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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기사왕-167화 (167/181)

< 167화 >

검은머리 기사왕 167화

처음에는 비열한 함정이나 불사왕 권능을 의심했다. 오염 지대 속 하늘 정원은 너무나 이질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방에서 풍겨 오는 냄새, 질감, 소리가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인위적으로 조성할 수 없는 자연이었다.

잠시 넋이 나갔다. 온몸이 땀과 더러운 물 그리고 오염 성분으로 물들어있던 나는 깨끗한 자연 위에 잠시 정신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탁!

젠장,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 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엘레나 공주가 알려 준 특정 지형을 찾아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자주 불어야 한다. 특히 가파른 언덕이나 절벽일수록 맨드레이크가 자생할 확률이 높다. 나는 미리 표시한 지점으로 다가가 열심히 바닥을 살폈다.

사박, 사박!

하늘 정원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바닥에는 아는 약재부터 모르는 약초까지 정말 별별 식물들이 전부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맨드레이크만큼은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희귀도 따지면 중급을 오가는 단순 각성제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부근에서는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이다.

허탕을 칠수록 초조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강한 기운을 풍기는 약재도, 천만금을 주어야 구할 수 있는 영약 재료도 지금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맨드레이크를 찾아야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수풀과 바닥이 누워 있는 눈투성이 모습과 교차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렇게 물에 뿌리는 설탕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찌르르, 찌르르.

장소를 옮기고 또 옮겼다. 이 넓은 구역을 허리 한번 안 펴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몸은 흙투성이, 저 멀리 보이는 하늘 또한 갈색 황혼으로 물들어 있었다.

풀벌레가 나를 비웃는다. 그래, 이 지경이 되도록 맨드레이크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마치 신의 장난과도 같은 상황 앞에 아무런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곧 해가 질 것이다. 찾았으면 알려 올 법도 한데 일행들은 아무런 신호가 없다. 어둠이 곧 찾아올 것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미루고 내일 해를 기다려야 했다.

졸졸졸.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맑게 흐르는 개울로 다가가 흙으로 물든 얼굴과 손을 묻었다. 차갑고 맑은 물이 목구멍을 넘자 지쳤던 기력이 조금 되돌아왔다.

두비와 검은 화살도 지쳤을 것이다. 수통에 깨끗한 물을 가득 채운 나는 어딘가에 있을 일행을 찾아 걸음을 옮기려 했다.

끼이익, 덜컹!

하지만 그 순간 우리가 들어올 때 사용했던 하늘 정원 입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누군가가 연 것이다.

일행들이 아니다. 분명 밖에서 열고 들어왔다. 목덜미가 서늘해진 나는 흔적을 재빨리 지우고 우거진 수풀로 몸을 숨겼다.

달칵,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는 다름이 아닌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 언데드였다. 놈들은 그동안 처치했던 해골 기수와는 다르게 몸집이 작고 움직임이 무척 정교했다.

지금도 보아라, 마치 이곳이 배양실이라도 되는 마냥 온몸을 천으로 감싸 오염을 억제하고 있다. 내가 떠올린 것은 여왕과 병정개미 아래서 일하는 작은 일개미였다.

달칵, 달칵?

달칵! 달칵달칵!

놈들은 알 수 없는 음성으로 의사소통을 나눈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듯 대열을 이뤄 어딘가로 걸어갔다. 물론 나 또한, 들키지 않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놈들을 따라갔다.

사박, 사박, 사박.

침입자를 눈치챈 두비와 검은 화살은 저 멀리 잘 숨어있다. 가만히 있으라 수신호를 보낸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해골 놈들이 도착한 한 장소를 조용히 살폈다.

끼익, 덜컹!

