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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70화 (170/181)

< 170화 >

검은머리 기사왕 170화

리처드가 지휘하는 대륙 연합군은 연이은 후퇴를 거듭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쳐들어오는 언데드 군단을 이기지 못해 전체적인 방어선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패퇴가 아닌 거대한 설계 중 하나였다. 연합군은 후퇴가 시작되는 즉시 방어선은 재구축하고 다시 한번 언데드 군단을 붙잡은 것이다.

수뇌부가 작정하고 설계한 촘촘하게 짜인 거미줄 그 자체였다. 언데드 군단은 승전을 거듭하면서도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한 채 헛발질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2km를 전진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체하는 것인가? 불사왕은 전쟁이 한참 진행될 때쯤 의도를 눈치챘다. 결국, 남은 것은 자신이 가진 권능뿐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 - - -!!!

각종 언데드가 즐비한 전장 위 드디어 사념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왕의 파편이자 권능인 놈들은 투입되는 즉시 방어선을 부수고 연합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살, 살려 줘!”

“기름! 불을 이쪽으로 투입해!”

지난 사념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욱더 강해진 불사왕의 권능은 놈들을 악몽 그 자체로 만들었다. 연합군은 무언가를 해 볼 겨를도 없이 사지가 잘려 죽어 나갔다.

“후퇴하라!”

“포병대! 파편 탄을 준비해!”

또 한 번 후퇴 신호가 떨어졌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병사들은 서둘러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사념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던 포병대가 일제히 포구를 돌린다.

“발사!”

쾅! 콰앙! 쾅!

끼이이이익! 끽!

포탄은 없다. 하지만 수많은 파편이 불을 머금은 채 쏟아졌다. 사념체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했고 직격으로 맞은 일부 놈들은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재장저어어언!”

얼마나 빨리 발사하냐에 따라 병사들 목숨이 걸려있다. 부장이 외치자 포병대는 재장전을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방어선이 무너지고 언데드가 들이닥쳤다.

“기사단! 놈들을 저지해라!”

갑작스레 벌어진 습격 탓에 기병대가 출격 준비를 끝내지 못했다. 기사단은 어쩔 수 없이 검과 갑옷만을 챙기고 나와 병사들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아라!”

“폐, 폐하!”

물론 그 선두에는 기사들과 똑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리처드 왕이 있었다. 그는 다리가 물어뜯긴 한 엘프 병사를 붙잡아 일으킨 다음 후방까지 직접 후송시켜 주었다.

귀가 얼마나 길든, 피부색이 어떻든 상관없다. 같은 피를 흘리고 같은 적을 상대한 이상 모두가 전우다. 이는 왕이 아닌 진심으로 싸우고 있는 다른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이다!”

“폐하를 호위하라!”

낙오되는 이는 없었다. 후퇴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병사들은 종족 구분이 없이 전우를 챙겼다. 하지만 발 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왕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피해가 너무 크다.’

불사왕이 권능으로 탄생시킨 검은 사념체는 너무나 막강했다. 비록 포병대가 이를 저지하고는 있지만, 놈들을 완전히 사멸시킬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검성뿐이었다.

사념체를 상대로도 이리 밀리는데 과연 불사왕이 직접 몸을 일으키면 어찌 될까. 지금까지 잘 버텨 오던 리처드는 처음으로 한계가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헬레나와 재상을 불러다오.”

“알겠습니다, 폐하!”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평지에서 싸움은 승산이 없으니 방어선을 완전히 빼야 한다.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각 왕국 관문 앞에 모든 총력을 쏟아부을 때였다.

꾹.

리처드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 노력과 처절함이 승리를 위한 발판이 되어 줄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전장 위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씁쓸했다.

후우우우우웅- - - - -!!

“놈, 놈들이 물러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외침이 전장 한가운데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후퇴하던 한 용맹한 병사가 하나둘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검은 사념체를 발견한 것이다.

“도망친다고······?”

연합군이 아니다. 포병대는 더더욱 아니다. 불사왕은 마치 등이 찔린 맹수처럼 화들짝 놀라 사념체를 불러들였다. 이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움직임이었다.

서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불사왕이 저리 놀라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 리처드는 후퇴하는 연합군을 향해 외쳤다.

“사념체가 도망친다!”

검의 별이 서부에 떴다. 이를 확신한 리처드는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외침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연합군 또한 왕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       *       *

이상한 감각이다. 아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생소한 감각이라고 말하는 게 옳았다. 나는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검을 다시 한번 휘둘러 보았다.

후웅!

하지만 똑같은 자세, 똑같은 속도로 휘둘러보았음에도 사슬을 베었던 그 감각은 느낄 수 없었다. 경지보다는 권능에 가까운가.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검을 내렸다.

하늘을 보자 일렁이던 먹구름이 가셨다. 나를 추격해오던 언데드 무리 또한 존속이 끊김과 동시에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온몸이 상처와 피로 범벅이다. 등과 허벅지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나는 수통과 붕대를 꺼내려고 했다.

