은색 심연이 일렁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아아악!”
강한 기운이다. 오염과 침식이 응축되어 휘몰아치고 있다. 그 기운을 마주한 포로들은 아예 정신을 놓은 채 게거품을 물었다. 물론 해골 사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스릉!
서걱!
놈들이 뼈로 만든 단검을 꺼낸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포로 목을 그어 피를 웅덩이 아래로 흘려보냈다. 꺼억, 꺽 하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까드득.
몸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움찔거린다. 하지만 끝까지 인내한 나는 주먹을 꾹 쥐고 놈들을 노려보았다. 열 명이 넘는 포로가 순식간에 목이 베여 피를 흘렸다.
달칵, 달칵.
달칵.
용건이 끝났다. 달칵거리며 의사를 나눈 해골 사제들은 마치 가축처럼 널브러진 시체를 웅덩이 아래로 밀어 넣었다. 풍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들이 돌아가 버린다.
훅!
주변이 조용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웅덩이로 달려갔다. 당연히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고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심연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와 시체를 바치고 있다. 영혼을 제물로 무언가를 꾀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웅덩이 바로 앞으로 다가가 저 깊은 심연 속 존재를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두쿵, 두쿵.
세계수 기운이 손끝을 타고 내려간다. 세상은 흑백으로 물들었고 사방에 넘실거리는 잔류와 사념이 느껴졌다. 더러운 악의가 웅덩이 아래 바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두쿵, 두쿵, 두쿵.
내 심장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가 박동하고 있다. 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는 그곳에는 오염과 침식이 덩어리처럼 뭉쳐있었다. 그 용도는 다름이 아닌 파괴였다.
‘지옥문.’
나는 불사왕과 대륙을 이어주는 지옥문을 ‘닫은’ 뒤 영원히 소멸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은 역으로 문을 ‘연’ 상태로 파괴하고 있었다. 언제든 오갈 수 있도록, 마치 닫히지 않는 지옥 통로를 만들 듯 말이다.
쿠르르르르릉 - - - - !!!
그 순간 붉은 번개가 내리치며 폭풍우가 몰려왔다. 거대한 형태를 만든 먹구름은 대수림 너머 동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곳은 눈투성이와 연합군이 있는 방향이었다.
참방.
나는 웅덩이 속에 손을 넣었다.
이제는 정말 선택할 시간이었다.
작가의말
뭐 사실 문이라는게 열고 없애나 닫고 없애나 똑같지만... 지옥문은 차원을 이동하는 통로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날씨가 너무 덥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