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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69화 (169/181)

< 169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9화

피가 흐른다. 시야가 흐릿하다. 숨은 금방이라도 멎을 듯 헐떡였고 정신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점멸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

탁! 탁! 탁!

도망치는 쥐에게 방향성이란 없다. 일행들을 업은 채 숲을 가로지르자 끝을 알 수 없는 도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악문 나는 앞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 - !!

사특한 기운이 목덜미를 찌른다. 비행체 언데드가 하늘로 날아올라 사냥감을 찾는다. 감히 여왕을 건드린 자가 누구인가. 죽음은 우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황이 좋지 않다. 숨을 죽인 숲의 고요함이 도리어 나를 초조하게 했다. 얼마나 더 뛰어갈 수 있을까. 아니, 도망친다고 한들 죽음이라는 운명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아본다. 번뇌와 번민이 나를 고통스럽게 함에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내가 아닌 등에 업고 있는 이 두 명이 죽는다.

버텨야 한다. 살려야 한다. 무게를 손이 아닌 등에 짊어졌을 때 숙명은 각오라는 축이 되어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묻고 있었다.

‘두려운가.’

죽는 게 두려운가 잃는 게 두려운가. 내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었고 그 선택은 항상 후회와 성취를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선택권이 없는 상황은 언제나 있었다.

풀썩!

그대로 방향을 틀어 갈림길이 위치한 우거진 수풀로 들어갔다. 그리고 양지 마른 곳에 두비와 검은 화살을 내려놓은 뒤 가방 속 수통을 꺼내 내 얼굴 위로 부었다.

쪼르륵.

땀과 피를 씻겨내자 정신이 돌아온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은 나는 검은 화살과 두비의 숨을 확인했다. 붙어 있기는 하나 위태롭다. 역시 오염 억제제가 필요하다.

퐁!

검은 화살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오염 억제제를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뚜껑을 개봉한 뒤 두비 입에 한 모금, 검은 화살 입에 나머지를 흘려 넣었다.

쿨럭쿨럭!

둘이 거칠게 기침한다. 입 밖으로 검은색 물질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억제제가 제 역할 한 모양이다. 그 순간 눈가를 파르르 떤 검은 화살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검은 화살.”

“으, 으으······.”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 오러를 일으켜 내부에 남아 있는 오염 침식을 전부 불태워야 한다. 그녀의 손은 꾹 움켜잡은 나는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오러로 몸을 보호해.”

치지직, 칙. 목소리에 반응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오러를 일으킨다. 나는 그 오러 위에 세계수 기운을 실었고 이내 기생충 같던 오염 물질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흐윽, 흑.”

드디어 의식이 돌아왔다.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있던 검은 화살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이제 다 괜찮아. 곧바로 그녀를 끌어안은 나는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하마터면 검은 화살이 죽을 뻔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두려우면서도 나 자신을 향한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퐁!

도비의 가방에서 맨드레이크를 꺼냈다. 그리고 내용물이 빈 억제제 병 안에 넣고 꼼꼼하게 밀봉했다. 이 정도 생기면 북방까지 시들지 않고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검은 화살, 잘 들어.”

이제 때가 왔다. 맨드레이크를 공용 가방에 넣어준 나는 검은 화살과 눈을 마주쳤다. 붉게 물든 눈가와 떨리는 입술이 애처로웠지만, 이 말을 꼭 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두비를 데리고 저 반대쪽으로 뛰는 거야.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어?”

“아, 아······.”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든 검은 화살이 내 옷깃을 강하게 움켜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길을 냉정하게 뿌리친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붙잡았다.

“내 눈을 똑바로 봐.”

검은 화살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확답을 받기 위해서라도 괴로운 선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항구로 돌아가. 이틀이 지나도 내가 오지 않으면 망설이지 말고 떠나.”

내가 품은 세계수 기운은 좋은 미끼다. 아마 리치 여왕은 사멸하는 그 순간까지 내 도발에 응해줄 것이다. 그때가 검은 화살과 두비가 도망칠 유일한 기회였다.

“맨드레이크를 전해, 꼭.”

모두가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다.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기사왕 눈투성이를 깨워 불사왕과 대적해야 한다. 왕의 종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명을 그녀에게 넘긴다.

“흐윽, 흑.”

검은 화살을 괴로워했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만큼 이것이 무를 수 없는 판단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이내 맨드레이크가 든 가방을 움켜쥐었다.

“······어머니 북방이 함께하길.”

이제 가야 한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검은 화살과 이마를 맞대었다. 어머니 북방이 너와 함께하길. 애절한 기도와 함께 남아있는 미련을 떨쳐냈다.

스릉!

검은 화살이 들고 있던 검을 챙겼다. 그리고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러자 심장 박동을 느낀 세계수 기운이 기다렸다는 듯 요동쳤다.

끼이이이익 - - - - -!!!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밝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모든 언데드가 이 상극 앞에 반응했다. 미끼를 던진 나는 그대로 우회해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탁, 탁, 탁, 탁!

이쪽이다. 여왕의 둥지를 건드린 나를 보아라. 증오는 깊을수록 달콤하고 분노는 강할수록 타오른다. 나는 보란 듯이 기운을 퍼트려 감히 죽음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 - - - - - - -.]