바스락!

그 순간 리치 여왕을 벤 자리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는가? 참으로 끈질긴 녀석이다. 나는 숨통을 마저 끊기 위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음?”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슬로 묶여 있던 존속이 끊어지자 사라졌던 자아가 돌아온 모양이다. 내가 검을 내리자 엘프 여왕이 의식을 되찾았다.

“아, 아아······.”

생명력이 미약하다. 영혼을 담을 그릇이 부서졌으니 아마 시간이 얼마 없을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엘프 여왕은 작은 탄식과 함께 미간을 찡그렸다.

“기억이 돌아왔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꼭두각시가 되어 참으로 많은 악행을 저질렀구나.”

자아를 잃은 상태였으니 그녀를 탓하기도 뭐하다. 그렇다고 위로를 해 줄 상대는 아니었기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엘프 여왕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엘프들은 어찌 되었지?”

“엘레나 공주가 남은 엘프를 이끌었다. 지금은 북방으로 이주해 함께 살고 있지.”

“기사왕이·········?”

“그래, 자비를 베풀었다.”

엘프 여왕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원수처럼 싸우던 인간과 엘프 종족이 함께 살고 있다니 기사왕 눈투성이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내가 넘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구나.”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큰 뜻을 그리는 대의에서도 패배했다. 오만했던 엘프 여왕은 자신과 동족이 구원받은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정말 고맙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마당에 소식이라도 들었으니 여한이 없을 것이다. 얼굴이 편안해진 엘프 여왕은 조금씩 사라지는 생명력을 느끼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자 했다.

“검성, 마지막으로 알려 줄 것이 있다.”

“듣고 있다.”

“나는 불사왕의 존속으로 많은 것을 보고 공유했다. 그리고 놈이 지닌 악신의 권능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게 되었지. 이대로 가면 대륙에는 곧 멸망이 도래할 거다.”

“단언하지 마라. 신이 내린 안배가 있다.”

“나도 그 빛을 보았다. 불사왕 또한 북방의 딸을 경계하고 있어. 허나, 놈은 죽지 않는 존재다. 그녀 혼자서는 이길 수 없어.”

북방의 딸인 눈투성이만이 불사왕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에 도달한 심연은 여전히 깊었다. 나는 죽어가는 여왕을 향해 급히 되물었다.

“······방법이 있는가.”

“놈을 추방해야 한다.”

사멸이 아닌 추방이다. 감히 이 대륙 땅으로 내려온 악신의 존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엘프 여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 방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수도 엘렌디아노로 가라. 그곳에서 불사왕은 이 땅으로 부른 지옥문을 찾아.”

“문을 파괴하면 되는가?”

“그 방법뿐이다.”

존속이었던 엘프 여왕이 아니라면 알아낼 수 없는 정보다. 그 말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그러자 엘프 여왕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지금쯤 불사왕도 내 죽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마 모든 수를 써서라도 엘렌디아노로 향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겠지.”

역린 앞에 놓인 바늘이다. 그 말을 끝으로 여왕은 생명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숨이 끊긴다. 존재가 흐릿해진다. 재가 되어 날아간 그녀는 내게 흐릿한 말을 남겼다.

“마지막 기회는 오직 너뿐이다, 검성. 위대한 발걸음이 저 하늘에 닿기를······.”

*       *       *

슥슥.

상처를 깨끗하게 소독하고 약을 바른다. 그리고 재상이 직접 만들어 준 꿀물 붕대를 감자 저릿함이 몰려왔다. 나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며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동굴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어느새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안전한 은신처를 찾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는데 어느덧 새벽이 지나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어제 숲을 떠난 검은 화살과 두비가 해안으로 향하는 중간지점까지 도착했을 것이다. 슬슬 나도 밖으로 나가 수도와 이어지는 길을 찾아야 했다.

‘꼭 해안에서 만나.’

원래는 일행들 뒤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편이 안전하기도 했고 약속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사왕의 역린이 서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의무라고 해야 할까 사명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엘프 여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운명은 분명 계속해서 나아가라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검은 화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검은 화살이라면 분명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맨드레이크를 무사히 가져가 줄 것이다. 그녀를 굳게 믿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릉!

검은 뽑아 날을 확인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날카로운 칼날이 얼굴을 비춘다.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쉰 나는 검집을 닫으며 남아 있는 마지막 두려움을 몰아냈다.

사박, 사박.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곧바로 검과 가방을 챙긴 나는 수풀을 치운 다음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여전히 불길한 하늘과 함께 서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내가 있는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일행들이 있던 숲을 건너 폭포로 돌아가면 올라가는 능선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강을 따라 성지 부근으로 돌아간다.

수도 위치는 세계수 성지 위쪽, 최종 목적지는 불사왕의 목 바로 아래다. 무거운 숨을 몰아쉰 나는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또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까지 왔을까. 여정의 끝은 보이지 않고 고난이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믿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는 날, 우리는 웃으면서 만났을 수 있으리란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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