그곳은 정원 손질 도구를 모아두는 작은 창고였다. 익숙한 듯 그 앞에 모인 놈들은 안에서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가방이다. 가방에는 갖가지 약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달칵, 달칵!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언데드 놈들이 하늘 정원을 오염시키지 않은 이유는 저 약재를 재배하고 채집할 장소가 필요해서였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필요로 인한 행위라는 것이다. 나는 약재 가방을 들고 돌아가는 해골 놈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 - - - -!”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발견했다. 가방 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조그마한 붉은색 열매와 익숙한 풀잎 3장을 말이다. 놈들은 가방 전체를 맨드레이크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덜컹.

약재 가방을 챙긴 해골 놈들이 문밖으로 나가자 정원은 언제 손님을 받았냐는 듯 고요함을 머금었다. 나는 그제야 숨어 있던 수풀을 빠져나와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다.

“맨, 맨드레이크에요!”

“상당한 양이야. 매번 이 정도 채집했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게 당연해.”

반나절을 넘게 허탕 친 이유가 다름 아닌 놈들에게 있었다. 저 언데드 해골 놈들이 이미 모든 맨드레이크를 채집한 것이다.

혹시 몰라 허름한 정원 창고를 뒤져 봤지만, 비어 있는 건 매한가지. 순간 허탈함을 느낀 나는 문 옆에 무너지듯 앉았다.

계속해서 꼬이는 상황이 피곤함을 유발한다. 내가 지쳤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자 검은 화살이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

“······포기할 생각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누구도 아닌 기사왕 눈투성이를 위한 일이다.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었으면 무모한 항해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기회를 잡자니 그 위험성이 너무나 컸다. 놈들 뒤를 쫓아 맨드레이크를 확보한다는 계획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준비됐어.”

시간이 나를 재촉한다. 저 멀리 황혼과 검은 화살을 번갈아 바라본 나는 결국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지금은 리스크를 걸더라도 반드시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두비, 너는 돌아가도 좋아.”

“왜요?”

“약속은 여기까지니까.”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무리 최우선으로 보호한다고 해도 두비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코웃음으로 대답했다.

“이거 무르는 판이었어요? 어차피 당신들이 못 빠져나오면 저도 죽어요.”

“두비.”

“뭐해요? 안가고.”

이미 판돈을 던졌으니 무를 수 없는 판이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나와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밖을 빠져나갔다. 폭풍의 눈은 어느덧 전야가 되어있었다.

*       *       *

흔적을 쫓아 뒤를 밟았다. 하늘 정원에서 맨드레이크를 챙긴 해골 놈들은 긴 계단을 밟아 성지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세계수 뿌리가 형성한 거대한 성지 지하는 오직 세계수를 모시는 엘프 사제들만이 오고 갈 수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불사왕이 서부를 점거한 지금은 오직 오염된 물질과 썩은 냄새를 풍기는 뿌리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익, 퓽!

검은 화살이 순식간에 화살 두 개를 발사한다. 날아간 화살은 입구를 지키는 해골 언데드 두 마리를 가뿐하게 처리했다. 경비는 이것이 끝이다. 우리는 입구로 달려갔다.

후우우웅.

지하 안쪽을 살피자 눅눅한 공기가 얼굴을 강타한다. 그나마 빛이 들어오던 지상과는 다르게 지하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침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후우.

도비에게 조언받은 대로 숨을 느리게 쉬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심장 박동이 줄어들며 기척이 지워졌다. 눈을 뜬 나는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치지직, 칙.

그동안 겪었던 침식은 애들 장난이었다. 일행들 모두 오염 억제제를 한 모금씩 먹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신과 신체가 망가질 뻔했다.

후우우우웅.

영혼 같은 안개가 떠다닌다. 재가 먼지처럼 휘날린다. 묘하게 느껴지는 열기는 침식으로 인한 고통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아마 악한 자가 지옥 입구를 찾는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힘겹게 숨을 몰아쉰 우리는 그렇게 밑으로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저기 보여요.”

드디어 흔적이 끊겼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해골들이 보인다. 일꾼처럼 무언가를 옮기고 있는 놈들은 하나 같이 제일 큰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곳이 분명하다. 통로를 지난 나와 일행은 마지막 해골 놈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그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심연 가장 깊은 곳 정체를 알 수 없는 방 앞에 도착했다.

