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2화
“아······.”
검은 화살이 홀로 복도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재상 기억하는 새는 집무실로 들어가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따뜻한 차 한 잔을 가지고 나왔다.
“뭐라도 드셔야죠.”
북방으로 돌아온 이후 식사는커녕 물 한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검은 화살이다. 아무리 오려 사용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극단적인 탈진은 건강을 해치고 만다.
그래, 이해한다. 자신도 한순간 정신을 잃을 만큼 큰 충격이었는데 함께했던 당사자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재상은 짙은 한숨과 함께 검은 화살을 꼭 안아주었다.
“엘프들이 선박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내놓으라 하는 장인이 전부 달려들었으니 이른 시일 내로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어선 정어리를 대신할 선박을 만드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뛰어난 엘프 인력이 동원되었으니 곧 서부로 돌아갈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실없는 위로보다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할 때다. 마치 실 끊긴 인형 같던 검은 화살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어느덧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더 필요하면 말해요.”
생각이 바뀌어서 다행이다. 검은 화살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준 재상은 그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요한 왕실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매번 이렇게 걱정시키다가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타나고는 했죠. 아마 이번에도 무사히 북방으로 돌아올 거에요.”
“나, 나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우리는 종말과 대적하고 있다. 과거를 풍미한 영웅이 하나둘 사라지는 지금 친구가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재상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야죠.”
눈물을 뚝뚝 흘린 검은 화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상이 직접 타다 준 찻물을 훌쩍이며 기운을 차렸다. 마시기 싫었던 물이 이제야 조금은 맛이 나기 시작했다.
“재상 각하.”
조용하던 복도에 한 기사가 찾아왔다. 그는 예의를 표한 뒤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연무장 입구를 가리켰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가요.”
의식을 준비하는 데만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재상과 검은 화살이 연무장을 향해 서둘러 걸어가자 자리를 안내한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육중한 문을 밀어내었다.
끼익, 덜컹.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왕실 연무장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대부분이 왕이 임명한 고위직이었고 무려 연합군 사령관인 동부왕 리처드도 참석해 있었다.
깜빡.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눈짓으로 인사한 재상과 검은 화살은 조용히 자리에 섰다.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마르실과 사제들은 경건한 몸짓으로 유리병을 개봉한다.
똑.
약재였던 맨드레이크는 정제와 정제를 거듭했다. 그리고 오로지 순수한 약효만을 남긴 결과물은 작은 한 방울이었다. 경건한 몸짓으로 각성제를 완성한 마르실이 말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원정대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맨드레이크가 정제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의식과 함께 기사왕 눈투성이를 깊은 잠에서 깨우는 것뿐이었다.
“- - - - - - - -.”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암묵적인 허락이라고 생각한 마르실 사제는 각성제를 든 채 세계수 앞으로 다가갔다. 흰 백 나무 앞에는 눈투성이가 쥐죽은 듯 잠들어있었다.
평온해 보인다. 현실이라는 번뇌를 잊고 꿈으로 떠난 신의 딸. 하지만 대륙은 그런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마르실 사제는 세계수와 신을 향해 기도했다.
“어머니 북방이시여, 당신의 딸이 깨우고자 합니다. 부디 손을 놓아주십시오.”
현실과 낙원 사이를 조심스레 엿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마르실 사제는 조심스럽게 각성제를 투여했다. 붉은색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 신이 남긴 근원과 만났다.
반짝!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 세계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떨었고 연무장은 하얀색 꽃잎으로 가득해진다. 그 아름다운 광경 앞에 모든 이들이 입을 벌렸다.
“- - - - - - - -.”
기적이 현실을 간섭한다. 제자를 구하고자 했던 검성의 간절함이 신을 불러냈다. 세계수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자 눈투성이 머리 위에 떠 있던 빛 또한 잦아들었다.
하아.
눈투성이가 격한 숨을 쉬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으로 태동하는 모습과 같았다. 물기 어린 눈가를 닦은 재상은 왕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폐하.”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뜨인다.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광휘는 이미 희망이 되어 새로운 불씨를 지핀 지 오래였다.
격의 상승이 느껴진다. 인간과 가깝고 동시에 신과 가까운 딸이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손가락이 재상의 눈물을 닦아 준다. 눈투성이는 몸을 일으켜 세계수 앞에 섰다.
‘빛이 있으라.’
드디어 기사왕이 잠에서 깨어났다.
* * *
벌써 하루째 가로지르고 있는 대수림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물론 평화로움을 가장한 불쾌한 침묵이었지만, 언데드를 마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찰랑찰랑.
가지고 온 건량은 다 먹었다. 수통에 담긴 물 또한 이제 한 모금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남은 물은 전부 마실까 하다 이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인내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수없이 겪었던 위기를 생각하면 현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참고 또 참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것뿐이다.
사박, 사박, 사박.
벌써 해가 졌다. 오염 범위 권에서 많이 벗어났는지 하늘을 가린 먹구름은 개어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별을 따라 방향을 다시 잡은 나는 그렇게 다시 걸어가려 했다.
다각, 다각!
“?”
