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1화
검은 화살이 기억하는 검성의 첫 모습은 바보 같았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주제에 항상 선두에 섰고 남들이 떠드는 비웃음과 조롱에도 묵묵히 제 할 일만을 했다.
조금이라도 현실과 타협하면 편해질 텐데 왜 저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걸까. 긴 영생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있어 인간 부러지는 검은 미련하고 우둔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묵묵함 뒤에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조차 사랑하는 자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부러지는 검은 마치 하늘 위에 별 같은 남자였다
집착은 존경이 되었고 사랑이 되었다. 검은 화살은 오랜 기간 그를 쫓아 가며 구애를 아끼지 않았다. 일방적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마저도 그녀에게는 행복이었으니까.
그렇게 미련한 남자는 검성이 되었고 자신은 그 곁에 남았다. 북방, 가족, 새로운 왕, 새로운 세상, 쉼 없이 달려온 검은 화살은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고맙다.’
하지만 어머니 북방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미련한 검성은 형제와 북방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남았고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은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고 또 뛰었다. 정신을 차린 두비와 함께 남은 엘프들을 챙긴 뒤 걸어오는 모든 길에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해안가에 도착한 지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나자 나는 뜬눈으로 날을 지새우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루만 더, 반나절만 더, 아니, 1시간만 더. 환각과 환청을 보기를 여러 차례, 넋이 나간 검은 화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눈이 부시다. 수평선에는 마지막 날 황혼이 걸려 있었다. 검성은 돌아오지 못했고 드디어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랑 약속했잖아.”
참고 참았던 눈물이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 검은 화살은 심장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인다.
소리 없는 울음, 바닥을 적시는 눈물. 뿌옇게 변한 시야를 닦고 또 닦아 보았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꼭 돌아온다며.”
검성이 원망스러웠다. 돌아오지 못한 것도, 이런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둔 것도 모두 미웠다. 하지만 그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더더욱 미웠다.
“······저기요.”
멀리서 이쪽 지켜보고 있던 두비가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그리고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와 깨끗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분명 오지 못한 사정이 있으실 거예요. 속단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성지를 지나치는 과정에서 한순간 사라진 언데드 무리를 목격했다. 그 말인즉슨 놈들을 존속하고 있었던 리치 여왕이 누군가에게 사멸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높은 확률로 검성이 승리했다면 언젠가는 해안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두비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판단함과 동시에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볼 것을 제안했다.
“······꽃이 시들고 있어.”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잔류를 원하고 있을 검은 화살은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유리병 속에 넣어둔 맨드레이크의 약효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성이 자신을 먼저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목숨보다 소중한 북방과 눈투성이를 위해서였다. 그 숙명을 이어받은 검은 화살은 기대를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지만, 이겨 내야 한다. 죽을 각오로 자신을 살린 검성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검은 화살은 유리병을 소중히 챙긴 뒤 비틀비틀 일어났다.
“떠날 준비를 해.”
“······알겠어요.”
닻과 올리면 항해할 수 있다.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두비는 정박한 선박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파도가 몰아치는 해안가에는 슬픈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돌아올 거야, 검성.”
홀로 남은 검은 화살은 먹먹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가장 잘 보이는 평지에 표식을 새겨두었다. 그 표식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둘만의 약속 언어였다.
“그때까지 꼭 기다려.”
살아만 있어. 살아만 있으면 이번에는 내가 너를 구할 거야. 간절하게 기도한 검은 화살은 해안가로 걸어갔다. 얼마 뒤 서부를 떠난 선박은 북방을 향해 돛을 펼쳤다.
* * *
찰랑찰랑.
물은 반 모금 마셨다. 한 모금 더 마실까 하다가 물이 얼마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제했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수통 뚜껑을 닫고 건량을 오물오물 씹었다.
남은 물은 반나절치다. 건량도 그쯤 남았으니 앞으로 하루하고 이틀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다. 건량을 침으로 녹여 먹은 나는 가방 속 지도를 꺼내 펼쳐 앉았다.
털썩!
수도로 발걸음을 옮긴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수도에 도착하기는커녕 그 부근에 발이 묶여 방황하고 있었다. 모두 길을 지키는 언데드 탓이다.
치직.
오늘 살핀 길 또한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언데드가 막고 있었다. 지도 위 길에 X자를 친 나는 수도로 향하는 모든 경로가 봉쇄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사왕 놈이 위기라도 느낀 것일까. 사념체까지 돌아다닌 것을 보아 방어선 일부 병력을 데려온 모양이다. 나는 찢어진 입술을 핥으며 지도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일단 수도가 놈의 역린이라는 것은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정면돌파? 무리다. 숨어서 침투하는 것? 대부분이 평지라 내게 불리하다.
말 그대로 방법이 없다. 설상가상 식량과 물까지 떨어졌으니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과 함께 지도를 접으려고 했다.
“음?”