그 순간 거대한 눈동자가 느껴진다. 나를 찾던 리치 여왕이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온 것이다. 미끼가 제대로 통했음을 직감한 나는 뛰어가는 속도를 올렸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지나친다. 어둠이 어둠을 삼키고 공간이 공간과 합해진다. 이곳은 어디인가. 별 한점 보이지 않는 서부는 검이 만들어낸 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탁!

숲을 빠져나오자 광활한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놈들을 여기로 데려왔으니 늦기 전 일행들이 도망치면 된다. 뜀박질을 멈춘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끼이이이익 - - - !!

하늘은 날아오른 비행체 언데드가 먹구름을 이뤘고 저 멀리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검은색 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움직이는 죽음을 마주했다.

사르륵!

연기가 형체를 이룬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 권능 앞에 리치 여왕은 완전한 존속이 되어있었다. 증오가 넘실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내게 흐릿한 의지를 보내왔다.

[도망치려······, 하느냐······.]

“아니.”

맨드레이크를 확보했다. 검은 화살과 두비도 이제 안전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찌 될지 모르는 운명뿐. 나는 그것을 투쟁이라 불렀고 삶의 일부라고 여기며 살았다.

스르릉!

드넓은 평원 아래 검을 뽑았다. 검은 화살이 들고 있던 엘프식 검은 어두운 하늘 아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자아를 잃은 리치 여왕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후회했다. 실수도 했다. 나약했으며 끝없이 방황했다. 하지만 그것이 부끄러웠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하늘 아래 떳떳했던 삶. 나는, 나 부러지는 검은······.

“물러나지 않는다.”

쾅!

힘찬 박동과 함께 세계수 파편이 폭발했다. 나는 순식간에 날아가 검을 휘둘렀고 리치 여왕 또한 비명을 지르며 기운을 발산했다. 녹색 빛과 어둠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쾅! 쾅! 쾅!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다. 서로가 상극인 기운은 닿자마자 폭발했다. 밀려나고 밀고, 피하고 휘두르는 과정이 불과 1초 사이에 수십 번씩 일어나고 있었다.

검의 경로가 보이지 않는다. 직감하고 예측해야 한다. 그동안 필멸자가 펼쳤던 모든 검술은 경험에서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깨달음이 그 빈자리를 채워간다.

[끼아아아아악 - - -!!]

리치 여왕이 증오와 분노를 느꼈다. 검은색 연기로 변한 그녀는 한순간 뒤로 물러나더니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검은색 권능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끼이이이이익!

피하지 않는다. 하단으로 검을 끌어올린 나는 허공을 베었다. 아니, 분명 허공을 벤 검격은 불사왕의 권능을 가르고 있었다. 깜짝 놀란 리치 여왕이 재차 공격을 가했다.

쿠르르르릉 - - -!!

벤다, 벤다, 또 벤다. 나는 그 모든 공격이 느리게 다가오는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시야가 번쩍 점멸한 순간 검은 연장선이 되었고 더 이상 베어지지 않은 것은 없었다.

탁!

자세를 숙인다. 앞으로 발을 디딘다. 그리고 근육을 폭발시키자 내 몸은 탄두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권능이 베어진 리치 여왕은 검을 들어 황급히 나를 저지했다.

쾅! 치지지지지직!

검날을 억지로 맞댄다. 그러자 마치 철을 녹이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차한 검 사이로 나와 눈동자를 마주한 리치 여왕은 불신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권능이다. 불사왕이 행하는 권능은 절대적인 영향력이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법칙이다. 하지만 그런 권능을 거스르는 검을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검을 쥐어라, 아이야.’

심장 위 세계수 파편이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눈처럼 녹아내렸다. 신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정답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줄 뿐이다.

‘관철하고.’

쾅!

리치 여왕이 뒤로 밀려났다. 어둠을 몰아낸 것은 빛이 아닌 검이었다. 아무것도 맺히지 않은 검은 절대적인 법칙마저 베고 그림자 뒤에 숨은 겁쟁이를 노리고 있었다.

심연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거대한 눈동자가 경악한다. 리치 여왕은 무언가에 떠밀린 듯 검을 휘둘렀다. 힘이 실린 권능이 존재 자체를 지우듯 쇄도했다.

‘또 이어가라.’

서걱!

나는 검을 휘둘렀다.

챙!

[아, 아아······!]

리치 여왕이 들고 있던 검이 잘렸다. 그녀는 죽음이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 앞에 썩은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죽음 그 자체인 자신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가.

[어째서!]

죽음이 사멸한다고? 불사왕의 목소리와 리치 여왕의 목소리가 겹친다. 그 의문은 곧 발악이 되었고 발악은 방향을 잃는다. 사방에서 검은색 연기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끼이이이익!

달칵, 달칵! 달칵달칵!

리치 여왕이 도망친다. 수많은 해골과 언데드가 나를 막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연이어 펼친 검격은 거대한 무리마저 베어 썩은 살처럼 떨어져 나가게 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을. 서둘러 연기로 변하려는 리치 여왕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리고 앞으로 검을 겨눈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존속의 사슬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루었을 때.’

서걱!

[- - - - - - - - - -!!!!!!]

사슬을 잘랐다. 리치 여왕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존속이 끊어진 언데드 무리는 먼지가 되어 재처럼 흩날렸다. 그 순간 밤하늘에선 한 줄기 유성이 떨어졌다.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라.’

검성의 권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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