하지만 그 순간 익숙한 발굽 소리가 내 귓가를 자극했다. 침착하게 방향을 확인한 나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해골 기수인가? 부근과 멀지 않은 곳에서 접근하고 있다.
슥슥.
나는 서둘러 오염된 흙을 발랐다. 그리고 곧바로 근처 가장 높은 나무로 달려가 재빨리 타고 올라갔다. 오염이 활기를 숨겨줄 것이다. 나는 조용히 아래를 살폈다.
다각, 다각, 다각!
덜컹, 덜컹!
예상대로 해골 기수가 맞다. 20마리 남짓한 놈들은 노획한 것으로 보이는 마차를 끌고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두 눈을 의심하는 나는 후송 대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달칵, 달칵.
언데드 군단은 먹지 않고 자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을 보급과 보급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는 이 광경은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킁킁
더 접근해야 한다. 숨을 죽이고 나무를 내려온 나는 마차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와 함께 조금씩 웅성거리고 있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 - - - - !!”
누군가 갇혀 있다. 언데드 놈들이 연합군을 사로잡은 것이다. 놈들이 포로를 잡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경악한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스릉!
구해야 한다. 앞으로 뛰쳐나간 나는 행렬 후미로 접근했다. 마침 주변을 정찰하던 해골 기수 하나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만, 알아채기에는 이미 늦었다.
서걱!
미약한 저항감과 함께 두개골이 반으로 갈라진다. 그 옆에 있던 해골 기수도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 머리가 부서졌다. 나는 가장 먼저 가까운 마차로 다가갔다.
“뒤로 물러나!”
“인, 인간이십니까?”
쾅!
대답해 줄 여유가 없다. 후미 마차중 하나를 연 나는 곧바로 앞을 향해 뛰어갔다. 내 예상대로 남은 해골 기수 일부가 이쪽을 향해 마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보병이라면 겁을 먹을 기병 돌격이다. 아무리 해골이라도 그 위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베고 사멸시켜야 할 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걱!
세계수 파편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온전히 흡수한 내 몸은 더욱더 자연스럽게 기운을 끌어올렸다. 휘둘러진 검은 분명 허공을 베고 있었다.
쾅!
거센 파동이 놈들을 덮친다. 보이지 않는 검풍 앞에 깜짝 놀란 해골 기수들은 그대로 나자빠져 쓰러졌다. 그때를 노린 나는 빠르게 접근해 해골 머리를 하나둘 수거했다.
“이쪽이야!”
“빨리! 빨리!”
내가 구출한 자들은 연합군이 맞았다. 특이하게도 오크, 엘프, 인간 종족이 뒤섞인 그들은 도망치는 대신 아직 갇혀 있는 다른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가고 있었다.
덜컹!
콰직, 쾅!
다들 베테랑인지 판단력이 빠르다. 이로써 해골 기수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나는 종횡무진 대열을 돌아다니며 적을 베었다. 주변은 어느덧 재가 된 놈들로 가득했다.
파스스.
포로는 50명 남짓이었다. 다양한 종족이 섞인 연합군 병사들은 해골 기수가 전부 쓰러지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그동안 겪은 고초가 심했는지 얼굴이 창백했다.
철컥!
그래도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검을 집어넣은 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병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한 단발머리 여성이 내게 빠르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이십니까?”
계급장을 보니 병사들을 이끄는 백부장이다. 백부장이 워낙 많다 보니 익숙한 얼굴은 아니지만, 다부진 눈썹이 인상 깊다. 나는 쓰고 있던 로브를 조용히 벗었다.
“······검, 검성 각하?”
단발머리 백부장이 기겁한다. 이 어둠 속에서 용케 내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다. 검성이라는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앉아서 쉬고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검성? 검성이 여기 있다고?”
“정말이야! 정말 검성이다!”
연합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절망으로 찌들어 있던 눈동자는 검성이라는 한 마디 이름 앞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을 진정시킨 나는 백부장을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지?”
“사슴뿔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래, 사슴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영문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왜 놈들이 살아있는 포로를 잡고 수도로 이송하고 있다는 말인가. 내 물음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사슴뿔이 다부지게 답했다.
“대수림 부근에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54명은 그 수용소에서 서쪽으로 호송되는 중이었고요.”
“끌려간 이들은?”
“모르겠습니다. 소식이 없습니다.”
우연이 아니다. 놈들은 작정하고 포로를 잡아 서부로 데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며 주변 마차를 둘러보았다.
“앞서간 마차가 있나?”
“많습니다. 이 길을 보십시오.”
놈들은 주로 같은 경로를 이용하는 모양인지 길 위에는 흔적이 다수 겹쳐져 있었다. 지도를 보며 대충 가늠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가려는 수도 방향이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라.”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경!”
“아니, 아직이다.”
어차피 수도로 가려는 길이다. 일단 보이는 족족 포로를 구하고 병력을 집결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나는 자리에 모인 병사를 향해 마지막으로 남은 물을 내밀었다.
“반격이 머지않았다.”
기사왕 눈투성이가 일어나고 모든 연합군이 하나로 뭉치는 그때가 유일한 기회다. 우연히 후방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 무척이나 좋은 기회였다.
“그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