하지만 그 순간 X자가 즐비한 지도 사이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지역이 하나 들어왔다. 바로 처음부터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대륙 국경선, 녹색 바다 대수림이었다.
치직!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경로를 그려보았다. 이곳에서 대수림까지 거리는 반나절. 표시된 길이 없지만, 분명 수도 엘렌디아노 인근에 있는 숲과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전방과 서부 수도에 언데드 전력이 집중되어있는 지금 딱 중간 지점인 대수림을 신경 쓰고 있을까. 아니, 보급이 필요 없는 놈들 특성상 그럴 확률이 몹시 낮았다.
마지막 도박이다. 대수림을 건너는 데 실패하면 그대로 동쪽으로 이동해 방어선과 합류하면 될 것이다. 결단을 내린 나는 지도와 짐을 챙긴 뒤 서둘러 은신처를 떠났다.
사박, 사박, 사박.
예상대로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은신처로 삼은 곳이 하필 동쪽이기도 했고 인접한 대수림이 워낙 넓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후우우우우웅.
언덕 아래 펼쳐진 거대한 대수림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숲이었다. 하지만 녹색 파도라 불리던 옛 위용은 어디 갔는지 하나같이 오염 침식이 진행된 지 오래였다.
몸을 숨기며 이동하기 딱 좋았다. 나는 가방에서 언데드 피를 바른 로브를 꺼내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깔린 대수림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슬슬 느껴진다.
불사왕이 가까워지고 있다.
* * *
“리처드 폐하, 아직 부상이······.”
“괜찮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막판에 무리한 리처드가 눈먼 공격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재상은 즉각 달려와 상처와 오염을 치료했고 다행히 아무런 이상 없이 회복할 수 있었다.
총사령관인 리처드마저 쓰러져 버리면 연합군은 어찌 되겠는가. 지금도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는 재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리처드가 작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래도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네요.”
“네, 반격을 가할 토대를 마련했으니까요.”
방어선을 끊임없이 압박하던 불사왕의 사념체가 한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그 덕분에 밀리기만 하던 연합군은 개전 이후 처음으로 전장을 고착화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연이은 패전 뒤 얻은 첫 승리지만, 그 의미가 남다르다. 급히 방어선을 꾸려야 했던 연합군은 처음으로 군단을 정비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식은 아직 없습니까?”
“해안을 수시로 살피고 있어요.”
이제 남은 것은 약재를 귀하기 위해 떠난 원정대가 무사히 귀환하는 것뿐. 기사왕 눈투성이가 깨어나고 검성이 합류한다면 저 언데드 군단과 전쟁도 해볼 만했다.
“두 분 모두 무사할 거예요.”
좋은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다. 애써 마음을 다잡은 리처드와 재상은 다시 업무를 처리하고자 했다. 그동안 밀려 있는 내정 일을 보기 위해서는 하루가 모자랐다.
탁, 탁, 탁, 탁!
펄럭!
“리처드!”
하지만 그 순간 천막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찾아온 이는 다름이 아닌 전방 방어선을 순찰하기 위해 떠났던 왕비 헬레나였다.
“헬레나? 지금 시간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선박이 돌아왔어!”
선박? 무슨 선박? 설마 서부로 떠난 원정대가 돌아온 것인가? 재상과 리처드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북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슴이 벅차오른 재상은 허둥지둥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헬레나?”
하지만 리처드는 자리에 멈춰 섰다. 분명 함께 기뻐해야 할 헬레나가 표정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얼굴이 참담함으로 물든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 아니죠?”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한참 짐을 챙기던 재상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저 헬레나의 어두운 표정만이 불길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재상은 짐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침묵을 지키는 헬레나를 붙잡으며 흔들었다. 눈가에 작은 눈물이 고인다. 한껏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재상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재상!”
리처드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동시에 헬레나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대답해 다오. 이 불길한 예상이 틀렸고 모두가 무사하다고 말이다.
“······검성이 돌아오지 못했어요.”
선박이 돌아왔다. 맨드레이크를 구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다. 힘이 풀린 재상은 결국 정신을 잃었고 마찬가지로 그녀를 부축하던 리처드도 주저앉았다.
“리처드!”
“나, 난 괜찮아······.”
슬픔을 넘어선 커다란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리처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참으려고 했다. 헬레나가 다급히 안정제와 물을 가져왔다.
“정신 차려! 너까지 이러면 안 돼!”
기사왕 눈투성이가 우리의 희망이었다면 검성은 묵묵히 파도를 막아 주는 기둥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많은 것을 의지했던 리처드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후우, 후우.
책상을 짚은 리처드는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헬레나가 가져온 물과 안정제를 급히 삼킨 뒤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헬레나. 재상을 침실로 옮겨 줘. 나는 스노우가든으로 가서 상황을 보고 올게.”
“······조심해.”
천막을 빠져나온 리처드는 즉각 사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호위 기사들과 함께 전선을 빠져나와 급히 북방으로 달려갔다. 계절은 어느덧 겨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