킁킁.

시큼하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 안쪽을 살피자 푸른 불꽃 일렁이는 거대한 방에 모든 해골이 모여 무언가를 정제하고 있었다. 재료는 당연히 가득 쌓인 맨드레이크였다.

“수가 너무 많아.”

싸워야 하는 전장이 넓고 적들 숫자가 많다. 우리가 가진 전력과는 상관없이 은밀한 기습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몰래 훔쳐 오자니, 불가능한 건 매한가지다. 자칫하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놈들이 살아 있는 기운을 감지할지도 몰랐다.

어찌해야 하는가. 저 멀리 쌓여 있는 맨드레이크 더미가 자신을 가져가 달라고 애처롭게 손짓한다. 한동안 고민한 나는 결국 오른쪽 허리에 찬 검집 위로 손을 올렸다.

“잠시만요.”

하지만 그 순간 재빨리 끼어든 두비가 나를 만류했다. 녀석은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한 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제가 다녀올게요.”

“안 돼. 아무리 너라도······.”

“왜 그리 잘 숨냐고 물어보셨죠?”

두비는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겉옷을 벗으며 그동안 꽁꽁 감싸고 있던 자신의 상반신을 보여 주었다.

“이게 제 비결이에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두비의 몸은 목 아래까지 침식이 진행된 상태였다. 오염으로 존재를 가린다. 그동안 녀석이 살아남은 비결은 다름이 아닌 침식된 몸이었다.

“꼭 돌아가겠다고 약속해 줘요.”

“······내 명예를 걸겠다.”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두비는 곧바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한 병 반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오염 억제제의 용도를 확정하게 되었다.

“입구를 지켜 줘.”

“신호 보낼게.”

여차하면 두비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검은 화살에게 방 입구를 맡긴 나는 통로로 다시 돌아가 퇴로 경로를 확인했다. 습한 공기가 긴장한 심정을 조용히 짓누른다.

톡, 톡, 톡.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간혹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해골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어두운 통로 옆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숨어든 두비는 잘하고 있을까.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과연 맨드레이크를 구해 갈 수 있을까. 어둠과 시간 속에 빠진 자연스럽게 상념을 곱씹고 있었다.

달그락.

그리고 약 30분가량이 지났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신호라고 생각한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밀어 두비와 검은 화살이 걸어올 통로를 바라보았다.

달칵, 달칵.

하지만 통로 복도에는 일행이 아닌 다른 방에서 나온 해골 언데드가 조용히 걷고 있었다. 놈은 붉은색 액체가 일렁이는 유리병을 든 채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찌릿.

이상하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또 다른 감각이 내게 재촉을 해 왔다. 거리는 불과 60m, 자세를 바짝 숙인 나는 놈이 들어간 방 앞으로 다가가 안쪽을 살폈다.

쪼르르륵.

파괴된 성물 위로 저주받은 악신이 표식을 남겼다. 그 아래는 푸른색 물이 흐르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고 해골 언데드는 들고 온 붉은 액체를 그 위에 흘려보냈다.

두쿵!

파동이 일어난다. 덩달아 내 심장 속 세계수 파편이 저 존재를 경계했다. 놈들이 맨드레이크를 추출해 간 이유는 다름이 아닌 죽은 존재를 깨우기 위함이었다.

두쿵! 두쿵!

호수 속에는 심연을 들여다본 눈동자가 눈을 뜬다. 불사왕이 제물로 바친 영혼은 다름이 아닌 엘프 여왕. 죽었다고 알려진 그녀가 언데드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 - -!!

검성!!!

저 멀리 검은 화살이 고함을 내지른다.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나는 곧바로 뒤돌아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숨이 막히는 지하 공간은 드디어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달칵! 달칵! 달칵!

끝이 보이지 않는 해골이 통로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 앞에는 맨드레이크를 쥔 도비와 검은 화살이 다급히 도주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일행을 향해 달렸다.

지옥이 열렸다.

지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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